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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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넓다면 이 우주를 단번에 삼키고도 남음이 있어
자기가 했다는 생각이 없는 보시여야 남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입니다


남겨진 자식들 걱정돼요

스님, 저는 아이들이 셋이나 있고 막내 아이는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병원에서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하네요. 제가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남겨진 아이들을 생각할 때 차마 눈이 감겨지지 않습니다. 스님, 어떻게 마음을 내야 아이들이 엄마 없는 자식이라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늙었든지 젊었든지 지금 이 모습으로 살다가 다시 요 모습을 똑같이 가져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모습으로 해 가지고 나오기 이전에 우린 이 모습을 가지고 지금 살면서 이렇게 돌아가면서 공부가 되는 거지, 죽으면 벌써 이 몸뚱이가 없어서 부딪칠 게 없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이 없습니다.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그 그릇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거죠. 고 차원에서 말입니다. 이 몸을 벗고 죽은 사람들은 한계가 딱 지워져 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은 가고 옴이 없이 가도, 죽었으면 훨훨 날아다닌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요, 그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청와대 못 들어가죠. 또 경우에 맞지 않을 때는 어떠한 남의 모르는 집은 못 들어가죠. 그렇게 우리가 세상를 살아나가는데 철저하게 모든 상식이라든가 계율이 있듯이 그런 그 차원 그릇의 계율이 있기 때문에 한 발짝도 못 나가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때 길을 지나가다 차에 치여 죽은 사람들이 있다면 또 그 자리에서 치여 죽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몸이라도, 집이라도 오면은 들어가려고 하는 거죠. 자유자재 못하니까. 살아서 우리가 자유자재권을 가져야지 죽으면은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자유자재 못한다 이겁니다. 공부도 못한다는 얘깁니다. 다시 이 세상에 탄생을 해서 다시 또 그 길을 걸으면서 공부를 해야 돼요. 그러니 얼마나 시일이 걸립니까? 그러니 살아 있을 때 공부를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7남매를 낳아 놓고서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이게 한 30년 전도 됩니다. 근데 그때에 어느 산골인데 그래도 웬만하게 살았습니다. 초가집이라도 농사를 잘 짓고 살았는데 그 어머니가 7남매를 낳아 놓고 남편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농사짓고 살다 보니까 상당히 쇠약해져 가지고 아주 병이 들어서 다 죽게 됐어요. 이미 아주 죽게 됐어요. 죽기 전에 그 애들을 여기도 다니고 저기도 다니면서 애 없는 집에다가 다 맡겼습니다. 사실이 이러이러하고 이러이러하다고 그 사실 얘기를 다 하고 맡기고 혼자 왔습니다. 혼자 오면서 쪽편지 쓴 거를 하나씩 애들한테 다 줬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은 ‘인생은 이 세상에 나와서 구름이 한데 모였다가 흩어지면 남이니라. 너희들하고 나하고 인연이 돼서 같이 이렇게 모였다가 흩어지는 구름과 같고, 지금 새엄마 새아버지와 너희가 또 한 데 한 가정으로 모였으니 말 잘 듣고 잘 해라. 앞서의 같이 모였던 인연을 명심하라고 해 놓고, 엄마 소리도 안 했습니다. 우리가 만났던 인연이라고만 해 놓고 그걸 한 장씩 다 주고서 정직하게 살라고 해 놓고 그 부인은 죽을 때를 바라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앉아서 그저 기도하기를 ‘내 마음의 부처시여! 당신이 이렇게 해 놓으신 거니까 내가 다시 이 세상에 나와서 몸을 받게 하지 마시고 저런 불쌍한, 나하고 모였던 어린애들을 위해서 돌봐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주소서.’ 인연에 따라서 만났던 그 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부처님의 심부름을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몸이 부서지니 다시금 몸을 받게 하지 마시고 몸을 받게 한다면 한 사람밖에는 볼 수가 없다 이겁니다. 몸을 받게 하지 마시고 될 수 있으면 그저 애들을 위해서 보살펴 주도록 이렇게 일을 자기한테 달라고 마음의 부처님한테 고하고서는 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돌아가셨는데 그 애들이 다른 집에 가 가지곤, 그저 웬만한 집도 가고 가난한 집도 가고, 어린애 못 낳는 집만 준 겁니다. 하여튼 못 낳는 집에만 줬는데 그 애들 간 집은 잘 살게 됐습니다. 그렇게 잘되니깐 공부도 잘 시키고 그럴 수밖에요. 그렇게 들어가면서 잘되고 그러니까 그 애로 인해서 그 부모들은 잘 지내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이 나온 겁니다. 얘기 거리가 나온 겁니다. 야! 그 엄마가 애들을 자식이 없는 집으로 다 데려다 주고선 모두에게 쪽지를 돌려주고 물에 들어갔는데 그집 애들을 그 엄마가 돌보는지 잘된다 이겁니다. 그 집만 잘되는 게 아니라 애들이 가서 사는 집이 잘되니까 그 친척들도 모두 잘되는 거라. 이것이 그 한 점의 마음, 그 애들을 다 기르지 못한 그 사랑 때문에 자기 몸을 헌신짝같이 버리면서도 자기 마음은 그렇게 걔네들을 위해서 간절히 자기가 돌보겠다고 빌었던 것입니다. 죽기 전에 그렇게 안으로 자기 자성 부처한테 다짐다짐하고 생명을 버릴만큼 그렇게 애원했기 때문에 모든 게 부처님의 한마음으로서 소원을 풀어 준 거나 마찬가지겠죠.
