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으로 내면세계를 근중하게 생각해야
여러분은 아래 앉아 계시고 제가 법상 위에 올라앉은 것은, 내가 높고 여러분이 낮아서 이렇게 앉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부 한 분도 빠짐 없이 모두 볼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이렇게 올라앉아 있는 것이지 결코 내가 높아서 이 법상에 올라앉은 게 아닙니다.
인간과 더불어 같이, 부처님과 중생들은 모두가 평등한 것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한 데도 불구하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분들은 ‘어휴, 법상에 높이 앉으셨네.’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모두 보고 듣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려앉아도 될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내려앉음과 올라앉음이 둘이 아니고 평등하며, 일체가 다 트였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계정혜 삼학을 본다면,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계’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의 전체를 말하는 겁니다. 5계니, 10계니, 250계니, 280계니 하고 논하는 그 문제들도 전부 계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계율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질서를 지키는 데 있어서 문란치 않게 하여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한두 가지 계율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지켜야 하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기에 누가 되지 않은 일은 하고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며, 거짓말을 한다 해도 남을 이익되게 한다면 거짓말이 아니 될 수가 있으니 그것도 또한 계율에 속합니다. 빼고 낄 줄을 모른다면 목석과도 같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계는 정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즉 정심에 들어있다 이겁니다. 계는 정심에 들어있고 혜도 정심에 들어있어, 바로 계정혜입니다. 우리가 그 정심으로 인하고, 한자리로 인해서 일체 만법이 들고 나는 이 도리를 정심에서 밝혀야만이 해탈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해탈이랄 것도 없어야 하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이름에서마저도 벗어나야 해탈지견향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마음의 암흑 속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달과 같다고 했습니다. 달과 같이 밝음, 어둠을 비춰주는 달과 같이 밝음이라고 했습니다. 해가 거기에 속해 들어가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일체 만중생을 따뜻하게 키워주고 비춰주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 어떻게 속해 있느냐? 우리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씨로 따뜻한 지혜로써, 말도 부드럽게 하고 행동도 부드럽게 하고 생각 생각이 부드러운 지혜로써 서로 융합해 나간다면은 그것이 바로 해와 같은 겁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하면 남의 마음도 따뜻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 따뜻하지 못한데 어찌 남의 마음이 따뜻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내 마음이 악하게 되면 그건 무간지옥이라 했습니다. 지옥이 어디 먼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착하고 밝고 깨끗하게 정심으로써 지혜롭고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고 일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며, 가정을 이끌고 나가는 데도 둘이 아닌 도리로 대한다면 마음은 체가 없는 것이어서 스스로 상대도 밝아져 나와 더불어 밝게 불을 켤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나는 주인공을 찾는데도 이렇게 잘 안됩니다.” 한다거나, “주인공을 찾았더니 잘되다가 또 안됩니다.” 이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발짝 떼어놓는 것만 알았지 한 발짝 또 놓고 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 발짝을 들었으면 한 발짝을 놓고, 한 발짝을 들었으면 한 발짝 놓고 하는 게 정상적인 작용인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안되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되는 것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안되는 걸 놓는 것도 알아야 들고 놓고 들고 놓고 하는 작용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그런 창조력을 기를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맡기니까 어느 정도는 되더니 다시 안되더라고 하는데, 뒤로 물러서는 것도 알아야지요. 앞에 구덩이가 있는데 전진하기만 하면 빠지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는 물러서야 빠져 죽지 않죠. 그러니 드는 것도 법 들지 않는 것도 법,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라 한 것입니다.
