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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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의미 상실한 교육
김상득/전북대 교수·윤리학

수학능력 평가시험(수능)이 끝났다. 아니 수능은 끝나지 않았다. 재수생 강세로 고3생들은 벌써 2005년 수능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물론 어김없이 금년에도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수능 비관 자살은 되풀이되고, 공교육 무용론이 점점 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수능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테세우스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큰 침대와 작은 침대를 만들어 지나가는 행인을 눕힌 다음 그 침대에 맞지 않으면 사지의 돌출된 부분을 잘라내어 침대에 맞추었다고 한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신화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죽은 신화가 아니라 21세기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현실이다.
학생 자신의 자아나 꿈, 적성 혹은 소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직 수능 점수라는 침대에 맞추어 학생들의 꿈과 적성을 이 사회는 잘라내고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다. 이 시대의 테세우스인 ‘수능 점수’는 아예 인간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에릭 프롬은 현대 문명을 비평하면서 “존재냐 소유냐?”를 묻고 있다. 그는 존재가 먼저이고 소유는 그 다음이라고 주장한다. 존재, 즉 사람됨이 먼저이고, 부나 지위 혹은 지식은 그 다음이다. 우리의 교육은 거꾸로 소유가 먼저이고, 존재는 그 다음이다. 아니 교육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고, 부모의 가치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소유에 의해 존재가 결정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소유의 논리에 따를 경우, 지식이나 부를 소유하지 않는 자는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자살은 소유 교육의 필연적 귀결이다.
백년대계인 교육의 근본 방향이 혁명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자살과 같은 수능 후유증은 예견된 일로 매년 되풀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의 미래 역시 소망이 없다. 침대에 사람을 맞추어서는 안 되고, 거꾸로 침대를 사람에 맞추어야 한다. 수능에 청소년들을 맞추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수능을 맞추어야 한다. 청소년을 수능의 노예로 만들지 말고, 청소년이 수능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교육의 근본 방향이 소유에서 존재로 바뀌어야 한다. 소유의 교육은 이 시대의 또 하나의 테세우스이다.
맹자의 어머니에게 교육의 지혜를 배우자.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공동묘지 근처, 시장 근처 그리고 학교 근처로 3번 이사를 했다. 장례 흉내와 장사꾼 흉내를 내던 맹자가 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자 비로소 공부에 전념하여 위대한 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맹모의 삼천지교에서 자식의 공부를 뒷바라지한 맹모의 지극정성을 본받아 학원 일번지 강남으로 이사한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맹모삼천지교를 다르게 해석한다. 맹모는 아들로 하여금 죽음을 통해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 장사를 통해 삶의 현장을 체득하게 하기 위해 학교에 앞서 공동묘지와 시장 근처에 삶의 터를 잡은 것이다.
교육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에듀카레’(educare)는 ‘밖으로 이끌어내다’의 뜻이다. 본래 청정한 자기 성품을 깨달아 일체의 집착과 번뇌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불교 그 자체가 크나큰 교육이다. 교사는 밖에서 새로운 무엇, 즉 지식을 주입시키는 자가 아니라, 학생으로 하여금 이미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하여 개발시키도록 하는 계몽자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내면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드러나지 않는 재능을 마음껏 밖으로 표출하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바로 사람됨의 교육이다. 이는 소유의 교육이 아니라 존재의 교육이다.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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