그러니 그게 누굽니까? 미래의 그 애들이 바로 그 엄마 아니겠습니까? 그게 자기가 낳아 놓고, 씨를 뿌려 놓고 거두지 못하고 간 그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과거의 그 애들이 그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들이 모습은 다르다 할지라도 자기 과거며 아니, 자기 미래며 부모들은 자기 과거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공부하는 자세는 항상 울더라도 주장자를 잡고 울고 또 괴로워도 그걸 붙잡고, 좋아도 그걸 붙잡고 감사하고, 죽으나 사나 그거 아니면 아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깥으로는 절대 착과 욕심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놓으면 우리 살림살이는 어떡합니까 이러겠죠. 살림살이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그게 전부 공부하는 과정이며 바로 보람인 것입니다. 또한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래나요? 안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육신과 더불어 모두가 사랑인 겁니다. 조화를 이루고 화목하게 되고 연줄 연줄이 그냥 가설이 돼서 집 안에도 불이 환하게 들어오니 얼마나 밝고 좋습니까.
어떤 방에는 안 들어오고 어떤 방에는 들어오고 이러면 얼마나 부자연합니까. 또 집 안에 불이 하나도 안 들어왔다고 봅시다. “아이구! 캄캄해. 어딨어? 어딨어?” 하고 온통 난리가 나고 할 일을 못하고 이렇듯이 우리 살림살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집 안에서 하루만 불이 안 들어와서 캄캄하고 물이 안 나와 못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물은 지혜라고 하고 마음의 밝음은 물리라고 합시다. 물리가 터지지 않고 지혜가 나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거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본래 우리는, 여러분의 각자 몸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그게 바로 주인공이자 바로 공부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래 이게 화두예요. 그러니까 모두 살아나가는 일체를 거기에다 맡겨 놓고 착이 없이 사랑하라 이겁니다. 내 사랑이 제일이에요.


왜 없는 문이라고 하는지…

공부하는 과정에 있어서 수행의 방편은 어떤 식으로든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공부를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문을 찾아서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만약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으로만 알고 그 도리를 모른다면, 아무리 경전을 옆으로 꿰고 위로 꿰고 바로 꿰고 이래도 그건 학설이요, 이론이니 참으로 부처님 제자 될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보살행을 하며 어떻게 실천궁행의 법을 그대로 준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경전을 편집하는 데에 가섭 존자가 아난을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너는 보고 듣는 것은 총명하게 잊어버리지도 않고 잘 기억하지만, 경전을 편집하는 데에는 해당되지 않으니 거기에는 자격이 없다.” 한 거죠. 부처님께서는 무의 법과 유의 법을 같이 설하신 거기 때문에 자기가 깨치지 않았으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글자 하나를 쓰면 잘못 돌아가니까요. 이게 50% 50% 맞먹어서 같이 들어가면서 들려야 하는데 현상계 50%만 가지고 결정을 하려니까 해당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래 깨치지 못한 시기니까 그저 “부처님한테서 무엇을 받았습니까? 금란가사를 받고도 또 무엇을 받았습니까?” 이게 궁금한 거죠. 그러니까 그게 분별이라는 얘기지요. 분별을 놓게 되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텐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습도 떼지 않고, 모두 걸리지 않는 법을 배우지도 않고 ‘그게 뭘까?’ 하고선 천년만년 있어 봐야 자기를 모르고서 어떻게 남의 뱃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자기 속을 알아야 그것이 서로 통신이 된단 말입니다. 무전통신! 심안으로 천체를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또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가고 옴이 없이 그렇게 열쇠구멍으로도 들락날락할 수도 있다 이겁니다. 그걸 왜 열쇠구멍이라고 했느냐는 얘기예요! 내가 생각할 때는 문이 많아서 전체가 문이라면, 열쇠구멍이 무슨 필요 있느냐 이겁니다. 네? 또 전체가 문이 없어요. 그런데 열쇠구멍이 문에 해당하느냐 이거죠. 또 그렇다면 그것도 역시 관문이요, 화두요, 공안이다 이겁니다. 공안 아닌 것이 없어요.