왜 안되는 것도 법이라고 했느냐? 구덩이에 빠지겠으니 빠질 일은 물러서야 한다 이 소립니다. 물러서서 다시 굴려 놓으면 빠지지 않는 데로 갈 수가 있겠죠. 그래서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라 했습니다. 양면을 다 놓고 잘 굴릴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몸이 아파서만 아픈 게 아니라 천차만별로 갖가지의 원인으로 아픔을 가지고 오는데 그 가져오는 재료들은 바로 자기가 벗어날 수 있는 공부하는 길로 들어서는데 그냥 맨손으로 들어설 수가 없으니까 그런 재료를 가지고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 재료가 아니면 이 길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이만하면 살지.’ 하는 안일한 마음에서는 이 길로 들어서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 한마디를 하고 넘어가려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은 공했다고 했습니다. 수없이 얘길 하지만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먼지 앉을 새가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데 병이 났다 하고 여러 가지 아픔이 생겼다고 합니다. 내가 이런 걸 당하고, 내가 이런 걸 가지고,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하는 등 모두가 ‘내가’입니다. 모든 것이 공했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건 짐작하실 것입니다. 고정됨이 없이 보고, 고정됨이 없이 듣고, 고정됨이 없이 행하고, 고정됨이 없이 말하고, 고정됨이 없이 만나고, 고정됨이 없이 먹고…. 하나도 고정됨이 없이 말입니다. 그랬으니까 우리는 한시 반시도 그냥 고정되게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변화하고 부서지며 돌아갑니다. 그러니 거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겠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 가져오는 그 재료를 보면 모두 ‘내가,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가 아니라 전체 포함해서 돌아가는 길에 그런 것이 마음에 따라서 부딪치게 되고, 그 업식으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업식이 돼서 나한테 자꾸 연관이 되는 거니까 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걸 말입니다. 내 몸속에 들어서 자꾸 그 용도에 따라서 나오는 것을 말입니다. 업식이라고 하고 업보라고 하고 유전이라고 하고 영계성이라고 하고 이런 거를 다, ‘아픔이 아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모습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나한테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생긴 거다. 업보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병고가 붙어서 그런 게 아니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를 나한테 이렇게 감사하게도 준 것이다. 이끌어주는 재료가 주어진 거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재료를 가지고 나는 관찰하고 거기다가 놓고, 내 마음의 주인한테다 맡겨 놓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지켜보고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냥 틀고만 앉아서 ‘이 뭣고!’라고 한다든가 강제로 의증을 내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참선이 못됩니다.
하나하나 지켜보고 체험하고 돌아가는 그것이 일체 만법의 근원이며 그 근본을 해탈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그냥 “나는 주인공을 찾았는데도 이렇습니다.” 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주인공은 찾는 게 아니라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본래 없는 것을 찾는 것이라면 문제가 되지만,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즉 암흑 속에서 밝음이 불끈 솟아서 불이 일어나면 모두가 밝게 살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러고저러고 하지 말고, 여길 가봐야 옳을까 저길 가봐야 옳을까 이렇게 헤매지도 마시고, 내 중심을 세워서 어디가 아프면, 병원에 좀 갔다 와야겠다고 마음이 일어나서 가게 되면 그대로 가는 것이 법이고, 또 자기 생각에 병원에 안 가도 마음속의 모든 생명들이 한마음으로 작용을 해주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또 그대로 거기에 놓고 실험을 하면서 지켜보는 것이 참도리인 것이죠.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내 속에 든 의식의 그 마음들이…. 속에 든 수십억의 그 모습들이 다 여러분의 모습들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그 여러 가지의 모습들이 한데 합쳐져서 작용을 해주는 바람에 여러분이 걸어다니고 말도 하고, ‘나’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또 어떤 경계에 부딪쳐서 나를 보러 오더라도 나에게 말을 해서 해결하려고만 하지 말고,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모두 한마음으로, 더불어 같이 한마음인데 어찌 스님의 마음인들 이 속에 아니 계시랴.’라고 생각하십시오. 일체 만인의 마음, 일체제불의 마음이 모두 한마음으로, 여러분이 아파서 응해달라고 원한다면 약사보살로 응해주셔서 여러분의 몸에 들은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마음이 돼서 고쳐주시고, 또 어떠한 애로가 있든지 수명이 짧다면 칠성이 되어서 응신으로 찰나에 드셨다가 나시고, 죽어서 좋은 데로 가고자 지극하게 원하면 바로 지장이 돼서 여러분의 그 의식과 더불어 같이 한데 합쳐서 지옥문을 뚫어 다 허물어뜨리고 나가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영묘한 마음의 슬기로운 그 묘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끄달리고 그런다면, 어떻게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며 어찌 암흑 속에서 벗어나서 태양을 보고 행하시렵니까? 옛날이라고 할까요, 내일이라고 할까요, 오늘이라고 할까요? 어느 동자가 말입니다. 부처님과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는 동안에 부처님께서 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자야!”
“예”
“내 발과 네 발의 차이가 어떠하냐?”고 물으셨습니다. 동자의 말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했습니다.
“차이가 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고?” 하고 또 부처님께서 물으시자, 동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부처님한테 가면 부처님과 하나가 되고 부처님이 제게로 오시면 저와 하나가 되니 어찌 차이가 난다 하겠습니까?” 했더랍니다.
