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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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체의 근본이 한마음 속에 있어
자기를 채찍질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사회자: 미처 스님께는 말씀 못 올렸는데, 서울 시내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불자 선생님들이 법문을 듣고자 이렇게 참여했습니다.
▲스님: 우리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뜻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 마음이 즉 불(佛)이다’ 하는 말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내가 부처라고 하면서 그대로 부처 노릇을 하는 걸까요? ‘마음이 즉 불이다’라고 하는 그 가운데, 삼학의 진의도 들어 있고, 두두물물이라고 하는 그 뜻도 거기 들어 있으며, 일체 생활하는 법이 거기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악과 선도 거기에 다 들어 있고 말입니다.
마음, 마음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부처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하는 그 두 가지, 즉 둘이 아닌 그 도리가 얼마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생명들의 그 의식들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색깔도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에 광대무변하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이 그 뜻을 잘 아신다면 생활해 나가는데 자유스럽게 살 수 있습니다. 몸은 집일 수도 있지만 자기의 시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듣는 것과 보는 데 따라서 작용을 하기 때문에 각자 여러분의 진실한 그 참마음은 어디 가고 그저 나오는 대로 움직이죠.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화를 내고 누가 조금만 언짢은 말을 해도 화를 벌컥 내는 그 마음, 그 화내는 마음은 뭐며 ‘내가 이러면 안되지’ 하는 마음은 또 뭡니까. 우리가 실질적으로 알아본다면, 마음이 부처라고 해서 나도 부처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아만심을 가진다면 ‘나’라는 욕심이 들어가서 더 공부를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몸속에 있는 그 중생들이 누구로 인해서 모두가 뭉쳐 있습니까. “자기 마음을 닦아라.” 하면 “닦을 게 뭐 있어서 닦느냐?” 이렇게 말씀하시겠지만 모두 청산유수로 그렇게 말들을 하면서도 진짜 행을 하려면 어렵습니다. 다스리면서 점차적으로 가다보면 ‘허허, 이게 닦을 것도 없고 다스릴 놈도 없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다스리는 놈, 또 다스림을 받는 놈, 그놈들이 따로 없죠.
생각해 보십시오. 몸속에 헤아릴 수 없이 악업 선업이 일어납니다. 그걸 한번 되돌아본다면 과거에 여러분이 지은 바 그대로 입력이 돼서 하나도 남김 없이 낱낱이 나오는데, 그 나오는 대로 여러분은 속아요. 바깥으로 끄달려 물질세계에서 속고, 보고 듣는 대로 속아서 끄달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대로 속아서 끄달리고, 그리고 그냥 마음이면 마음이지 왜 한마음이라고 그랬느냐면, 우리 몸을 봐도 한마음이요, 바깥에 모두를 봐도 한마음입니다. 항상 얘기하듯이 우리가 이 세상에 날 때 뼈와 살을 빌려서 몸 하나를 받았지만 과거에 살던 그 인연 인과로 인해서 악업도 뭉치고 선업도 뭉쳐서 이렇게 나온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이 얼마나 요상한지 모릅니다. 참 묘하기도 하고, 어떤 때 보면 조잡하기도 하며, 어떤 때 보면 땅에 붙어 사는 진딧물과 같기도 해요. 우린 한 그릇에 붙어서 진딧물처럼 사는 하찮은 벌레와 같은 그런 기분도 들어요. 나무에 진딧물이 그냥 졸졸이 붙어 있듯이 말입니다. 