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호스님 (1)
산은 어느덧 가을이다. 산에 기대어 사는 모든 것들은 산과 함께 여위어 간다. 그 모습이 쓸쓸하다. 그러나 안타까운 흔적은 없다. 상실의 시간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 상실이 가을 산에서는 아픔이 되지 않는다. 시간의 순리에 대해서 존재의 운명에 대해서 산과 더불어 숲과 나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쓸쓸하지만 담담한 산과 나무의 생애는 그래서 아름답다. 어찌 보면 여름 한 철을 살아도 수승한 수좌의 삶의 빛과 향기를 산과 나무는 그렇게 지니고 있는 것만 같다.
상실이 아픔이 되지 않는 산 아래서 절망과는 다른 버림의 미학을 배운다. 얼마나 깊어야 상실이 절망이 되지 않고 얼마나 맑아야 담연한 그 자리에서 흐려지지 않고 존재 할 수 있는 것인지 정녕 알고만 싶다. 그러나 산은 말이 없다. 어쩌면 산의 그 모습은 말이 끊어진 자리에 존재하는 존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꿈꾼다. 상실과 아픔이 없는 아름다운 존재의 시간을. 그러나 그 시간들은 욕망의 터전에서는 만날 수가 없다. 욕망을 떠날 수 있을 때 그 시간들은 마치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만나게 된다.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는 말처럼 상실도 아픔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을 때 산과 같은 삶의 결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 산은 언제나 그리움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피안을 향한 접지 못할 꿈과 그리운 사람에 대한 추억 모두를 가을 산은 그 담담한 바람의 목소리로 하나씩 하나씩 호명하는 것이다.
가을 산이 추억을 향해 호명하는 소리를 들으면 가을 산의 삶의 결을 지닌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한 때 시간을 같이 하며 가난하지만 추억을 함께 만들어 가던 스님.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도 그저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들으며 어두워진 황톳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천호 스님의 얼굴이 가을 산 아래서는 선명히 떠오른다.
스님과 내가 처음 만난 것도 낙엽이 지는 가을이었다. 깊고도 깊은 오대산 상원사. 그때 그는 10대였다. 참으로 맑았다. 그가 처음 내게 보였던 미소의 투명함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떻게 왔느냐”는 내 질문에 “걸어서 왔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효봉 스님 흉내 내고 있잖아”하며. 하지만 나의 웃음에는 어떤 적의나 얕잡아봄이 들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맑고 진실해 보였다. 나는 그의 미소 앞에서 오랜 벗의 친근함 같은 것을 느꼈다. 신발도 다 떨어지고 얼굴도 많이 야위어 있었지만 그에게는 야윈 자의 피로보다는 맑은 진실이 따뜻하게 배어 나왔다.
상원사에 오기까지 그의 행로는 걸어서 왔다는 그의 말을 하나도 위배하지 않는 것이었다. 원주에서부터 걷기 시작해서 장평 지나 봉평 지나 진부 땅 상원사에 오기까지 그는 몇 날 며칠을 꼬박 걸었다고 했다. 왜 걸어서 왔느냐는 내 질문에 그냥 걸어서 와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걸어서 왔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가장 먼 길을 직접 걸어서 온 출가자 중 한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는 왜 걸어서 와야 했을까. 오랜 시간을 걸어서 와야 할 만큼 그에게는 지우고 싶은 추억이 많았던 것일까. 그러기에는 그의 세속 생애가 너무나 짧다. 아니면 차를 타고 절 입구까지 온다는 것이 출가의 이미지 하고는 너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겁고 진지한 표정의 흔적은 읽을 수 없었다. 맑고 투명한 그의 표정은 내가 던지는 질문에 답을 내보여 주지는 않았다. 걸어서 오는 그 시간 시간이 좋았다는, 그가 남기는 바람 같은 한마디가 내 궁금증을 향한 대답의 전부였다.
그 날 밤 그는 나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구태여 그의 지나간 생애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그리고 왜 출가하려고 하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먼 길을 걸어서 산문에 이른 사람이라면 출가의 진실 정도는 지니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우리는 문을 열고 먼 산을 울리며 우리 문 앞에 당도한 바람 소리만을 함께 들었다. 바람 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는 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와의 만남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어느 스님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우리 살아가는데 큰 즐거움이라던 말이. 천호 스님과의 만남이 내게는 꼭 그런 것이었다.
■월간 <해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