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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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에 사계절 없는 봄이 와야
우주간 법계의 근본이 우리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어 있어

마음의 봄을 얻으려면

스님께서는 나와 남을 둘로 보지 말고 일체를 나와 같이 보며 누구에게나 한마음으로 포근하게 안아줄 수 있는, 봄처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수행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저의 마음을 지켜보면 상대에 따라서 춘하추동이 엄연히 정해져 있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먼저 따져서 상대를 대하는 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나라는 생각을 벗어나서 누구에게나 따뜻한 봄기운을 전해줄 수 있는, 봄처럼 만 생명을 한마음으로 살려낼 수 있는 그런 수행자가 되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사계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는 사계절 없는 마음의 봄이 와야 합니다. 마음의 봄 말입니다. 사계절 중에서 겨울이 좋은 사람은 겨울로 쫓아가고 여름이 좋은 사람은 여름으로 쫓아가고, 가을로 봄으로, 사방으로 흩어져서 쫓아다니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근본에서 나오는 것이고, 일체 만법이 들고 나는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한군데에서 봄날을 맞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곤충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생에 대한 문제가 천차만별로 돼 있는데, 천차만별로 돼 있는 그 마음 자체가 사계절 없는 마음의 봄이 된다면 얼마나 자유스럽고 좋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과거에 수억겁을 거치며 쫓고 쫓기면서 살아온 악업 선업을 잔뜩 짊어지고 이 세상에 나서 지금 모두 살고들 계십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으면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과거가 따로 없고 미래가 따로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을 것이고 현재는 공했기 때문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공한 자리에서 내 마음의 봄을 찾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 자유스럽게 살지 못하며, 항상 말씀드리지만 악업 선업의 업식 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업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수없이 행해 온 악한 일 선한 일들이 용도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면 이렇게 살다가 죽어도 그 수십억의 업식들이 화해서 내 눈 앞에, 죽은 혼백 앞에 그냥 줄줄이 늘어서게 되니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는 것이죠. 한 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으니까 벗어날 길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업식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예전에 장자 설법이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주인공 자체 근본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아주 더 바랄 게 없는, 칠보보배를 가득히 가지고 있는 부자인데, 자식은 아버지를 찾지 않고 고아로서 항상 바깥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가난하고 배가 고프고 추운 겁니다. 그러니 아비를 찾아야 된다 하는 걸 말했을 겁니다. 아비는 자식을 아는데 자식은 아비를 모르는 겁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의 영원한 자기의 근본, 즉 말하자면 주인공은 아비가 되고 지금 육체를 움죽거리고 다니는 운전수는 자식이 되는 거죠. 그게 마음입니다. 축은 아비요, 그 열 가지 백 가지로, 천차만별로 생각내는 거는 바로 아들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이 하자는 대로 육체는 따라다니니까 마음에 따라서 배가 고프게도 만들고 구덩이에 빠지게도 하고 별의별 짓을 다 하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맷돌로 비유를 했습니다. 우리가 맷돌을 돌릴 때 그 심봉, 축을 끼우지 않고 돌리면 잘 갈아집니까, 안 갈아집니까? 안 갈아지죠? 그것을 끼우고 돌리면 잘 갈아지듯이 우리가 일체를 소화시키는 데도 그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고 생활을 해 나가는 거하고 안 믿고 그냥 해 나가는 거하고는 천차만별로 다른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두루 할 수 있는 묘법을 가진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높게 생각하지도 말고 낮게 생각하지도 말고, 일체를 낮다고 깔보지도 말고 높다고 높게 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자기로만 보세요, 자기! 몸도 자기와 같고 아픔도 자기와 같고, 모든 걸 자기 같이만 본다면 외착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여러분 마음은 항상 봄이 오게 됩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계절이 있지만 진짜 안다면 사계절이 없습니다. 항상 봄이죠. 여기에서는 불을 껐다 켰다 하니까 ‘켜라, 꺼라’ 하는 언어가 붙지만, 어떤 세계에서는 항상 밝아 있기 때문에 ‘꺼라, 켜라’ 하는 언어가 붙질 않습니다. 그 도리를 아시면 바로 이해를 할 겁니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앉고 싶을 때 앉고, 이게 그대로 참선이에요. 그래서 자나 깨나, 여러분이 일을 하면서도 장사를 하면서도 앉아 있으면서도 서 있으면서도 누워 있으면서도 진실히 관하게 되면 그대로 참선이다 이런 거죠.