“이리 가도 하나고 저리 가도 하나라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답니다. 동자가 “박 덩굴이 담 너머로 넘어가서 박이 열린 까닭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부처님 말씀이,
“그래, 박은 여여한가?” 하셨더랍니다.
“박은 제 나무에서 익어서 맛이 좋습니다.” 하고 동자는 대답했는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 만공에 꽃이 두루 피고 향기가 두루 나고 만 가지 맛이 나는구나. 그대로 그냥 그냥 익었도다.” 하셨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한 말을 그대로 연결해서 잘 들으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침착하게 그 과정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깥에서 경전으로 알려고 하지만 말고 내 마음 가운데서 양 발이 같을 수가 있고, 너한테로 가면 너로 하나가 되고 나한테로 오면 나로 하나가 되니 둘이 아닌 고로 그 하나는 담 너머로 박 덩굴이 넘어가서 박이 열린 것입니다. 허나 그 박도 익었어야겠죠. 그래야 제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마음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래도 수없는 억겁 동안 진화되어 나오면서 선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입니다. 인연이 없다면 모이질 않습니다. 인연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런 손수건 하나를 들어도 인연입니다. 이 손수건을 내가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것을 무엇에 필요로 하겠습니까? 손수건이란 이름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써주니까 바로 손수건이라는 이름으로 빛이 나는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인연들도 같이 만나고 돌아갑니다.
한 철 동안의 만남인데, 이 만남에 의해서 구덩이에서 빠져 나오느냐 구덩이로 들어가느냐는 문제가 있는데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러기에 인의롭게 생각하고 지혜롭게 생각하며, 착하게 마음을 쓰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며, 악한 생각을 갖지 말고 항상 부드럽게 행을 하면서 더불어 같이 내면이나 외부 모두에 직결되고 가설되어 있는 이 한마음 속에 모든 것을 맡겨 놓으십시오. 그 어떠한 억울함도 참으라고만 하는 게 아닙니다. 거기다 맡겨 놓고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자기가 먼저 상대를 부드러운 말로 대하면서 거기다 맡겨 놓으면 자기라는 게 없어지니까 그때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내려놔집니다. 인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무조건 조건 없이 사랑한다면 나에게도 조건 없는 사랑이 올 것입니다. 이 미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직접 실험해보십시오. 실험을 해보지 않는다면 아마 모를 겁니다. 그러면 질문하실 분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 제가 이제까지 배운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쭉 살아온 과정이 스님 말씀하심과 백분의 일 미리의 오차도 없다는 걸 자신하고 믿고 갑니다. 또 그 과정에 있어서 저 나름대로 체험을 많이 합니다. 아픈 것도 자기가 만들어 가지고 아팠는데 고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내 인생의 거울을 들여다보니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제가 그걸 발견한 것은 제 집 식구가 아팠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다가 중도에 나을 줄 알았는데 안 낫는 겁니다. 그래서 “아픈 것도 당신 알아서 해!” 하고 내밀고 보니까, 한 보름 전에 딱 부딪치는 겁니다.
사실은 제가 지금 그쯤 알아 가지고 뭐 행동한다거나 말을 하는 것도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는 그 습성이나 버릇 때문일 텐데 스님께서 좀 교정을 시켜주십사 하고 또 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삼천 마일짜리 모터를 돌리는 모양인데요. 이제 삼만 볼트 전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허락하시죠?
▲스님: 그 모든 건 정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정심에다 모든 걸 놓으면 망상이든 습성이든 모든 것이 다 사라집니다. 모든 건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 맡겨 놓으면 그대로지, 어디에 또 망상 습성이 따로 있습니까? 그러니 몰락 일어나는 대로 나온 그 자리에 맡겨 놓으세요.
▲질문자1: 그런데 무척 묘한 게 많습니다. 제가 술을 아주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아침에 속이 쓰리다고 하는데, 저 같은 경우에는 마시고도 괜찮다고 생각해서인지 다음날 아침에도 밥 한 그릇 다 먹고 회사에 출근합니다. 참 신기하던데요.
▲스님: 그렇게 되는 것은, 습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서 해결할 수 있고, 다스리는 것은 너무 많이 먹으면 불편하게 될까봐 조금 덜 먹는다 하는 마음으로 가면 다스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하지 마라’도 아니고 ‘해라’도 아니고 자기에게 맞게, 용도에 따라서 아주 알맞게 모든 것을 행하시면 그게 바로 정행입니다.