그래서 문을 찾아서 들어오려고 애를 쓰는 사람과 문을 찾아서 나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불자 될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육신이 문을 찾아 나가려고 하고 문을 찾아 들려고 하니까 찾을 수가 없는 거죠. 물질이 있는 거나 그렇지, 물질이 아닌 이상에는 문을 찾을 게 어딨으며 문을 찾아 나올 게 어딨느냐 이겁니다. 그렇게 문 찾아 들고 문 찾아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 뱃장 속을 알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일체 만중생의 속을 어떻게 알며, 일체제불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이거예요. 부처님의 말씀을 이론으로만 풀이하고, 들고 나는 게 고정되게 요건 요게 옳고, 조건 조게 옳고, 대승 소승 가리고, 요것이 옳다 그르다 이렇게 하는 그 분별심도 놔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이 없어서 열쇠구멍도 없고, 또 일체가 문이 돼서 열쇠구멍이 무슨 아랑곳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가섭도 없고 아난도 없고 열쇠구멍도 없다 이겁니다. 물질이 있는 거나 문을 열고 들어오지 내가 우주 전체를 싸고 하나의 주장자가 완벽하게 섰다면, 저 요술쟁이들이 왜 이렇게 여기다 끼고 접시 돌리잖아요? 그거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시공이 없이 그렇게 돌아가는 공을 돌리듯이 돌리는 판국에 그 문을 찾아서 들어오려고 하는 그런 사람은 공부 못해요! 문이 없는 데를 그냥 덥썩 뛰어드는 사람이라야만이 그게 그냥 정통문이에요. 문을 따로 어떻게 찾아요? 문이 많은데. 문이 하도 많기 때문에 ‘무(無)!’ 했다 이겁니다. 또 문만 많은 건가요? 화두도 그렇게 많은 거지요, 닥치는 대로 화두예요.
그러기에 우리는 바로 나 자신부터 알아야 하며, 바로 내 마음과 내 육체가 어디로부터 이렇게 끌려다니고 이러고 있나 하는 거를 지켜보는 그 자체가 참선인 것입니다. 조사선이다, 입선이다, 행선이다, 와선이다 하는 것도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여여하게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바로 나 자신의 주인에 맡겨 놓고 돌아간다면, 그리고 지켜보고 실험하고 체험한다면 그것이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이라는 것도 그러하지마는 이 세상에는 마음들이 모두 내놓으라면 하나도 내놓을 수가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문이 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붕도 없고 벽도 없는데 모두가 문을 찾아서 부처님 도리를 배우려고 한다면 그거는 천만리 먼 것입니다. 천칠백 공안도 이 세상 돌아가는 데 있고 천당 지옥도 이 세상 돌아가는 데 있고, 부처님 법도 이 세상 돌아가는 데, 팔만대장경이 지금도 이렇게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어찌 말로 다 하리까?