그래서 옛날에도 이런 말이 있죠. 어떤 스님이, 정말 제일 큰스님이라고 칭송이 자자한 스님이 계셨답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는 마적이 많았는데 그러한 산도둑들이 떼로 몰려 앉아서 그 스님이 오시는 걸 보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저 스님이 그렇게 유명하다니 내가 한번 만나보겠다고 하면서 칼을 들고서는 그 스님이 오시는 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스님이 오시니깐 하는 소리입니다. 자기 속말로 ‘저렇게 묘하다는 스님이 내가 여기서 자길 죽이려고 하는 것도 모르고 그냥 오네, 저렇게.’ 하면서 방탕한 웃음을 웃으면서 그 스님이 오시니까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유명해 봤던들, 당신 가슴에는 철판을 깔았기에 칼이 안 들어가느냐? 당신이 아무리 유명하다 할지라도 이 칼은 사정없이 당신의 가슴을 찌를 수 있다. 당신의 가슴을 찔러서 뭐가 그렇게 유명한 게 있나 하고 한번 보고 싶다.” 이랬거든요.
그러니깐 그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입니다. 껄껄 웃으면서 “추운 겨울에 고목을 자른들 꽃이 나오겠나? 봄이 오면 스스로 이 고목에서도 꽃이 피고 스스로 열매가 열릴 것을 말일세. 그러니 그 뜻을 알게.” 그러시고는 가시는 겁니다. 그 소리를 들은 이 도둑이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아, 그 말에 고만…. 그래도 수십 년을 마적으로 다닌 경험도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고만 그 소릴 듣고 칼을 뚝 떨어뜨렸어요. 떨어뜨리고 거기서 그냥 삼배를 올리고, 자기 꼬마 도둑들도 다 그 스님의 제자가 됐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좀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셔서 내 마음의 봄을 맞이하세요. 봄은 항상 봄이지 사계절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속에 봄이 와서 물이 흐르고 그 물 맛이 좋고 열매가 열려서 수많은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무르익은 열매를 아마 익히신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 그 만 가지 열매의 만 가지 맛을 낼 수 있는 그런 여러분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방편

저는 책과 인터넷을 통해 불법을 공부하고 있는 신도입니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희들에게 생활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왜 한마음 주인공이라는 방편을 세우셨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것은 방편이 아닌 실상을 말하는 겁니다. 일체가 다 그 자리에서 들고 나니까 용도에 따라 나오는 대로 다시 거기다 돌려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인공에 관하라고 하니까 자기 빼놓고 개별적으로 주인공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다가 해달라고 그러면 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공, 당신만이 해줄 수 있어.’ 하고 믿고 놓는 거하고, ‘이것 좀 해주시오. 저것 좀 해주시오’ 하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입니다. 믿지 못하고 해달라고 한다면 그것은 기복이지요. 자기가 하는 것을 생각 못하고 그냥 복만을 달라고 하는 기복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 자체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자리는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면 ‘주인공’이라고 하였는가.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아버지라고 하듯이 내 몸 속에 있는 일체 생명들, 또는 외부의 모든 것이 오는 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 생각해 보세요. 몸속에 생명체가 너무 많은데 공생이지, 그게 개별적인 자기 생명 하나입니까? 그래서 공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 속에 생명이 많이 들은 것만 봐도 공생인데 모두가 혼자 살 수 없는 도리가 외부에 있다 이겁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아버지가 있어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있어야 아버지가 있고 회장이 있어야 사장이 있고 사장이 있어야 직원이 있듯이, 이거는 어느 한쪽이 없어도 무효입니다. 작용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듯이 혼자 먹는 게 하나도 없고 혼자 버는 게 하나도 없고 혼자 쓰는 게 하나도 없고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한테 얘기하기를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 그러니 주인공 아닙니까?