▲질문자1: 그러니까 제가 조금 말씀드렸듯이, 이제까지 그런 과정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습성이 남았는데 저 나름대로 빨리 하려고 그럽니다. 하여튼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스님: 그런 습성도 놓으십시오. 그럼 됩니다.
▲질문자2: 이렇게 공부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두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서산대사께서 지은 ‘선가귀감’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이 마치 바람 없는 데 물결을 일으킴과 같다. 대자대비로 어리석은 중생 건지심이지만 한 물건으로 본다면 사람마다 본래면목이 절로 이루어졌거늘, 어찌 남이 연지 찍고 분 발라주기를 기다리리오. 고로 이 세상에 나오심은 잔잔한 물결에 파도 일으킴이다.”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네들이 오신 것을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다 복이었는데 어찌 이런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정확한 뜻은 알 수는 없으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가령 스님 오심이 바로 ‘바람 없는 데 물결 일으킴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사람이 웃기만 하고 살 수도 없는 거고 웃지 않고 살 수도 없는 겁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한다면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부질없는 짓이다, 하는 것과 같은 말이죠. 오히려 파도를 일으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사람은 일으킴과 가라앉힘이 동시에 작용이 돼야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라는 말이 됩니다. 만약에 파도로 비유한다면, 파도가 일지 않는다면 고기떼가 다 죽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왜냐하면 태양은 바다 밑까지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항시 돌아야만이 고기떼가 살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한번 비유해 본다면 모든 것을 정에 들게 이끌어 주는 겁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람이 들었다 놓을 수 없다면 사람 노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작용이라고 볼 수 없겠죠. 들기만 하고 내려놓지 못하면 병신이요, 놓고 들 줄을 모른다면 병신입니다. 어떻습니까? 주먹을 쥐었다 펼 줄 모르면 병신이요, 또 펴 놓고선 쥘 줄 모른다면 병신이겠죠. 그러니까 폈다가 쥐었다가 폈다가 쥐었다가 하는 양면의 작용을 자기 스스로 잘 하는 것을 일축해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점을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바람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 선근을 심어주는 일이라는 겁니다.
▲질문자2: 두 번째 질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세 번을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주인공에 믿고 맡기는 것으로 세 번 죽기가 가능합니까? 아니면 스님께서 해오신 바와 같이 목숨을 떼어놓고 들어가야 합니까?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주인공을 일심(一心)으로 발견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가,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남자든 여자든, 스님이든 스님이 아니든 막론해놓고 말입니다.
아까 동자 얘기를 했듯이, 사람은 다리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즉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이 절름발이가 돼서는 아니 됩니다. 동시에 같이 돌아간다는 자체를 아셔야 됩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거와 동시에 돌아가죠? 어디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눈과 귀가 따로따로 돌아갑니까, 어디? 얼굴이?
그러니까 이것을 악과 선도 거기 놔라. 악한 거는 ‘선하게 이끌어줄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놓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는 감사하게 놓고, 모든 거를 한군데다가 놓는 것이 자기가 공해서 본래 없는 것인데, 따로 내가 없다 하는 소립니다.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따로 내가 없는데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거는 잘못돼 돌아가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나만 따로 독불장군이 될 수는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죠. 그러니까 그것을 완벽하게 알 때까지는 모든 것을 ‘내가 따로 없으니까.’ 하고 거기다 놔라 이겁니다. 그게 죽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따로 없는 반면에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요, 모두가. 안 그렇습니까? 공생(共生)이며 또는 공체(共體)며 공용(共用)이며 공식화(共食化) 하고 그냥 모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 도리를 완전히 알게끔 하려면 겉으로, 이론적으로, 학술적으로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으로써 ‘한마음 속에서 모든 게 들고 나는 그 무쌍한 만법이 그대로 더불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거를 말입니다, 그거를 진심으로 자기 속으로 확철히 알려면은 거기다가 또 놓고 돌아가야 하니까 또 두 번째도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 말라.’ 이 소리가 ‘죽어야 한다.’ 이 소립니다.