그래서 문을 찾아서 드는 사람들은 정말 참자기의 그 보배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문을 찾아서 들고 문을 찾아서 나고 한다면 한계가 있어요. 본래 사방이 터져서 문이 없는 것을 문이 있다 하고 문이 많은 것을 문이 없다 하고 이러는 이치는 무엇인가? 사방이 터져서 문이 하나도 없는데도 문이 있다 하고 전체 문인데도 문이 없다 하는 이치는 무엇인가? 내 집의 보배를 간수하고 내 집 보배를 찾을 줄 알고, 내 집 보배를 닦을 줄 알고 빛을 낼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 남의 집 보배를 아무리 탐내 봤던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따로 찾아요? 따로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있으니까 주인이 되고 네가 있으니까 바로 공이다 이런 건데 말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다가 몰락 놔버려라! 네가 하는 거조차 놔버려라 이러는 게 뭐냐 하면 본래는 내가 빈 공에서 왔기 때문에, 온 것도 없기 때문에, 나조차도 공이다. 나조차도 공인데, 공에다가 넣을 거는 또 어딨으며 뺄 거는 어딨느냐. 그러니 하는 것이 전부 공했는데 공에다 또 넣으라니 이건 어폐가 있는 말이지마는, 모두 그렇게 공해서 돌아가면서 여여하게 살면서도 그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빈 껍데기로만 돌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공법에 대해서

스님의 법문을 읽다가 의문이 생겨서 질문 올립니다. 평등공법, 칠보활궁공법, 팔수레공법과 같은 공법에 대한 말씀이 자주 나오는데 그러한 공부 단계가 저와는 차원이 너무나 먼 말씀인 것 같기는 하지만, 혹여라도 자세히 일러 주시면 공부의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여러분이 첫째는 나를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주인공을 믿고 다 맡겨야 하고, 그다음에 맡겨서 밝게 나를 발견했을 때는 바로 둘이 아닌 공부를 하기 위해서 또 맡겨야 합니다. ‘나는 견성했다’고 고개를 탁 들고 내가 나라고 이렇게 한다면 둘이 아닌 도리 공부하기는 글렀죠. 그리고 미해지죠. 세 번째는 둘이 아닌 걸 알았으면, 고다음에는 부처님이 말씀하시듯이 개구리가 도와 달라고 그랬을 때는 개구리가 되어 한마음이 돼서 응해 주시고, 가난한 사람이 달라 하든 또는 못생긴 사람이 달라 하든 잘생긴 사람이 달라 하든 부자가 달라 하든, 새가 달라 하든 곤충이 달라 하든 짐승이 달라 하든,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대로 자기가 돼 주는 겁니다. 그것이 돼 주려니까 적으면 적은 대로 내가 적어져야 똑같이 되죠? 그러니까 건져지는 것이죠.
그래서 어느 때의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이라고, 뭐가 됐을 때에 부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돼지, 소 이런 짐승이 됐을 때 부처라고 할까요, 사람이 됐을 때 부처라고 할까요? 그래서 ‘부처라고 할 수 없는 게 부처다’라는 얘깁니다. 했던 말 되 합니다. 잘 알아서 들으세요. 여러분 마음 가운데 주인이 없다면 안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찾아오면 ‘주인이 있으니 거기다가 맡겨서 실천을, 실험을 해 보십시오. 거기서 할 수밖엔 없으니 거기다 맡기세요.’ 이렇게 하지, 기도를 하라 뭐 정성을 들여라 이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그렇게 되니 그것이 바로 성불이며 열반이며, 구경경지에 이르러서 앞뒤가 없는 불바퀴를 넘어 참으로 영원한 밝음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경지입니다. 그래서 그 경지를 얻는다면 바로 평등공법에 해당이 되고, 고다음에는 칠보활궁공법에 해당이 되고 고다음에는 팔수레공법에 해당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정말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이 모두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평발이니 평손이니 평눈이니 하는 모든 것이 다 종합된 자유인이 될 것입니다. 그 자유인이 바로 부처자 바로 신이죠. 그냥 보통 자기를 불러도 ‘자신(自神)’ 이러죠. 여러분을 끌고 다니는 자신이 있는데 왜 타신을 믿습니까? 자신부터 알아야 타신도 둘이 아니라는 걸 알죠. 그래서 나는 무식한 사람이니까 ‘내 집부터 전화통을 놔야 남의 집에 전화도 할 수 있고 전화가 올 수도 있지.’ 하는 말을 하죠.