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시면 알겠지만, 내 속에 그 많은 생명들이 저 좋은 대로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좋아서 먹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부하 직원이 달라고 하니깐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 혼자 먹는 게 아니라 직원들하고 같이 먹으니까 바로 자기인 것입니다. 자기가 수효가 그렇게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혼자 먹는 것도 없습니다. 혼자 보는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결부됐으니까 말입니다. 세포 하나하나가 간장이니 위장이니 심장이니, 모든 게 한데 붙어서 정맥 동맥이 같이 돌아가니까 혼자 사는 게 어디 있고 혼자 먹는 게 어디 있고 혼자 일하는 게 어디 있고 혼자 했다고 할 게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일상생활에 그대로 근본과 마음내는 거와 육신이 움직이는 것과,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육신이 움죽거린다는 것을 알면 모두 내면의 내 마음에 의해서 움직임을 아셔야 합니다. 내 내면 속에서 마음의 선장이, 선장이 이렇게 하자 하면 전부 따라줍니다. 이렇게 좋게 하자 하면 좋게 따라주고 도둑질하자 하면 도둑질하는 대로 따라주고 말입니다. 이렇게도 따라주고 저렇게도 따라주는데, 왜 거기다가 맡겨 놓으라는데 믿지를 못하고 그럽니까. 모두가 자기 아닌 자긴데, 전체가 자긴데 말입니다. 자기 이름을 수효대로 부를 수가 없으니까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하고, 포함해서 ‘한마음 주인공’이라고 이름 한 겁니다.
그래서 한마음이라고 그런다면, 속에서 모두 나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다스리는 내 마음이 자꾸 감지가 되니까 저절로 ‘아! 나하고 둘이 아니로구나.’ 하는 걸 알게 되자, 몸이 아프던 것도 자기가 자기를 낫게 할 수가 있는 거죠. 그 모든 걸 안에서, 몸 세포 하나하나에도 생명이 붙어있고 그렇듯이, 바깥에서 안으로 두면서 한마음 주인공이다 이런다면, 전부 한마음으로 이끌어지게 되거든요. 한마음으로 이끌어지게 되니까 어디가 파워가 일어나서 좀 그러하더라도 그걸 메꿔주는 거예요. 즉, 자기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바깥으로 나 따로 부처님 따로, 되는 거 따로 안되는 거 따로 이렇게 모두 갈라놓고 한다면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일이 쫓아다녀도 일일이 해만 돌아오지 이익한 게 없어요.
마음속으로, 한마음으로 이렇게 해서 거기에서만이 참, 시주를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가 한 게 아니라 자기 주인이 한 거기 때문에, 모든 한마음의 도리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정말 공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통 절에 그냥 왔다 갔다 하고 촛불이나 켜고 향이나 켜고 물이나 떠 놓고 꽃 공양이나 하고 이러는데, 이렇게 하면서 ‘나 절에 갔다 왔어. 나는 불교를 믿어.’ 이러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자기를 알고, 자기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진 걸 알고, 자기로 인해서 모두가 공용하고 돌아간다는 거를 알아야만이 불교를 바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면 모든 게 해결되나요?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내 안의 마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말하자면 우주의 근본도 여러분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바로 근본에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그냥 여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의미는 만물만생의 생명, 그 근본이 불(佛)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에 일체가 다 같이 통하고 교류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교(敎)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그 자체는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전체가 돌아가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모두 불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각자 생명의 근본이 있고, 말을 해서 서로 교류하고 전달하면서 돌아가니 모두가 불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자체는 너무나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없이는 세상에서 창조력을 기를 수도 없고 창조를 해낼 수도 없고 발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전부 자기가 태어났으니까 상대가 있고 잘못됐든 잘됐든 부딪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상대도 없고 부처도 없고, 모두가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라. 