예전 얘깁니다마는, 어떤 때 그걸 보면서 ‘아하, 우리 인간도 한 나무에 붙어서 저렇게 진딧물처럼 빨아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우리가 넓고 앞뒤가 막히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서 오로지 이 세상의 물질이 다 공했다는 그 뜻을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과거에 살던 그 인과가, 예를 들어서 남을 이익하게 해서 선업을 받은 것도 있고 남을 악하게 해서 악업을 받은 것도 있는데, 그건 단순히 참회를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글자를 보고 꿰뚫어서 되는 것도 아니며, 경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못났든지 잘났든지 남녀를 막론하고 내 스스로가 나를 다스리면서 그릇을 비워야 홀연히 맑게 나를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수없이 오고 가면서 공부들을 하셨는데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내가 질문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질문을 해야 할까요? 오늘은 서로 질문을 주고받는 한마당입니다. 어저께도 얘기했지만 꽃 한 송이를 든 것이 한마음의 뜻이고, 다자탑에 반좌를 내준 것이 한자리의 뜻이며, 진드기 발 하나도 빼놓지 않는 것이 한발의 뜻이라는 겁니다. 평발! 진드기 발도 발은 발입니다. 그게 평발입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은 발. 나무 한 그루가 이 땅에 섰어도 그것도 바로 빼놓지 않음입니다. 평발이라는 것은 부처님 발이 뭉툭하게, 그냥 반듯하게 돼서가 아니라 수많은 분들의 발이 한발로 이 자리를 같이 디뎠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만이 위대하고 자기 자리만이 자기 자리인 양, 자기만이 우뚝선 것인 양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또 진리가 그러하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몸이 있어서 움죽거릴 때에, 실오락지 하나 걸치지 않고 비워진 그 마음이라야 실오락지 하나 버리지 않는 뜻이 나옵니다.
이제 앞으로는 여러분이 질문도 하고 그러십시오. 물론 부처님께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차원에 따라서 대기 설법을 하셨지마는 우리도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동문서답처럼 여러분한테 던지기도 합니다.
옛날 얘기 하나 할까요? 제가 한 10여 년 넘게 산으로 다닐 때인데 어느 날 하도 지쳐서 쓰러지게 생겼습니다. 그믐이어서 캄캄한 밤이었는데 자성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날까지 10년 동안을 다니면서 얼마나 봤느냐?” 그러신단 말입니다. 만약에 여러분한테 그렇게 물었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왜 대답이 없습니까? 얼마나 봤느냐고 물었다는데요.
▲신도1: 본 것이 없습니다.
▲스님: 무질서하게 그렇게 나가는 게 아니에요. 처음엔 어리벙벙했죠. 나를 발견해서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어리벙벙했으니까요. 내가 어린애처럼 탄생이 됐다고 해서 다 자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벙벙하게 가만히 앉았다가 “10년 동안이나 봤어도 하루 본 것만도 못하고 한 찰나 본 것만도 못합니다. 육의 눈으로 아무리 봤던들 무엇을 봤다고 말하리까.”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깜깜한 데를 일어서서 가는데 또 “너는 깜깜한 데 다닐 때 보이더냐, 안 보이더냐?” 하고 물으신단 말입니다. 이 소리는 참고적으로 하는 얘깁니다. 여러분이 정말 방망이가 들어갈 때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받아칠 겁니까, 맞을 겁니까?
그러니 이 마음도리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여러분이 커져서 스스로 방망이를 들어야 나도 방망이를 들죠. 여러분이 방망이가 없으면 나도 방망이가 없어요. 낮에 본 건 얼마나 됐냐고 했는데 또 밤에 본 건 얼마나 봤느냐는 얘깁니다. 여러분에게 만약에 ‘낮에 본 것은 얼마나 되며 밤에 본 것은 얼마나 되느냐?’고 하신다면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여지껏 공부했으면서 뭐라고 대답도 못해요.
▲신도2: 순간순간 돌아가는 마음 아닙니까?
▲스님: 그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신도3: 밤낮이 둘이 아니다.
▲스님: 밤에 본 건 얼마나 보고 낮에 본 건 얼마나 봤느냐는데 무슨 엉뚱하게…. 아니, 사발에 담을 걸 조그만 종지에다 담고 접시에다 담고 있으니 그거 될 말인가요? 물은 어엿하게 컵에다 담아야 하고 밥 먹을 땐 숭늉을 대접에다 담아야죠. 밥은 주발에다 담든지 공기에다 담든지 그러구요. 요샌 또 접시에다 다 잘 먹습디다. 그러니까 접시에다 먹든지 주발에다 먹든지 그런 것은 흠잡지 않을 테니까 대답을 좀 해보라구요. 대답할 수 있는 대로 해봐요.