세 번째도 같이 돌아가면서 서로가 인연에 따라서 이 손수건을 쥐었으면 손수건은 들고만 있는 게 손수건이 아니라 땀을 씻는 겁니다. 응? 어디를 씻든지. 그러면 나와 수건과 인연이 마주쳤기 때문에 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건 발전의 작용입니다, 발전의 작용! 그러기 때문에 나툰다고 하는 겁니다. 나툰다! 예를 들어서 목이 마르면 물을 먹고 땀이 나면 손수건을 들고, 말소리를 내려면 이 마이크를 들고. 야, 모든 일체 만물이 만 가지가 다 나 아님이 없이 나투면서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거를 알려면은 또 놓고 가야 된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구경경지(究竟境地)에 이를 수가 있다. 그러니 내가 죽지 않는다면 전체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도 모를 거고, 모두가 하나로 돌아가는 그 원리가 바로 공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그거를 알리기 위해서 한 번도 죽어야 하고 두 번도 죽어야 하고 세 번도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을 했던 겁니다.
아까도 그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부처님과 동자가 얘기를 했는데 “차이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부처님 발과 그 어린 동자의 발과 차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질문자2: 잘 알겠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질문자3: 제가 몸이 이렇게 자꾸 아픕니다. 피가 순환이 잘 안되고요. 겨울 삼동 아파서 고생하다가 두 번째 왔는데, 좀 덜하긴 합니다만 어떻게 해야 몸이 나을는지요. 그래도 허리는 꾸부정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펴졌습니다.
▲스님: 그것도, 그 몸속의 작용도 모두 한마음으로 믿고 그 자리에 놓으십시오. 맡기시고, ‘네놈이 이렇게 아프게 한 거니까 네놈이 아프게 하지 말고 끌고 다녀라!’ 하고 맡겨버리세요. 진실로 믿고 그렇게만 하시면 좋아질 겁니다.
▲질문자4: 오늘도 이렇게 스님을 뵙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항상 죽는 쪽과 사는 쪽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이것을 어느 한 방향으로 해결하기를 바라고 주인공한테 관하는데, 그 양면을 다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도라고 저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관하는 것은 그 중용의 도를 벗어난 것인지요? 그리고 저희들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중용의 도와 연결해서 어떻게 이해를 해야 되는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스님: 바로 당신이 이 세상에 났으니까 모든 일체 만법을 당신으로 하여금 들이고 내죠?
▲질문자4: 예.
▲스님: 그래서 중심에서 모든 일들을 하니까 그 중심 당신 뿌리에다 맡기시라는 겁니다. 뿌리가 있어야만이 모든 가지와 이파리 또는 그 제 나무에서 스스로 꽃이 피고 열매도 맺을 수가 있는 것이죠. 뿌리 없는 나무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 뿌리로서만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뿌리에 놓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모든 것은 뿌리에서 나오므로 싹이 있지,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싹이 나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주인공 그 자체의 뿌리가 있기 때문에 몸이 있는 겁니다. 몸이 있으니까 움직이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그 중심 주인공에 맡겨 놓고 그대로 자기 생각 돌아가는 대로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바로 중용입니다. 이리로 저리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집착을 하더라도 집착이 아니요, 망상이 나온다 하더라도 망상이 아니며, 모든 게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다 되놓고 활발하게 인연에 따라서 활용해라 이 소리입니다.
▲질문자4: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실 당시의 일입니다만, 부처님 십대 제자 중에서 신통 제일인 목련 존자와 지혜 제일인 사리불 존자가 계셨는데, 하루는 그 두 존자께서 신통력 내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신통력 부분에 있어서는 목련 존자가 위이기 때문에 목련 존자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과는 사리불 존자가 이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목련 존자가 사리불 존자에게 어떻게 해서 이길 수 있었는가 하고 그 비결을 물으니까, 사리불 존자께서 하시는 말씀이 “제가 이긴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이기신 것입니다. 저는 내기를 하는 순간에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서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 제가 이긴 것입니다.”라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 사리불 존자께서 부처님께 올리신 그 기도와 저희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복신앙으로 이해를 할 때의 기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스님: 그게 차이가 있는 겁니다. 사리불 존자가 기도라고 말했다고 해서,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한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그건 즉심(卽心)입니다. 이름해서 주인공이라 하고, 이름해서 즉심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 마음이 지혜롭게, 말하자면 이 사람한테 똑바로 있는 대로 대답을 하려니 그쪽이 해가 될 테고, 똑바로 대답을 안 하자니 거짓말이 될 테고,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가 안 가게 지혜로운 마음으로서의 즉심으로써 중용을 했기 때문에 그건 기도라고 거기다 붙일 바가 없습니다. 즉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련 존자는 한 번 뺐으면 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진 겁니다. 자유스럽게 끼고 빼고 끼고 빼고 할 줄 알아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혜와 신통력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한테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지 지혜와 신통력이 어떻게 둘이겠습니까? 그건 바로 즉심의 도리입니다.