너부터 알고 너를 깨달아서 본다면 모든 중생과 부처가, 일체가 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갑니까? 애고든 병고든 천차만별의 문제가 닥치면 닥치는 대로 밖으로만 찾습니다. 명이 짧다 하면 칠성님한테 빌고, 가난하고 일이 생겼다 하면 관세음보살을 찾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하면 지장보살 찾고, 병이 들었다 하면 약사보살 찾고, 물에서 위험할 듯하면 용신을 찾고, 길을 가다가 위험할 듯하면 지신을 찾고…. 여러분, 한마음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어떻게 타의에다가 상대를 두고 빕니까? 상대를 두고 빌어 봤자 공덕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결도 나지 않으며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발견해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항상 노예로서 세세생생 끄달리면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하고도 가설이 돼 있다 이겁니다. 우주간 법계의 근본이 바로 여러분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고 가설이 돼 있단 얘깁니다. 알기 쉽게 말을 하려니 이렇게밖엔 말할 수가 없군요. 그러니 병고가 오면 ‘야, 내 깊은 한마음 속에서, 바로 거기에서 병고도 나온 거니까 낫게 하는 것도 거기 아닌가. 네 시자를 네가 건강하게 끌고 다녀야지.’ 하고 거기 놔야 이치에 맞다고 봅니다. 또는 명이 짧다 하면 안에서 칠성이 됩니다. 금방 화해서 칠성 부처가 돼요.
이해가 안 가면 한마디 더 할까요? 가정에서 살면서 때에 따라서 금방 아버지가 됐다가, 금방 남편이 됐다가, 금방 아들이 됐다가, 금방 형이 됐다가, 이렇게 아주 자동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여보!” 그러면 “왜 그래?” 하고 그 행동과 말과 뜻이 그대로 남편 노릇을 한단 말입니다. 그랬다가도 “아버지!” 하면 금방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이, 여러분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듯이 그대로 나투는 것입니다. 어떠한 애고에 대해서 모든 거를 놓을 때는 자동적으로 산신도 되고 칠성도 되고, 병고가 있어서 거기에 되돌려 놓을 때는 바로 약사가 되고, 좋은 데로 가지 못해서 놓을 때는 바로 지장이 되고…, 그 한군데서 그렇게 일체 만법을 굴리면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이름해서 수레공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거기다가 되돌려 놔야 됩니다. 내가 왜 나오는 대로 주인공에 되돌려 놓으라고 하느냐 하면, 주인이면서도 주인이 없고 그냥 돌아가는 그 자체가 이름해서 바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가 되돌려 놓아야 됩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일체가 다 나지, 자기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부딪침도 있고 화도 나고, 애고도 생기고 병고도 생기고,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는 그런 이치가 생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라면, 바로 되돌려서 거기다가 놓는다면 새로이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입력된 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 나오기 이전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작년 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싹이 돼서 화했더라 이거죠. 그 싹에서 수박이 열려서 씨가 그 안에 있으니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수박씨는 현재 자기한테 있으니 바로 수박을 그냥 쪼개서 맛을 보고 씨를 알아야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게 뭣고?’ 하고서 바깥으로 10년 20년 해도 도대체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 생각으로 과거 씨를, 내가 나오기 이전을 찾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다 들어 있으면서도 둘 아니게 공하여 화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역력히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몸 안에 악업 선업이 수십억이 들어 있습니다. 수십억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얘기 다들 아시지요? 어느 수좌가 동짓날 팥죽을 쑤는데 팥죽 방울이 수없이 나오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주걱으로 쳤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것을 왜 주걱으로 그렇게 쳤는지, 무슨 까닭으로 “문수다! 문수다!” 했는지 그 뜻을, 그 뒷면을 아셔야 될 겁니다.