▲신도4: 스님 질문에 답변하게 되어 참 반갑습니다. 제가 요즘에 마음공부를 하면서 느낀 바를 스님 질문에 맞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가만히 제 마음을 보면 낮에도 수없이 봅니다. 그리고 역시 꿈에도 보고 제가 느낄 때는 봤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꿈에도 제가 제 몸을 중심으로 나라고 생각했을 때 나하고 상관없이 수없이 봅니다. 우선은 그렇게….
▲스님: 그건 부처님의 가르친 그 뜻에 의해서 진리의 도를 모르는 소립니다.
▲신도5: 주야장창 다 봐도 눈 깜짝할 새 없다.
▲스님: 뼈와 살이 다 합쳐져야 될 텐데 가죽밖에 모르면 어떡합니까? 그 대답은 아직 모르는 단계에요.
▲신도6: 마음으로 자기가 베풀 줄 알아야지 베풀 줄 모르면 뭐든지 불평이고 생활에서 부딪쳐 봐야 알고, 저는 말 못하는 짐승하고 부딪쳐 봤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인데도 내가 사납게 하면 짐승도 사납게 하더군요. 내 마음을 그 짐승한테 줘봤더니 그 짐승도 가만히 있습디다. 한번은 소가 별안간에 막 뛰고 그러더라구요. 소가 뛰면 소도 다치고 저도 다치기 때문에 내 마음을 줘가면서 달래고 있는데 그 순간 내가 넘어졌습니다. 소에게 마구 짓밟히는데 그때 내 마음을 주지 않으면 소도 죽고 저도 죽게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너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서 흙구덩이에 쓰러져 순간 마음을 냈더니 소도 가만히 있는 겁니다. 이렇게 소에게 짓밟혀 멍이 들었지만 소한테 치여서 논에 쓰러져 부딪혀 봤더니 소도 그제서야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법이란 것이 참 쉽고도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줄줄 모르면 말 못하는 짐승도 나한테 피해를 주더라구요.
▲스님: 마음공부의 수행을 잘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신도7: 스님의 그 말씀은, 밤에 본 것이 얼마나 있으며 낮에 본 것은 얼마나 되느냐 이런 말씀인데 밤에 봤다는 것은 수천 수만의 별들을 보았어도 그 본 것이 없고 또 낮에 많이 보았다 해도 그 나름대로 지워나갔기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스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지금 말했는데 마음이 있으면 좀 내놔 보세요.
▲신도7: 마음도 그 마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에 마음뿐입니다.
▲스님: 잘 다듬어요. 그 뜻은 아주 갸륵한데, 다듬어야겠어요. 알았죠? 무 배추를 갖다 놓고 양념해서 김치를 맛있게 담가서 먹게끔 하란 말입니다.
아까 처사님이 소와 함께 실천해 가고 있다고 했는데, 옛날에 어느 절에서 있었던 얘깁니다. 내가 20대의 얘긴데 스님네들이 단식해 가면서 참선을 했습니다. 그렇게 단식을 하면서 정진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스님이 일어나더니만 “사람의 코는 내리뚫렸는데 왜 소의 코는 치켜뚫렸는가?”라고 하는 겁니다. 소는 치켜뚫려 있기에 빗물이 전부 들어가서 코가 막혔다 이겁니다. 그 중간을 내가 빼놨으니까 얘긴데, 그때 다른 스님들이 공부를 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껄껄대고 웃으니까 그 위에 있는 절로 막 뛰어 올라가서 스님들한테 얘기해 가지고는 법상을 턱 차려놨습니다. 그래 앉혀 놓으니까 그 얘기를 또 하는 겁니다. 사람의 코는 내리뚫려서 비가 안 들어가고 먼지도 안 들어가서 막히질 않는데 소 콧구멍은 막혔으니 그것은 무슨 연고인 줄 아느냐고 악을 벽력같이 쓰더라 이 소립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죠? 여러분이 모르면 나도 모르죠 뭐. 그렇게 설법을 했는데 알아야죠.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요. 어쩌면 그러십니까? 물론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자기가 발현되지 않고는 대답을 못해요. 이런 말을 해도 척척이고 저런 말을 해도 척척 갖다 붙이는 대로인대 그걸 모른단 말입니까!
