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보다 슬픈 현실
드디어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내기로 했다. 이유는 한미 동맹관계와 북한 핵문제 해결이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란다. 거기에 유엔에서까지 이라크 결의안이 채택되어 명분도 얻었다고 한다. 선재는 차라리 ‘불순한 이라크 세력들이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한다’는 편이었으면 조금은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약간의 명분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은 미국의 입김에 어쩌지 못하는 우리의 슬픈 처지뿐이다. 선재는 그래서 파병이 안타깝다.
미국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포함,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우리나라가 파병을 결정하도록 하는 일을 가장 큰 외교적 성과라고 생각하고 다양한 외교경로를 통해 요청해 왔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부시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대상국에서 한국을 제외시킨다거나 주미대사가 일시 귀국했다는 보고나, 미 <뉴욕타임스>가 윤영관 외교장관과 콜린 파월미 국무장관 사이에 ‘언쟁’이 있었다는 보도 등을 통해 우리를 계속 압박해왔다.
<작왕경>에서는 “왕이 되어도 살생하지 말고 남을 시켜 살생하지 말며, 한결같이 진리대로 행하고 진리 아닌 것을 행하지 말라”며 왕이 굳게 지켜야 할 신념을 일러준다. <증일아함경>에서는 “민생이 모두 고통을 받는 것은 왕법이 부정하기 때문이고 민생이 모두 낙을 받는 것은 왕의 법교(法敎)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며 통치자의 책임 정도를 가늠하도록 한다.
선재는 원칙적으로 파병을 반대하지만 외교관계 등을 고려해 어쩔 수 없다면 가능한 적은 병력이, 가능한 짧은 기간 동안 주둔했으면 한다. 반대 여론을 이끄는 것은 시민단체의 몫이다. 명분을 얻고 실리를 얻는 시점이 되면 슬그머니 반대여론을 핑계로 우리의 청년들을 돌아오게 해야한다. 100점 맞고 부모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애의 모습처럼, 파병을 결정하자마자 정상회의를 통해 미국의 덕담을 기다리는 우리 나랏님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최원섭(성철선사상연구원 연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