▲질문자4: 감사합니다. 자세히 가르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질문자5: 그 동안 한마음 주인공에 대해서 생각나는 것을 여쭈려고 합니다. 수행을 하다 보니까 저의 인생이 조금 많이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제 오장육부를 청소해서 믿음으로 연결이 된 기분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제까지 생활해오면서 시험하면서 보니까 확실히 주인공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활하는 데 주인공을 찾는다고 해서 밑천 드는 것도 아니고 또 믿고 맡긴다고 해서 뭐 세금 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주인공에 대해서 99%는 부정을 하고 1%만 한번 믿어봤습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제가 이곳에 들어올 때는 합장을 하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들어와서는 법당에서 천수경을 독경하는데 마음이 한결같을 때는 스님의 목탁소리와 스님들의 독경소리와 제 소리가 삼위일체가 돼서 한번도 틀리지 않는데, 들어올 때 합장을 안 하고 99%를 믿지 않고 부정을 하면서 들어왔더니 천수경을 독경하는데 자꾸 틀리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노력을 해도 틀리고 해서 나중에는 주인공을 찾으려고 하다가 ‘에이, 이왕 내가 한번 해보려고 했으니 끝까지 실험을 해보자.’ 하니까 계속 틀리는 겁니다. 그리고 주지스님 뵙는 방에 올라가서 또 했는데, 주지스님이 ‘왜, 지금 문을 닫고 왔습니까?’ 그러시는 겁니다. 아마 굉장히 땀을 흘린 모양이에요. 그래서 나와 보니 제가 땀을 무지하게 흘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잘 안되는 겁니다.
모든 게 갑자기 잘 안되는 겁니다. 마음으로 부인을 했더니요. 그래서 ‘아, 이게 참 그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다시 주인공을 찾아 관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참 주인공 도리가 그렇게 묘하고 여러 가지, 다각적으로 자기가 편리하게 자기 찾는데, 공부하는 데는 남녀노소가 없고 때와 장소, 배경도 없으니 항상 안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99% 부정하고 1%를 믿는 마음을 낸다면,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바로 각자 자기 믿음의 척도에 있는 것이지요? 알고자 합니다.
▲스님: 그것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믿느냐와 믿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척도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본인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실험하고 관찰하는 그 자체가 바로 ‘관·세·음’입니다. 관해 보고 관해 듣고, 말하고 하면서 이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관세음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바깥으로 찾으니 그게 어디 찾아지겠습니까?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자기가 직접 실험하고 나가는 게 진짜 참선입니다. 아주 잘 하십니다. 이 공부하는 데는 말만 여러 시간 듣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과 더불어 일심으로 내면세계를 근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내 고깃덩어리를 믿지 말고 내 이름을 믿지 말라. 모든 것은 너희들 마음이 발견되면 내 마음도 첨부돼서 둘이 아니니라. 너희가 이 도리를 깨달으면 나와 더불어 같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왜 우리 스님은 부처님 경전 말씀을 안 하시고 저렇게 늘 하신 말씀 또 하시나?’ 이러지 마시고 더욱 노력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공부해서 알게 되면 이 세상 돌아가는 자체가 바로 팔만대장경이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이 팔만 사천의 법입니다. 번뇌가 아니라 법입니다.
“내가 얼마나 업보를 지어서 이렇게 번뇌가 일어날까, 업보가 얼마나 많고 죄를 얼마나 지었길래 이런 악한 것이 닥칠까?” 하고 바깥으로 헤매고 찾는다면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불이 막 타고 있는 데다가 기름을 갖다 퍼붙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씨가 처음 피어날 때 그저 담요로 덮으면 그 불은 잔잔하게 꺼지듯이 어떠한 경계가 닥치고 어떠한 번뇌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번뇌가 나온 그 자리, 경계가 일어난 그 자리, 즉 자기의 참주인공을 믿고 티끌 한 점 남기지 말고 몰록 맡겨 놓으셔야 합니다. 그럼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