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경소(重大輕小)
경주남산을 답사한다면, 삼릉계곡(냉골)의 코스가 핵심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불상을 보고 경주남산의 묘미를 맛보기에는 이 계곡이 그만이다. 이 곳에서는 바위만 보아도 부처님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곳곳의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따뜻한 미소로 맞이하는 아담한 크기의 마애관음보살상을 시작으로, 남산을 찾은 이들에게 경건함을 일깨워주는 목 없는 석불좌상, 경주에서는 가장 영험하다는 선각 육존불, 팽팽한 긴장감의 관능미를 보여주는 코가 깨진 석불좌상, 그리고 옆집 아저씨와 같은 선각여래좌상으로 이어지다가 웅혼한 기상의 냉골마애불상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고 상선암에서 막을 내린다. 삼릉계곡의 불적은 다채로움과 박진감으로 가득한 ‘불상의 교향곡’이다.
이들 가운데 삼릉계곡의 절정이자 꽃은 냉골마애불상이다. 앉은 키 5.21m의 큰 규모에 반쯤 하늘에 걸치고 있는 냉골마애불상은 그 위용이 장관이다. 높고 탁 트인 터에서 멀리 시선을 두고 있는 부처님의 자태를 보면, 경주의 시민만이 아니라 극락에서 온 세상을 제도하려는 큰 뜻을 품은 아미타부처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불상은 원만한 얼굴에 시원한 눈매를 갖고 있고 지그시 다문 입술에 여유로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어 한층 위엄이 넘친다.
그런데 그 표현기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입체감이 충만한데, 몸과 광배는 음각 선으로 새겨 평면으로 처리하였다. 그렇다고 선각으로 표현된 평면적인 몸체가 결코 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각과 회화의 만남이다. 조각적인 얼굴과 회화적인 몸, 서로 이질적인 조형요소가 부딪침으로써 오히려 불성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고 전체적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거대한 마애불에서 몸체를 약화시키고 불성이 집약된 얼굴만을 강조하는 기법은 대중들을 교화하는 데 효과적이다.
과연 이러한 기법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일까? 신라불상에서 찾아보면,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굴불사지 사방불의 동쪽 약사불이 이러한 기법의 원조격이다. 그런데 이 기법을 좀더 넓은 측면에서 조망하면, 삼국시대까지 올라간다. 고구려 삼존불상을 보면 불상은 크게, 보살상을 작게 나타내고,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작게 그렸다. 이러한 특징은 고대의 미술이나 종교미술에 나타난 중대경소(重大輕小)의 스케일 개념이다. 그리고 중대약소의 크기 인식이 볼륨으로 환원하면, 바로 중요한 것은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평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된다. 통일신라 말 마애불에서 나타난 이러한 기법은 고려시대에도 성행하여 마애불의 전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