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공감못하기에 삶의 문제들 발생
아상 내려놓아야 무조건적 수용 가능
현상의 모든 것은 관계로 말미암아 다만 그러한 작용이 펼쳐질 뿐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러한 관계로는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세상 등으로서 그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기에 무엇보다도 참된 이 세상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아 원래의 한 마음자리로 돌아가도록 우리는 소위 마음공부라는 것을 하고 있다.
불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심우도(尋牛圖)의 마지막 그림도 이를 잘 나타내고 있는데, 결코 마음공부란 우리의 일상의 삶을 떠나 어디 먼 하늘나라에 가서 펼치는 신통방통한 것도 아니며 깊은 산 속에서만 펼칠 수 있는 그런 힘없는 공허한 공부도 아니다.
우리의 공부가 이러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과연 나는 타인을 어디까지 공감, 수용하며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가이다. 대부분 우리들은 공감할 수 있는 상대방을 수용하게 된다. 자신의 관점이나 기준으로 보아 공감할 수 있을 때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 부모 자식 간의, 부부 간의, 직장 내의 많은 갈등과 문제는 서로 공감되지 못하기에 서로를 수용하지 못하고 화합하거나 타협하지 못하며 서로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제대로 된 마음공부를 통하여 자기의 기준이나 관점으로 표현되는 아상(我相)을 내려놓아 부처님 말씀에 따라 여법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 것인가. 그것은 나의 기준이나 관점이 선행되어 이루어지는 공감을 통한 수용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다.
즉, 내가 이해하여 공감할 수 있어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준인 선악(善惡)마저 뛰어 넘는 무조건적인 수용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이 가능한 것은 사랑과 자비를 통한 평등심으로서만 가능한 것으로, 마음공부 하는 이들은 진정 아상을 내려놓고 진정한 진리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되었을 때 가능하게 된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수용하면서 돌을 던질 수 있는 자는 던져보라고 한 이야기나 부처님께서 살인자를 수용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많은 이야기도 그러한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나 오직 간택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잘 들여다보면 이러한 무조건적인 수용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무조건적인 수용을 무조건적인 공감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도 스스로 수용하며 감싸준 간음한 여인에게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며, 부처님도 살인자를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곧 살인에 대하여 공감한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듯 공부가 무르익으면 세상인들은 이해하지 못할지언정 상대방을 가려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부터 평등심으로 받아들이게 되니 스스로의 공부를 돌아볼 때 점검하는 부분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