▲신도8: 보았다고 하는 그 말에 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데에 있기 때문에 봤다고 말을 하면 본 것이 아니기에 그냥 그렇게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밤은 빛이 없기 때문에 밤이지 낮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서 봤다 안 봤다 하는 그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에 집착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 지금 이러한 질문과 답변을 하는 것은 말씨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스스로 알아야 해요. 대신 내가 밥 먹어 줄 수는 없으니까 열심히 해야 될 거예요, 아마. ‘당신만이 알 수 있고,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고, 내가 모든 것을 보고 안 보고는 네가 알아서 다 증명할 수 있다.’ 하고 믿으세요. 내가 왜 이렇게 여러분한테 채찍질을 하느냐 하면, 우리 한생각이 이 세계를 좌우할 수 있는 도리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셨기에 그 진리의 진의를 알아야 되기 때문이에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대낮에 아무리 봐도 다 보지 못해요. 다 보기는커녕 오히려 산란심만 일으키죠. 그런데 지금 공부하는 것은 마음의 눈과 마음의 귀로 듣고 보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듣고 보는 것만이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가 제일이다 해도 한데 모아서 한생각이 두뇌로 올라가면 두뇌에서 결정을 짓는 데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팔이 이렇다, 다리가 이렇다, 눈이 이렇다, 귀가 이렇다, 이런 말 할 것 없는 대답이라야 된다 이 소립니다.
예전에도 얘기했듯이, 그렇게 밤이나 낮이나 다니다 보니까 밤도 밤이 아니고 낮도 낮이 아니더라구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니다라는 뜻은 전부 공해버렸는데 밤이 아니다 낮이다, 낮이 아니다 밤이다 할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아까부터 얘기한 게 다 가버리고 없듯이 한 사이가 없고, 우리가 지금 살아도 사는 사이가 없고, 가도 가는 사이가 없고, 와도 오는 사이가 없고, 봐도 본 사이가 없고,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다 이 소리입니다.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을 들었을 때 내가 들었다고 할 수 없잖아요, 모두가 공했기 때문에.
나라도 손바닥만 한데 반동강이로 잘렸을 뿐 아니라 전자에 일본 사람들한테 그렇게 시달리고, 중국 사람들한테 시달렸으며, 사글세방에 세들어 가지고는 시달림을 받고 이렇게 살아왔는데 너무 비참하지 않았습니까! 나 어려서만 해도 너무 비참해서 신발도 못 신고 반쪽이 다 달아나간 걸 앞에만 걸쳐 신고 다닌 적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때 뭘 먹고 어떻게 살았든 지금은 좋은 것을 먹고 풍족하게 잘 살아서인지 귀한 줄을 모르죠. 그래서 조금 이상하다 하면 다 내다버리고 그럽니다. 너무 흔하니까요.
