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주관적이기에 공유할 수 없는것
예전에 서해 교전으로 아들을 잃은 유족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아픔이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 그 기사에는 유족이 소리죽여 오열하면서 역시 해군 예비역으로 퇴임한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었다’라고 단 한마디만 했다고 간략히 나와 있었고, 그 간단한 한마디에 나는 울고 말았다. ‘아들이었다’라는 말에서 과거형을 나타내는 그 ‘었’의 무게를 아는 자,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그가 사망한 아들에 대하여 ‘여전히 내 가슴 속에 자랑스러운 아들이다’라고 하였다면 전혀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가슴 속에서 그의 아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기에.
결국 내가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육신을 지닌 아들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자식이라는 집착을 놓아 과거형으로 말 할 수 있기까지 우리가 느껴야 할 고통인 것이다. 그 고통이라는 느낌이나 감정은 분명 일어났다가 꺼지는 물거품과 같은 것이기에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허망하다는 것이 결코 절절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절절하기에 그 허망함을 알아차리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 절절함이 깊을 수록 그 집착의 뿌리 깊음을 알 수 있기에.
그러나 그것은 알아차린 자의 몫일 뿐, 과연 소위 마음공부를 한다는 우리는 마음 아픈 이들의 그 절절한 고통에 대하여 얼마나 공감하면서 그들과 함께 고민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같이 손가락을 잘렸다고 조폭의 단결을 위한 절단과 식솔의 생계를 담당하는 노동자의 절단에 의한 고통의 절절함이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마음공부를 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개체로서의 단절을 절감해야 한다. 아무리 내가 당신을 공감한다고 생각해도 결코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음에, 내가 너의 눈물을 닦을 수 없음이요, 네가 나의 눈물을 닦을 수 없음이라.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란 그러한 고통의 허망함을 알아 그 고통을 놓으라고 할 수 밖에. 그러나 고통의 절절함 속에 있는 그들에게 그 절절함이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소귀에 경 읽는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한 나무에서 뿌리와 가지는 한 몸이요, 가지와 가지도 역시 한 나무의 한 몸이라. 그러나 뿌리를 자르면 가지도 죽지만, 가지를 잘라도 다른 가지는 태평하니 여기에 한 몸이면서 한 몸이 아닌 가지의 슬픔이 있다.
그렇기에 참선 마음공부의 출발점은 ‘나는 누구인가’이지만, 이것이 종착점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허망한 고통과 슬픔이 난무하는 세속의 현실 속에서 풀어가기 위해서는 물어야 할 것은 나는 누구인가보다는 ‘너는 누구인가’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너는 누구냐고 묻는 자에게 또한 우리는 말해야 한다. 네가 나를 아느냐고. 마음공부를 통해, 평등심을 통해 타인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공감을 할 수 있다면 그 마음공부는 개체에 대한 단절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