지금 되돌려 놓으라는 그 뜻도 그와 똑같습니다. 망상이든지 뭐든지, 우리의 마음이, 안에서 나오고 바깥에서 들어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딴 데서 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 일어나듯 하는 겁니다. 딴 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이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 이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 하고 주걱으로 치듯이 놓아야 합니다. 왜냐? 팥죽 방울이 올라오는 게 바로 마음 일어나는 것, 생각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일어나는 것이 팥죽 방울 일어나듯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그 팥죽 방울은 딴 데서 온 게 아니라 팥죽 솥에서 나온 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몸이 팥죽 솥이라면 바로 팥죽 방울이 망상이라고 할 겁니다. 근데 그게 망상이 아닙니다. 이것도 법, 저것도 법, 그것도 법이다 이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생각을 냈으면 법신이요, 움죽거리면 바로 화신입니다. 즉 말하자면 그건 자기가 뜻을 이루어서 그거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한테 귀감이 되고 여러분한테 법을 전한 것도 됩니다.
우리가 모습만 보고 이름만 듣고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오신통이라는 통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통 안에서 벗어나야 되겠기에 모든 것은 마음에다 되돌려 놓고, 남을 원망하지 말고 남을 증오하지 말고 남의 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죠. 가정에서 남편이나 자식이 어떠한 잘못을 한다 할지라도 말로 그 몸뚱이를 잡으려 할 게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심력을 키우는 것만이 해결 방법인 것입니다. 전깃줄과 전깃줄이 맞닿아야 불이 번쩍하고 들어오듯이, 내 주인공에 되돌려 놓으면, 모두가 가설이 돼 있으니까 거기까지 불이 들어오는 겁니다. 부모, 형제, 부부, 자식, 친구라고 알고 있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거를 맡겨 놓으면 거기까지 불이 들어와서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는 여건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발견하는 지름길이며 그대로 여여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공이라면 왜 살아야 하나요?

저는 교회에 다니면서 지구는 수련장과 같아서 육신이라는 씨앗 속에 영혼이라는 보배를 가꾸고 순화시켜서 천국의 예수님께 끝 날에 열매로 바친다며 기도하고 영혼이 늘 평안하기를 찬송하였습니다. 이는 참 세상을 인간으로 살아가는 타당한 이유를 전하는 복음으로 모든 고난과 질곡을 감내하는 좋은 사유였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창조대신 인연을 말씀하셨고 로고스대신 마음이라 하셨는데 무아라는 이론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오온의 가합된 공이라면 저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자비를 설득하는 방편일 뿐 너무 적나라한 이론으로, 제가 텅 비어 있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인가요? 제가 공이라면 왜 살아야 하나요?

여러분이 알게 되면 ‘참 희한한 법이다’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찰나찰나 아버지 노릇 하고, 엄마 노릇 하고, 자식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이러죠? 그 얘길 항상 하죠. 그런데 그렇게 찰나찰나 내가 생활하고 돌아가되 찰나찰나 그렇게 많은 것이 천차만별로 돌아가니까 어떤 거 할 때에 나라고 할 수 없기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함이 없이 하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죠. ‘함이 없이 하는구나.’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됐을 때에 나라고 할 건가, 남편이 됐을 때에 나라고 할 건가, 자식이 됐을 때 나라고 할 건가? 나라고 붙일 새가 없이 자꾸 찰나찰나 나투며 화해서 돌아가니까 나라는 걸 이름해서 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나는 공했노라’ 또는 ‘나는 없노라.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노라, 나는 한 일이 없노라. 나는 여러분한테 설법한 일이 하나도 없느니라.’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도 살아 보면 알듯이 그저 쳇바퀴 돌아가듯 남편 노릇 했다가, 자식 노릇 했다, 아버지 노릇 했다가 그저 여러 가지로 매일 돌아가는 게 그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거 할 때에 남편이 했다고 그러고 어떤 거 할 때에 아들이 했다고 하겠느냔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게 그렇게 돌아가니 나라는 게 없이, 나라는 게 너무 많아서 그냥그냥 그렇게 아버지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고, 자식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친구 노릇 하면서 여여하게 돌아가더라. 이러니 어찌 붙을 게 있겠으며 어찌 붙는 게 없겠습니까? 만약에 둘 중에 하나를, 붙을 게 없다는 것을, 공해서 없다는 거를 알면 붙을 게 없을 것이고, 이것이 그저 천차만별의 바깥으로 끄달리고 그저 ‘내가 있다, 내가 한다, 내가 했다, 내가 줬다’ 이거 모두가 나, 나, 나, 나 이러고 돌아가면 꼭 그냥 매사 게 붙어서 걸려 돌아가게 되는 거죠.