여러분의 마음이 생산처인 줄 알고, 일체가 평등공법임을 알고 칠보활궁공법을 알고 수레공법을 아신다면, 사무사유(四無四有) 팔수레공법을 아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스스로 한마음이 돼서 저 나무 이파리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도 버리지 않고, 또 하나도 버릴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삼십이응신으로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법신으로서 모두가 화해서 응해 주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꽃 한 송이가 원을 해도 응해 주시고 곤충 하나가 원을 해도 응해 주신다 이거예요. 응해 주신다는 뜻은 한마음이 되어 주신다 이거지요. 찰나에 한마음으로 들어 주시고, 찰나에 한마음이 너 나로 분리돼서 또 한 찰나에 나시고, 이게 달라 하면 이게 달라는 대로, 저게 달라 하면 저게 달라는 대로 응해 주시는 그분이, 바로 부처라고 이름할 게 없는 것이 바로 부처예요. 내가 어떤 것이 되어서 한마음이 돼 줄 때에 나라고 하고 내가 해 주었다고 하며 부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라는 것은 이름 없는 것이 부처이고 그 이름 없이 행하는 것이 바로 법성신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죠. “대나무 방구씨를 심어서 대나무 귀신 방구털을 먹여서 키운다. 그런데 그 방구털을 더 먹여도 안 되고 덜 먹여도 안 되느니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나한테 닥치는 대로, 가는 거 잡을 필요도 없고 오는 거 마다할 필요도 없고 오는 대로 그냥 그 중심에 놔라 이겁니다. 놓고 가라. ‘거기서만이 모든 것을 들이고 내는 거니까, 모든 건 네놈한테서 나온 거니까 네놈이 다 알아서 할 게 아닌가! 네놈이 이끌어 줄 거고 네놈이 다 할 거고. 이 몸도 네 시자니까, 네 종이니까 네가 건강하게 해서 이끌고 다니려면 이끌고 다니고, 네가 죽이려면 죽이고 마음대로 해라.’ 하고 왈칵 그냥 다 놔 버리는 거죠.
마음을 이렇게 돌려서 굴려 놓는 자체가 팔수레공법이란 말입니다. 바로 사무 사유, 이것이 팔입니다. 모두를 본다면 하나하나가 그냥 거저 이렇게 된 게 없어요.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여러분이 다 지어 놓은 거지 다른 게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냥그냥 살아가는 거 같지만 지금 살아나가는 게 끌려가고 매달려 가는 셈입니다.
그러니 모두 마음들을 잘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하도록 하세요. 또 수없이 인연 따라서 아는 사람을 만나고 불쌍한 사람을 만나고 불쌍한 짐승을 만나고 이럴 때 한생각에 다 건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을 바다로 비유해 보죠. 바다에 몇 양동이 물을 갖다 붓는다고 두드러집니까? 두드러지지 않죠? 또 몇 양동이를 퍼낸다고 줍니까? 안 줄죠? 고거와 같다 이겁니다. 내 마음속에 불쌍한 사람들을 수없이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으니 무명을 벗겨 줄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는 그 마음을 가지고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면,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는 바로 평등공법, 활궁공법이 그냥 수없이 자동적으로 솔솔 나오게끔 돼 있습니다. 사과 하나 떨어지는 걸 보고도 중력에 대해서 캐치를 했다고 합니다마는 사람들이 발전하는 것도 생각하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또 생각을 잘해서 발전하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상대방에 의해서 발전이 되는 겁니다. 그냥 자기 홀로 발전이 되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차원대로 높은 것입니다. ‘차원대로 높은 것이다.’ 하는 거는 낮고 높고가 없다는 겁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대로 높고 공업 하는 사람은 공업 하는 사람대로 높습니다. 고거 두 마디만 해도 아시겠지요? 상업 하는 사람은 상업 하는 대로 높고요. 왜? 이거 하는 사람에게 저거 하라면 못하고 저거 하는 사람에게 이거 하라면 못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종교든 낮고 높은 게 없이 생각하라 이겁니다. 사대 성인들도 다 내 주인공으로 생각하라 이겁니다.
사람은 한 찰나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그놈은 누구고 그놈은 누구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는 놈은 누구고 자다가 일어나는 놈은 누구냐?’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꿈을 꾼 놈은 누구고 생시에 이렇게 다니는 놈은 누구냐?’ 이 모두를 자기가 하는 겁니다. 그 생각이 옹졸했을 뿐이지, 생각이 넓다면 이 우주를 그냥 단번에 삼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삼천대천세계를 단박에 삼키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면 이게 뭔 소린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할 겁니다. 그러나 그게 참 멋진…. 그래서 우리가 그 도리를 알아야 하는 거죠. ‘그냥 삼킬 수 있다’ 이런 말이 위로는 평등공법이 되고 아래로는 칠활궁공법이 되고, 셋째번에는 팔수레공법이 되고,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들고 나면서 다양하게 자재할 때 비로소 ‘자재할 것도 없다. 자재한 것도 없다. 나는 그런 걸 하려고 생각한 예도 없다. 나는 말한 것도 없고 생각한 것도 없고….’ 그게 나오죠. 그러니 모두가 나 아님이 없는데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해서 그런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나 감당하기 어렵게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그거나 둘 다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허! 감당하기 어렵다 하는 생각이 나는 것도 네놈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하고 거기다가 그냥 맡겨 놓으시고, ‘감당하기 어려운 놈은 누구고 감당하기 쉬운 놈은 누구냐?’ 하곤 그냥 거기다 무조건!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맡겨 놓을 수 있고 무조건 감사할 수 있고 그렇다면 됩니다. 그러면 이제 거기에서, 샘터에서 샘물이 꼬약꼬약 나올 때에 샘물 맛을 알겠죠.

