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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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
진리·평화·재물의 조건없는 나눔

최근 우리나라에도 보시문화가 확산되고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얼마 전 기빙 엑스포(giving expo)가 열리기도 했다. 단순히 특정한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지키면 좋은 사회적 미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보시는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나누어 쓰는 것이며, 분배를 통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끼리 혹은 생명체들이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시는 누가 특정한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돌고 도는 사회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베푸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단순한 ‘더불어 삶의 미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생명의 일체화’를 위한 숭고한 도덕적 행위로 승화될 수 있다.
불교적 가르침에 의하면 보시는 세 가지로 구분한다.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 진리를 나누어 주는 것, 평화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누어 준다는 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공유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내 재산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 나의 배움을 남과 공유하는 것이며, 나의 안락함을 남과 더불어 만끽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역시 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조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거나 완성된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내가 잠시 보관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소유하며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부처님께서 인도의 녹야원에서 다섯 명의 비구들을 위해 처음으로 설법했을 당시에도 보시의 중요성과 실천에 대해 설파하셨다. 이후의 경전에서도 보시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새삼스레 보시를 강조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보시의 공덕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한 구절만 살펴보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코삼비의 코사라 동산에 계실 때의 일이다. 마하주나라는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 어떻게 하는 것이 세간의 복을 닦는 길인지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비구들에게 거주할 방과 전각을 보시하라. 새롭고 깨끗한 옷을 보시하라. 갖가지 먹을 것을 보시하라” 보시를 하면 선남자 선여인에게 큰 복을 얻게 하고, 명예를 얻으며 공덕을 얻는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 갈수록 넓고 깊어지는 것처럼 선남자 선여인이 보시를 하면 공덕도 넓어진다는 것이다.
보시를 할 때는 무심하게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원을 세우고 보시하는 것이 훌륭한 일이라는 것이다. <증일아함경>제19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보시할 때는 그것이 많거나 적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고 원을 세우지도 않으며, 믿는 마음도 없으면 그 과보는 즐겁지 않느니라. 정성껏 마음을 쓰고 차별을 두지 않으며, 후세에 다리가 되겠다고 서원하면 그 과보는 훌륭하니라. 아득한 옛날 빌라마라는 범지가 팔만사천의 금은 등을 팔만사천의 미녀들에게 보시하였었다. 그러나 그런 보시는 집 한 칸을 지어 수행하는 출가자에게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또한 한 사람의 수행자에게 보시하는 것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만 못하다. 수행자에게 보시하고 삼보에 귀의했더라도 스스로 5계를 수지하는 것만 못하다. 5계를 수지하더라도 잠시나마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만 못하느니라. 설사 그렇게 보시했더라도 일체의 존재는 무상하여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 못하니라”
이상의 가르침은 보시의 참다운 정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보시에도 가치의 상하가 있다. 그래서 단순히 재물을 공유하는 것 보다는 법을 공유하는 것이 좋으며, 나아가 생명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정신적 육체적인 평화를 제공하는 것이 훌륭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세간에서 말하는 선이요 정의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것이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제법무상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궁극적인 가치로 설파되고 있다.
마땅히 머무는 마음 없이 보시하라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 사회의 징검다리가 되겠다는 서원,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겠다는 굳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 것과 우리들 자신의 결의는 분명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한두번은 보시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굳은 결의가 없는 사람은 진정한 보시의 의미를 실천궁행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전생명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그들이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게 한다면 그러한 일을 위해 기꺼이 보시하는 것이다. 보시는 결국 나의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다른 인간, 혹은 생명체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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