흐르는 물소리 들어보고, 흐르는 물을 보셨죠? 또는 물이 얼기도 하고, 파도가 치기도 하며 잔잔하기도 하죠. 온통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리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죠, 사계절을 다 볼 때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 아주 숙연하게 잔잔해집니다. 반면 파도치는 걸 보면 아주 산란해집니다. 그러니 이것도 스승이요, 저것도 스승이죠. 가을에 낙엽이 져서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면 구슬퍼지고 날이 추워도 아주 구슬퍼지죠. 이렇게 간사해요. 그래도 그런 마음의 변화가 간사한 게 아니라 철칙이란 말입니다. 저 나무들이 볼 때는 모두가 나같이 살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같이 살란다고 해서 내가 그냥 다 좇아가다 보면 안 되죠. 그래서 그게 좋으면 그것대로 또 같이 살면서 넘어가고 넘어갑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올 때도 이것 보고 저것 보고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실은 본 게 없습니다. 왜 본 게 없느냐? 그 눈 가지고는 금방 보고 금방 넘어가고 금방 보고 금방 넘어갔기 때문에 담아두질 않았어요. 담아진 게 없어요. 그래서 심안으로 봐야만 전체를 보겠죠. 그런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걸 보기는 하나 듣지 못하면 또 안 되죠? 만약에 귀머거리가 보기만 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텔레비젼이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화면에 그림만 나오고 말이 안 나오는 그런 격인데 그럼 무슨 재미입니까. 그렇죠? 그리고 들리긴 하나 보이질 않으면 이 또한 안 되죠.
그래서 천안통 천이통 이렇게 말한 거죠.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내가 남의 마음을 모른다면 어떻게 접근을 합니까, 네? 그런데 사람과 사람끼리만이 아닙니다. 전체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마음을 소에게 주면 소가 내 마음과 똑같이 되는 거죠. 소 마음을 내 마음 속에다 넣으면 내 마음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모른다면 어떻게 하나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상대의 차원이 개구리 마음이라면 내가 개구리가 돼줘야 한마음이 되지 않습니까? 돼지라 하면 내가 돼지의 마음 그릇하고 똑같이 되어야만 돼지하고 한마음이 될 거라 이겁니다. 내가 물 같은 마음을 가져야 물과 한마음이 되듯이, 그와 같은 겁니다.
그냥 말로만 한마음이 아니라, 사람뿐만 아닌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태양하고도 그렇고 금성이나 수성, 달, 모두가 그렇죠. 우리 인간들도 다 그렇고 무정물 식물 할 것 없이 일체 생물이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왜 ‘심즉시불’ 이라고 하셨느냐면, 그렇기 때문이에요. 내가 알아야 한마음이 돼서 그 그릇에 딱 맞추죠.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를 넣어도 그릇이 모자라지도 크지도 않더라. 삼천대천세계를 씨앗 하나에 넣어도 맞고 큰 그릇에 다 넣어도 맞고, 그러니까 꺼내도 줄지도 않는 것이요, 그릇이 비지도 않는 것이요, 또 아무리 넣어도 그릇이 모자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두드러지지도 않는다 이 소리입니다.
내가 소의 차원하고 똑같아야만이 한마음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걸 만나면 이 그릇에 맞춰서 하나가 되고, 저걸 만나면 저 그릇에 맞춰서 하나가 되고 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데, 보이는 것만 그러냐면 보이지 않는 중생 마음도 똑같이 그렇습니다. 지옥에 아귀 축생도 그 그릇대로 맞추어 하나가 되어서 부처님 마음이 그 중생 마음속에 드시니 마음이 그냥 밝아지더라 이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주 차디찬 물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까 그대로 따뜻해지는 것과 같은 거죠. 그러는 반면 저항력을 느낄 테니까 찬물에다 찬물을 부어서 뜨뜻하게 하는 겁니다. 뜨겁게 할 수도 없고 차게 할 수도 없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뜨겁게 할 수도 있고, 차게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고, 많게 할 수도 있어서 마음대로 차원에 알맞게 들고 나니 어느 것 하나도 부처님이 아니 되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마음을 알려면 과거를 알아야 하는데 숙명통은 과거에 어떻게 지내왔는가, 어디서 왔는가, 뭘 어떻게 저질렀는가를 한순간에 알아내는 거죠. 두고두고 심판을 해서 알아내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팩시라고 표현을 했지만, 어떻게 부처님의 그 뜻, 가고 옴이 없이 그렇게 광대무변하게 펼칠 수가 있느냐 하는 그것도 되고, 어느 것 하나 건져주지 않은 것이 없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싹 외면하고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어서 마음으로 딱 가려버리는 것이죠. 여러분이 전부 부처님이 아닌 분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개구리도 바로 자기인 까닭에 다 건져줬어도 건져주었다 할 것이 없느니라 하는 뜻을 잘 새겨야 합니다. 그러니까 둘이 아닌 까닭에 받았다 할 것도 없느니라 한 것이죠. 누가 죽는 걸 보면 슬퍼서 또 울어지듯이, 그렇게 몸속의 의식들이 다 그렇게 작용을 해요. 어떤 때는 잘못하게 하고 원망하게 하는 등 그냥 매사 그렇게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니 온통 그것을 다스리면서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는다면 점점 녹아버리는 것이죠. 맡겨 놓는 자리는 숙명통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나오는 대로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다 되놓는다면 그게 다 무너지면서 홀연히 밝아진다 이겁니다.