보시바라밀을 완성하려면

불교에서는 보시행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사홍서원에 ‘중생무변서원도’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한없이 많은 중생을 대상으로 어떻게 보시행을 해야만 보시바라밀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인지요.

그래서 ‘무변’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무변! 이 마음을 말입니다. 나는 항상 그렇게 여러분한테 말씀드립니다. 또 나 자체가 그렇게 살아왔구요. 남에게 뭐를 줘도 내가 그걸 받으려고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보시가 아닌 겁니다. ‘내가 이걸 줬으니까 너 잘되면 나한테 꼭 잘해야 돼.’ 하고 주는, 말로 그렇게 해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렇게 바라고 합니다. 형제지간도 그렇고 친구지간도 그렇고. 그럴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그러면 보시가 아닙니다. 뒤를 보지 않는 보시, 무엇을 바라지 않는 보시, 그리고 자기가 했다는 생각이 없는 보시여야 남도 살리고 나도 사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일체 만물만생이 한마음으로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데 어떤 걸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네가 한 것도 아니고 전체 한마음으로서 모두가 같이 천연적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음의 살림살이인데 내가 특별나게 ‘내가 줬다, 내가 한다, 내가 했다’ 그러고 한다면 보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받고서 ‘이거 이렇게 줬으니까 이거를 보답을 해야 할 텐데….’ 하는 거는 정한 이치로, 그것은 인연에 따라서 참 잘 생각하는 거라고 봅니다. 착한 마음이죠. 그러나 준 사람은 그렇게 해서는 보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내가 줬다, 내가 했다, 너는 내가 줬으니까 반드시 나한테 잘해야 된다.’ 이런 마음이 없이 하는 게 보시입니다.
그리고 마음 보시가 더 중요합니다. 물질 보시보다도 마음 보시가 중요합니다. 길을 지나가다가도, 하다못해 다리가 성치 않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느라고 무엇을 끌고 다닌다거나 또는 성치 않은 사람이 그릇을 놓고 좀 달라고 한다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달라고 한다거나, 또 몸은 성해도 그냥 가정이 엉망이 되고 편찮은 사람이 많고 이래서 쩔쩔매는 사람, 부모가 없이 그냥 사는 애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뒷생각 앞생각도 하지 말고 그대로, ‘나도 수억겁을 거쳐 올 때에 병신도 됐었을 거고 못나기도 했었을 거고 또는 모자라기도 했었을 거고 장님도 됐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겪어 나온, 과거에 그렇게 겪어 나온 바로 내 모습이로구나!’ 하고 바로 내 모습처럼 생각하고 그냥 앞도 뒤도 없이 보시할 수 있는 그 마음! 그 마음이 즉 보시입니다.