이것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이 음식을 먹고 소화를 잘 시켜서 아주 금새 소화가 되고, 그저 먹는 대로 소화가 잘되면 그대로 여여한 거고, 그저 욕심 많이 내고 어떠한 거든지 먹어서 체하면, 체해서 소화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대변이 제대로 나가지 않는다면 걸려서 죽습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을 잘 써서 소화가 잘되면 거침없고 걸림없이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그걸 재료로 알고 실천을 해서 체험을 하고 이런다면 그게 마음의 발전이 돼서 지혜로운 마음이 생기고, 과학적인 문제가 거론되고, 창조력이 생기고 이러지마는, 만약에 그런 마음이 없다면 내내 이것은 걸려서 그저 무의 50%, 정신세계는 모르고 물질세계만 알고 하니까 걸려서 못 사는 겁니다.
지금은 정신을 뺏어 먹고 정신을 뺏기고 잡아먹고 이러고 사는 시대가 아닙니까. 꼭 육을 뺏어서 잡아먹어야 잡아먹히는 게 아니거든요. 정신을 뺏어 먹고 정신을 잡아먹고 사니까 정신을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정신공부를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누구나가 다 자기 자신부터 알고 믿고, 거기에서 나오는 거는 거기에 맡겨 놓고 내 마음을 증득해서, 즉 말하자면 정신적인 과학, 정신적인 생활, 정신적인 문화 문명이 발전이 됨으로써 전체가 화합 단결해지고 또는 경제난에도 허덕이지 않을 거고 우리 지구가 수명이 짧아도 또 재료를 다 끌어 잡아당겨서 다 쓸 수 있는, 그러한 광대무변한 법이, 그 능력이 인간에게 누구에게나 다 주어질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그렇게 내 마음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어느 종교이건 그렇게 하지 않고 바깥으로 찾고 끄달린다면 아무리 해도 나를 발견하지는 못해요. 20년, 30년 가도 나를 발견하진 못합니다. 증득할 수 없어요. 내 마음이 편안하고 안위할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죄를 졌어도 ‘하느님 아버지시여!’ 그러고 다 밀어 던져 놓고 이렇게 사니까, 자기는 편안할지 모르지만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발현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고해성사를 할 때도 내가 잘못해 놓곤 신부님한테 가서 고하거든요. 그래서 자기 마음은 순간적으로 편안할지 모르지만 그게 지워지지는 않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아는 거 우주간 법계에서 다 알고 있는 건데, 그걸 속일래야 속일 수가 없는데 그게 지워지나요? 그러니 우주의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 근본에 직결이 돼 있고, 또한 인간살이가 전부 마음에 가설이 돼 있는데, 내가 내 잘못을 다른 누구한테 전가를 한다 그래서 내가 한 일을 잊어버리거나 또 지워버릴 수는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부터 알아야겠다. 잘못하는 일이 있다면 잘못하는 일을 미리 안 하면 될 거 아니냐. 인간이라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안 하고 하는 건 자기 마음이 아니겠느냐. 그거 마음대로 할 건데 마음대로 못한다고 하느냐.’ 이거지요.
그래서 이 마음의 도리를 배우면 평화스러워지고 내가 나를 발견해서 자유인이 된다.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한마음으로 리드하면서 화합을 가져오게 되고, 화합을 가져오게 되면 건강하게 되고, 그 다음에 내가 이 도리를 배워서 모든 거를 화합하게 할 수 있다면 내 가정도 화합과 또는 우애와 조화를 이루게 되고, 또는 나도 그럴 거지만 세계도 또 조화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들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가 둘이 아닌 줄을 알고 그렇게 실천해야 평화를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이 지구의 수명도 늘이고 줄일 수가 있는 것이구요. 그렇게 하다보면 태양과 월세계, 모든 혹성들도 다 나 아님이 없다는 그런 도리도 알 수 있을 겁니다.
200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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