생각을 가만히 해 보세요.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묘한지, 금요일까지 일을 하다가 토요일이 되고 일요일이 되면, ‘아, 일요일이 됐으니까 좀 늦게 자도 괜찮다.’ 하는 생각이 나면서 그냥 푹 자버려요. 이렇게 용도에 따라서 또 환경에 따라서 내 마음 먹는 대로 모든 게 활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바깥에서 보고 듣는 걸로 속지 말고, 안에서 그 놈들이 나와서 화내게 하고 또 가게 하고 오게 하는 그것에도 속지 말라는 것이죠. 술을 늦도록 마시고 고주망태가 돼서 집에 들어가면 식구들이 안 좋아할 테죠. 또 여자들도 남편과 애들 밥도 안 해주고 저녁 늦도록 있다가 들어가면 식구들이 좋아하겠습니까? 양쪽이 다 좋지 않을 거라구요. 그러니 그건 악업이지 선업이 못돼요. 남의 마음을 그렇게 언짢고 괴롭게 만들어 주고 그게 선해지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점에서 자기를 채찍질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 마음 하나 다스리면 그냥 저절로 선지식이요, 그대로 훤히 밝아질 것이요, 그대로 중용을 하고 죽은 세상 산 세상을 한데 합쳐서 요리를 하니까 이 속에 들은 의식들도 전부 한마음으로 따라주게 됩니다. 바깥에 있는 마음도 다 자동적으로 조절이 돼서 한마음으로 지배인의 말을 듣게 되니까 그것이 바로 주장자 아닌 주장자인 것입니다. 잘못하면 때려서라도 고치는 그런 일이 있죠. 꼭 때려서 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한번 사람한테 맞은 건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어도 보이지 않는 데서 부처님이 가르치시고, 여러분이 그 업보에서 다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한 방망이 때리면 아주 고통스럽겠지요. 물질을 가진 것은 다 고통스러울 거라고요. 우리가 물질에서 벗어나고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한마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얕잡아 보지 마세요. 하나하나가 전부 나 아님이 없고 내 가르침 아님이 없고 내 스승 아님이 없어요. 그래서 나쁜 건 나쁜 것대로 하지 말고,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하고, 내가 조금 밑지더라도 남을 이익하게 하면서 폭넓게 마음을 쓴다면 그대로 부처가 될 거 아니겠소. 이판사판이란 말이 있듯이 어차피 죽을 거라면 아예 살아서 죽으라고요. 살아서 죽지 않으면 열반이라는 이름 그 자체도 없어요. 열반이라는 것도 이름이거든요. 부처라는 것도 이름이니까요. 그 이름 아닌 그 속의 이름…. 그런데 더군다나 부처라는 소리, 보살이라는 소리 듣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질문자1: 어리석은 질문이 될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알고 싶은 욕심에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현대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물질을 쪼개보는 기술도 자꾸 높아져 가서 이제는 더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쪼개고 쪼개다 보니까 질량이 거의 없고 수명이 지극히 짧은 입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인간은 유의 세계의 궁극에 이르러 무의 세계를 넘어가는 문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요.