시주하는 것도 나한테 갖다가 주는 게 아니고 내가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갖다 주는 거라면, 내가 받았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갖다 줬다고 하지 않는 시주라면 이 삼천대천세계 일체 만물만생의 마음이 한데 합쳐진 한마음의 근본, 바로 불바퀴의 에너지일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시주를 할 것 같으면, 만 원을 했다면 십만 원 내지 몇 곱쟁이가 불어 갈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주가 아니고 개별적인 스님의 고깃덩어릴 위해서 어떠한 착을 가지고 이렇게 시주를 했다면, 그리고 또 자기가 했다는 거를 생각하고 했을 때는 아무리 대궐 같은 큰 집을 지어 주었도 할지라도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온이 공함을 알려면

학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관자재보살께서 심오한 반야바라밀다를 닦으실 때 오온이 공함을 깨달으시고 모든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셨느니라.”라고 나오는데, 오온의 공함을 깨달으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만약에 지구가 요만하다면, 우린 그 속에서 전부 사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 들떠서 내가 이리로 가 보겠다, 저리로 가 보겠다 해 봐도 그 통 안이란 말입니다. 별 수 없어요. 그 통 안에서 이리 가서 궁둥이를 돌려 앉고 저리 가서 궁둥이를 돌려 앉아도 이것을 팡 치고 나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들뜬 마음을 가지고는. 그러니까 그저 여기를 가도 내 자리 저기를 가도 내 자리, 이 자리도 그 자리 그 자리도 이 자리 그렇지요. 이 몸뚱이 속에 있는 생명체들이, 의식들이 만약에 나가고 싶어 한다, 이리로 옮기고 싶다 저리로 옮기고 싶다 싸움들을 한다. 이 속에서 그런다 하면 아무리 싸우고 아무리 저거 해도 바깥으로는 나갈 수는 없는 겁니다, 이 속에 있는 생명들이. 나갈 수 없으니까 나갈 수 없는 데로, 나가면 죽으니깐 죽는 게 무서워서 못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가도 죽지 않을 그런 대책을 세우려면 벌써 이것부터 알아야 된단 얘깁니다. 나부터 내가 나하고 상봉이 돼서 생명들도 다 의식들도 보림을 해야 된단 얘기지요.
나는 그럴 마음이 없는데 과거에 살던 의식들이 나를, 마음을 그렇게 만들어 내는 수도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조복을 받아라. 안과 밖을 조복을 받아라. 조복을 해야 된다.’ 하는 말이 그 말이거든요. 그래서 ‘수상행식’ 이렇게 하는 것도 수상행식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한데 합치면 공식이고 원식이에요. 그래서 주인공 하면 수상행식이 그냥 원식이 돼 버리는 거지요. 그러니 모두 한데 합쳐서 조복을 받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 이치를 알아야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지요. 별다른 것도 아닌데, 감수성 상상력 또는 그거를 하다 보면은 행이 스스로 된다 이겁니다. 스스로 되면 그 의식이 그냥 그것이 한데 합쳐버려서, 의식이 저절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니까 한데 합쳐서 원식이 돼 버리지요. 원식 하면은 벌써 수상행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거에 그냥 포함이 되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모든 만물의 뜻이 다 내 마음 하나로 돌아가야지, 그렇다고 해서 만물이 다 몽땅 다 이렇게 와도 내 그릇이 좁쌀 알갱이만하더라도 일체 만물이 다 거기 한 군데 좁쌀 알갱이 속에 다, 자리가 적지 않고, 우주 전체가 그 좁쌀 알갱이만한 방이라고 하더라도 다 거기 채워지고, 크면 큰 대로 채워지고 작으면 작은 대로 채워지는 겁니다. 작고 크고가 없어요.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이 아주 티끌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마음인데, 그렇게 왕창 마음이라는 건 너무 많기 때문에 없다 이런 말이에요.
사람이 이런 원리를 알아서 스스로, 겉으로는 내색을 안 해도 마음 속으로 항상 아픔을 나와 같이 생명을 나와 같이 모습을 내 자식같이, 자비를 내 부모같이 이 모든 게 다 그렇죠, 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속에 들어갈 수 있어요? 아주 조금도 에누리가 없는 거니까 벌써 한 치가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거기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몰락, 지금 이 말도 몰락 부숴 버리는 겁니다. 몰락 부숴 버리는 게 아니라 몰락 녹여 버리는 거예요. 끊어 버리는 게 아니라 녹여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전으로 놔라 이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놓지 못한다면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것이 항상 컴퓨터처럼 체크가 돼 있기 때문에 지금 그 도리를 모르면 요다음에도 역시 또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연방 끄달리고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놔 버릴 때 딴 데다 놔 버려서는 안 됩니다. 생각 내기 이전 자리 그 자기한테다, 자기 주처, 근본 주처에다가 놔 버려야 되지 않겠나 이겁니다. 바깥에다 놔 버리면 벌써 그것은 허탈해집니다. 이거는 헛손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즉 말하자면은 내가 이 세상에 “으아!” 하고 나왔을 때 벌써 하늘과 땅은 깨어져서 짜개져서 나온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온 자기 근본처에다 놔 버려라 이겁니다. 근본처는 한마음이에요. 내가 생각내기 이전은 전부 한마음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200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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