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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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입법계품 <45>
비슬지라 거사의 법문

선재동자는 다시 남쪽의 선도(善度)라고 하는 성에 있는 비슬지라 거사를 찾아 나섰다. 그는 항상 전단좌 불탑(佛塔)에 공양하고 있는 사람이다. 마침내 선도성에 이르러 거사의 집을 찾아간 선재동자는 거사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 나서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이 ‘열반의 경계에 들지 않음’이다. 나는 이렇게 여래가 이미 열반에 들었다거나 이렇게 여래가 지금 열반에 든다거나 이렇게 여래가 장차 열반에 들리라거나 하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노라. 나는 시방 모든 세계의 부처님 여래들이 필경에 열반에 드는 이가 없는 줄을 알고 있는데, 다만 중생을 조복시키기 위하여 일부러 보이는 것은 예외가 될 것이다.
선남자여, 내가 전단좌 여래의 탑 문을 열 때에 삼매를 얻었으니 이름이 불종무진(佛種無盡)이다. 나는 생각마다 이 삼매에 들고, 생각마다 모든 부처님들의 한량없이 훌륭한 일을 안다.”
선재동자가 물었다.
“이 삼매는 그 경계가 어떠합니까.”
비슬지라 거사가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내가 이 삼매에 들고는 차례차례 이 세계의 부처님들을 보았으니, 이른바 가섭불·구나함모니불·구류손불·시기불·비바시불 등이며 잠깐 동안에 백 부처님을 보고 천 부처님을 보고, 백천 부처님을 보고, 내지 불가설 불가설 세계의 티끌 수 부처님들을 차례로 다 본다.
또한 저 부처님들이 처음으로 마음을 내고 선근을 심고 훌륭한 신통을 얻고 큰 원을 성취하고 묘한 행을 닦고 바라밀다를 구족하며,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청정한 법의 지혜를 얻고 마군들을 항복받고 정등각을 이루어 국토가 청정하고 대중이 둘러싸고 있음을 본다.
나는 그 부처님들이 큰 광명을 놓으며 묘한 법륜을 굴리며 신통으로 변화하는 갖가지 차별을 다 지니고 다 기억하고 살펴보고 분별하여 나타낸다. 선남자여, 나는 다만 이 보살들이 얻는 열반의 경계에 들지 않는 해탈을 얻었을 뿐이다.”
비슬지라 거사가 설하고 있는 ‘보살들이 얻는 열반의 경계에 들지 않는 해탈’의 법문은 법신(法身)은 상주(常住)한다고 하는 신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불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여 모신 곳이다. 불탑을 공양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육신(肉身)을 가졌던 역사상의 석존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부처님은 결코 열반에 드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영원불멸한 부처님의 법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본질은 결코 어떠어떠한 형상을 지닌 특정의 인물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법이다. 부처님이란 바로 이 법을 깨달은 지혜인 것이다. 육신은 멸해도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불멸의 가르침으로서 인간생존의 진정한 도(道)로써 살아있는 것이다.
거사가 불탑의 문을 열었을 때에 ‘부처님의 종성(種姓, 家系 또는 系譜)이 다함이 없다[佛種無盡]고 하는 삼매’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법신이 상주불멸임을 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불탑 속에는 무량하고 무변한 여러가지 훌륭하고 미묘한 법이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거사는 순간마다 이 삼매에 들어서 언제 어디에서든지 훌륭한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거사는 시방의 불가설 세계의 티끌 수 부처님들의 모습과 그 부처님들이 처음 발심하여 선근을 심고 묘한 행을 닦고 마군들을 항복받고 정등각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정한 불국토의 광경이나 중생을 교화하는 모양도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거사는 일체의 부처님을 현재에서 보고, 그 부처님들이 설하는 일체의 법을 모두 듣고 기억하고 수지해서 마음에서 잊어버리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부처님들이 큰 광명을 놓으며 묘한 법륜을 굴리고, 갖가지 신통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분별해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거사가 살고 있는 성의 명칭이 선도(善度)인 것은 거사가 항상 법신불을 공양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중생들을 잘 제도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사의 이름이 ‘비슬지라(法을 포섭한다는 의미)’인 것은 그의 지혜가 광대해서 시방의 일체 법문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세간의 지혜로써 세속에 머무르면서 자비를 행하여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사의 보살행은 항상 법신불을 공양하는 데에서 나오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나 부처님을 출현시킬 수 있는 화엄의 보살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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