▲스님: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한마음 공부를 이렇게 하는데, 부처님만 가르치신 게 아니라 단군 할아버지도 그 법을 가르쳤고 사대 성인들도 다 가르쳤어요. 지금 내가 말하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거와 같은 교차로에 죽음과 삶이 있듯이, 우리 지금 세상이 물질세계로서의 과학으로 발전이 돼 가지고 문화 문명이 아주 고도로 발전이 됐지만 지금은 거꾸로 다시 돌아와서 정신세계의 교차로를 넘어서야 된다 이겁니다.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데 그 교차로를 넘어서듯, 들이고 내는 한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마음에서 물질세계로 지금 팽창되느냐 정신세계로 지금 진화돼서 우리가 발전을 하느냐 하는 문제죠. 그렇게 된다면 정말이지 우리가 한마당 한식구가 되죠. 세계 평화가 온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한 것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여기 여러분이 앉아 계신데 뭐 걱정입니까. 여러분은 마음을 내고도 못 믿죠? 의심하지 말고 지켜보세요. 지금 물어보듯이 내가 이 공부를 하면 진짜 그렇게 될까 안 될까 이런다면 되겠소? 내가 목말라 죽겠는데 물을 들고 이 물을 먹어야 할까 먹지 말아야 할까 이런다면 목마른 게 다 없어져요? 물을 먹을 수 있겠소? 그러니까 목마를 땐 무조건 먹는 것이 장땡이에요. 그리고 물을 먹기 싫을 때는 안 먹고 놓는 게 또 장땡이죠. 알지도 못하면서 생각내지 말고 모든 걸 맡겨서 아무 생각이 없을 때에 한생각을 내라 이겁니다. 그 무슨 소리냐 하면, 모든 것은 망상이 아니라 그것은 순리적으로 공해서 돌아가는 거요, 순리적으로 우리가 지금 돌아가는 거 아니겠소. 생각하고 또 딴 생각 하고 또 생각하고 꼬리가 꼬리를 물고 자꾸 돌아가는데 그게 망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니까 ‘내 몸 나온 거 들어간 거, 사는 거, 보고 듣는 거, 몽땅 그놈이 하는 거다.’고 맡겨요! 그놈이 하는 거지 딴 놈이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놈, 자기 주인공한테다 모든 것을 맡기세요. 주인공 죽는 법은 없어요. 맡겨 놓고 그놈이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이 방황할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금방 죽는대도 방황할 게 없어요. 그게 바로 힘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됨으로써, 야! 조금 늘려 놓으려면 늘려 놓고 줄이려면 줄이지, 뭐 걱정이냐 이거예요.
지금 시쳇말로 정신세계 한마당 한자리 만봉에 연꽃이 피어서 이 세상을 두루 할 수 있는 그런 멋진 도리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한마당이 있는데 왜 그걸 맘대로 못합니까. 안 그런가요? 올려놓는 것도 법, 내려놓는 것도 법인데 자유스럽게 삽시다. 자유스럽게 사는 방법을 배우려면 마음공부밖에 없어요.
▲질문자2: 저는 여느 때는 말을 잘 하다가도 스님만 뵈면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먼저 나와서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스님: 우리는 지금 말 없이 말을 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배우는 거고 보지 않고 보는 능력을 배우는 거며, 듣지 않고 듣는 방법을 배우는 거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방법을 배우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결정적인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배우는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말을 너무 남용하지 말고 말을 함이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도리를 모르고 ‘내가 이런 말을 했지.’라는 그 마음이 들어간다면 그것이 바로 남용하는 것이 되고 미해지는 것이 될 수 있어요. 말이 안 나오는 것은 아직 배추 무우만 사다놨지 양념을 해서 맛있게 버무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무우 배추에 양념을 사다 놓고 그것을 요리하는 방법을 지금 수련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나를 깨달아 가지고도 무의 세계에서의 둘이 아닌 방법을 알기 위해서 또 놓고 공부한 거예요. 육조 스님도 그렇고, 다. 또 놓고 공부해 가지고 자꾸자꾸 보임(保任)을 해서 들어가죠. 그렇게 해 가지고 나중에는 부처님처럼 ‘야, 요만한 것에는 나도 요만하게 응해서 한마음이 되어 주고, 또 조만하면 조만한 대로 한마음이 되어 응해 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바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내가 돼 줄 수 있고, 크나 작으나 다 내가 돼 줄 수 있고 한마음이 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옛날에 어떤 큰스님이 말씀하셨듯이 “3년을 눈 뜨고 푹 쉬면 된다. 그러면 둘이 아닌, 차차 열반경지로 그냥 곧장 들어가는 길이 나오느니라.” 그러셨듯이 말이에요.
