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행은 무상하고 이는 생멸의 법이니라. 생명이 멸하여 다하니 적멸을 즐기노라.”
쿠시나가르에서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면서 마지막 독백같이 한 말이다. 번거로움을 떠난 열반의 경지인 적멸(寂滅), 그것을 상징한 것이 바로 탑이다.
석가모니의 유해는 화장을 하였는데, 인근 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서로 가져가겠다고 분쟁을 일으켰다. 결국 석가모니의 제자 드로나가 이를 중재하여 사리를 여덟 쪽으로 분배하였다. 그리고 나서 드로나는 사리가 들어 있는 병을 가져가고, 뒤늦게 당도한 나라에서는 남은 재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하여 8개의 사리, 병, 재를 모신 무덤 10기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무덤을 스투파라 한다. 이로부터 100여 년 뒤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왕(재위기간 기원전 268경~232경)은 8개의 사리탑을 열어 이를 다시 8만4천 기의 사리로 나누어 스투파를 봉안하였다. 이를 계기로 스투파 신앙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초기의 예배대상은 열반의 경지를 상징하는 탑이었다.
이 스투파신앙은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 한국, 일본에 전파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범어는 스투파이고 파리어로는 투파이고, 한자어로 탑파(塔婆)로 번역되면서 탑파를 간단히 탑이라고 지칭되었다. 또한 불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을 즐긴다는 석가모니의 말에서 따와 적멸보궁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탑이라 하면 원래 8만4천 기의 불사리를 모신 무덤을 가리킨다. 그러나 절마다 세워지는 탑에 불사리를 모두 모실 수 없기 때문에 유사한 사리나 불경 등을 대신 봉안하고 이들도 포함하여 모두 탑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사리는 549년(진흥왕 10년) 양나라에서 보내온 불사리이다. 사신을 통해 불사리를 보내오자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에서 맞이하였다. 그렇다면 흥륜사에 불사리를 처음으로 봉안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645년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사리가 우리가 주목할 만한 역사이다.
자장법사가 중국 태화지 못가의 돌로 만든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7일째 되는 날 문득 꿈에서 부처님이 네 구절의 시를 주었다. 깨어보니 그 시 구절이 모두 범어로 되어 있어 그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 문수보살이 스님의 모습으로 나타나 범어로 된 시의 뜻을 풀어주고 붉은 깁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님의 바리때 하나,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주면서 잘 간직하고 있다가 신라로 가져가라고 부타했다. 자장법사는 643년(선덕여왕 12년) 부처의 물건들을 신라로 가져와 그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경주의 황룡사, 울산의 태화사, 양산의 통도사에 모셨다.
2000년 6월 통도사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황룡사의 진신사리 2과를 140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하였다. 하나는 4mm, 다른 하나는 2.8mm의 크기로 구슬과 같이 투명하였다. 8만4천기의 불사리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높다. 가끔 인도나 스리랑카에서 불사리를 모셔와 탑을 세운다는 소식이 크게 화제가 되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된 적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드러난 예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