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을 위한 한량없는 4가지 마음
초기불교의 사회유대 위한 가르침
초기불교시대에 사회적 유대감을 함양하기 위해 강조한 가르침이 4무량심이다. 물론 사회연대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강조하는 가르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기본 핵심 교리에 해당하는 연기론에 입각해 있다. 일체의 모든 존재를 상대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수용하려는 가르침이 연기론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선언이 가능했다. ‘그대 있음에 내가 있어, 나를 불러 손잡게 해’라는 노랫말이 의미를 지니는 것 역시 연기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초기불교시대에 연기론에 입각해 무한한 관계 속에 우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했지만, 그것이 실생활 속에서 묻어나는 종교 행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보다 친절하고 세밀한 주의를 필요로 했다. 여기서 4무량심이 등장한다. 네 가지의 한량없는 마음을 이웃과 나누어 가질 때 아름다운 삶, 향기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다.
4무량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자비희사(慈悲喜捨)를 말하는 것이다. 자무량심, 비무량심, 희무량심, 사무량심이다. 자무량심의 자(慈)는 일반적으로 사랑이라 풀이하는 것이 상례다. 아가페적 사랑을 의미하고 있는데 원어인 마이트리(maitri)는 우정이란 의미에 더욱 가까운 단어이다. 친구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거나 친구를 향한 본능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인도적 개념에서 우정이란 남들에게 이익을 주는데 있으며, 그들의 유쾌한 면을 알아보는 능력에 근거함과 동시에 ‘나쁜 의지와 악을 진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고사는 우정을 ‘모든 것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 그들이 우세하든 열등하든 중간이든 그들이 친구이든 적이든 무관심한 관계이든 그들이 다른 존재라는 구별을 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비(悲)무량심은 다른 사람이나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동물적 차원에서 다른 사람이나 생명은 타도나 정복의 대상이기 때문에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일 동물적 상태에서 연민의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포기 아니면 침울이라는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고통 없는 곳으로 인도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무력함을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자제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연민은 남을 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뿌리 뽑아 버리는 미덕이다. 해서 남의 고통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고 더 이상 그 고통이 증가하지 않길 바라며, 마침내는 그 고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동정이어서는 안 된다.
희(喜)무량심은 다른 사람이나 생명과의 교감 속에서 느끼는 기쁨을 의미한다. 교감적인 기쁨이란 다른 사람의 번영을 바라보고 박수치며 즐거워하고, 그들의 행복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다. 인간들은 타인의 행복에 대해 시기 질투하는 감정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인정하기 쉽지는 않지만 시기와 질투는 다른 사람들의 발전과 행복을 반대하고자 하는 심리적 병폐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크게 보면 정신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행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행복의 척도는 물질적인 풍요나 소유의 다소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측면에선 명상이나 특정한 이념, 가치의 추구로 표현된다. 그러나 명상이나 특정한 가치의 추구 등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捨)무량심은 공평함을 의미한다. 이 말은 산스크리트의 우파크샤(upaksha)를 번역한 말인데 ‘멀리 바라본다’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공평함은 두 가지의 지적인 성과물로 본다. 첫째는 모든 존재들이 본질적으로 평등함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같은 전형구의 형태로 요약될 수 있다. ‘존재들을 행복하게 하소서!’, ‘존재들은 얼마나 불행한가!’, ‘이들 존재들과 함께 기쁨을!’, ‘존재들을 차별하지 말고, 다만 공평함의 대상으로 생각하라.’ 두 번째는 사람들의 업이 각 개인의 행·불행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결국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이 초래한 것일 뿐이다. 자신 만이 자신의 운명을 변경시킬 수 있다. 모든 업의 작용에 대한 통찰은 ‘무엇이든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일을 영위해야만 하며, 아무도 그에게서 이러한 책임을 피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하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