여러분이 질문하고 싶은 거 있으면 생각나는 것을 그대로 묻기를 바라지, 뭘 맞춰서 이 대답을 하면 맞을까 안 맞을까 하고 생각해서 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안 틀리는 것도 법, 틀리는 것도 법인데 틀리면 어떻고 안 틀리면 어때요. 이 세상에 쓸모없는 게 어딨어요? 산에 올라가 봐요. 벌레먹은 고목도 있어야 조화를 이룬다고요. 그게 바로 부처님 법이라니까요. 잘하려고 하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벌써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도 선생님들이 앉아 계시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아나가기 위해서, 또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더욱더 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야죠. 어린애면서 장래의 어른인 그 애들을 잘 가르쳐서, “우리가 지금 물질과학이 고도로 발전이 돼서, 아주 이제는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앞으로 어떡하느냐?" 이런 소리가 안 나오도록 됐으면 좋겠어요. 지금 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마음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뜻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냥 보고 듣고 하는 걸로만 모두 가르치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많지요.
그것뿐인가요? 그럴 수 있다면 여러분이 이따 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죽는 게 아니고 지속되는 거죠. 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전자에 역대 조사들이 그렇게 다녀가셨는데 왜 지속되지 않겠느냐? 별도 겉껍데기만 싹 벗고선 그대로 또 밝아지듯이, 인간도 겉껍데기 벗겨지는 거는 진리를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거든요. 괜히 옷 벗는 게 아니에요! 새 옷 나오라고 그러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도 이 지구라는 집 한 덩어리 놓고는 진딧물처럼 붙어서 지금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집을 우리가 헐어버린다, 부서진다, 망친다, 그리고 팽창되면 되는대로 나빠지고, 또 타버리면 타 버리는 대로 나빠지고 이래선 안 되겠죠? 우리의 마음이 태양보다 더 크고 밝고 영원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공부를 하면 위로는 묵은 빚을 갚으면서 아래로는 햇빛을 주면서 빛이 되게끔, 그 뿌리가 썩지 않고 영원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변함도 없어요. 금이라는 게 변함이 있나요? 금은 금이듯이 그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태양의 근본이 바로 인간 마음의 근본이기 때문에 마음의 근본은 땅속 깊이도 한정이 없고 물속 깊이도 한정이 없어요. 그래서 한 자 한 치도 안 틀리고, 그렇게 한정이 없기 때문에 고기들도 다 살고 있지 않아요? 태양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쥐구멍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또 아무리 태양이 좋다 하더라도 물 밑에 들어가서 그 생명들을 다 살릴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자가발전소가 있죠. 그래서 바다의 묘미는 바로 자가발전소가 있다는 겁니다.
돌아돌아 수없이 비가 내리고 우리는 그것을 또 먹고, 그것이 눈물로도 나가고 콧물로도 나가고 땀으로도 나가서 증발이 되어 또 올라가고, 올라가면 내려오고 내려오면 올라가, 올라간다 내려온다 할 것도 없죠. 그러니 그 또한 한마음 속의 작용이다 이겁니다. 모든 일체 근본이 바로 이 한마음 속에 있으니 한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200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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