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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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스님의 스님이야기
일아스님

세상에는 길이 많다. 땅 위에는 사람이 길을 만들고, 허공에는 새들이 길을 만든다. 바다에는 배들이 길을 만들고 수행자는 깨달음의 길을 만든다. 여기서 달려가고 싶을 때 속도를 조금 늦출 줄 아는 지혜, 힘들어 걷기 싫을 때 꾸준히 한 걸음 옮길 줄 아는 인내, 이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수행자는 삶이 충만할 것이다.
언제나 시간을 충일하게 쓰는 스님, 일아 스님은 삶의 속도를 조율할 줄 아는 스님이다. 누구보다 알뜰하게 수행자의 삶을 직시하고 걷는다. 다른 종교 수도자의 삶을 근 십년에 가까운 시간을 체험하고 출가한 스님이다. 어쩌면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부처님 제자로서의 시간이 길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까. 강원 학인시절부터 일아 스님의 반듯한 생활의 질서는 도반들의 느슨해지는 정진의 끈까지 살피게 했다.
아마 구족계 수계를 앞두고 서류 준비를 할 때로 기억한다. 다른 종교 수도자로 짧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온 가족을 그 종교의 신자를 만들어 놓고 어느 날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간다고 가족들에게 알리고 홀연히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다른 나라로 유학 간 줄로만 알고 있던 가족들이 서류가 운문사로 발송된 것을 동사무소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 길로 운문사로 달려 왔었다. 물론 일아 스님은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소임자 방에서 두문불출 했고 가족들은 우리 딸, 우리 동생 내 놓으라며 삼일 밤낮을 지키고 있다가 돌아갔다. 나는 그때 일아 스님과 한 방에서 함께 지냈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은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너무 부처님 제자가 되고 싶었지만 삭발하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종교 수도자는 삭발은 하지 않으니까 생활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고 입회를 했단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이 쌓이고 견딜 수 없어서 단호하게 부처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그 이후 가족들에게는 연락 한 번 하지 않았기에 가족들은 까맣게 다른 나라로 유학을 떠난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가족들과 한 고비를 넘기고 구족계를 받았다. 졸업 후에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얼마 동안 수행한 후, 미국으로 향했다. 이제 정말 유학을 간 것이다. 보스톤 캠브리지선원에서 일년 정도 정진하면서 숭산 스님의 도움을 받아 영주권을 받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 전 미국 LA에서 일아 스님을 만났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의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뉴욕 주립대에 입학을 하고 다시 학부부터 종교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스님은 역시 철저한 시간관리와 흐트러짐 없는 생활의 질서를 유지했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노력으로 4년 졸업을 할 당시 외국인으로서 우수상을 받았다고 했다. 스님이 우수상을 받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강의 시간마다 녹음을 해서 듣고 또 들었지. 몇 번을 그렇게 들으면서 교수의 강의를 한 자도 빠짐없이 받아 적었고, 그 강의 내용을 다 외워서 요약 정리하는 습관을 갖다 보니 시험에서 많은 분량의 페이퍼를 제출해야 할 때도 그렇게 문제가 없었다” 고 말했다. 생활 모든 부분에서 이렇게 철저하다. 스님의 이런 섬세한 질서는 <화엄경>을 볼 때 80화엄을 하루에 몇 페이지, 내지는 몇 권을 봐야 일년에 끝 낼 수 있을지를 면밀하게 계산할 때 알았던 바이지만 글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초심시절 강원에서 서툰 한문을 공부할 때 강사 스님의 강의를 녹음해서 들었던 시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아 스님은 학부 4년 동안 모든 성적을 A플러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많은 학비를 들이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10년이 넘는 세월을 LA 서래대학교에서 루이스 랭카스터 교수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까지 여행 한 번 가보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아껴 쓴 결과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세월이 일아 스님을 비껴가지는 않는 지라 이제 스님도 이순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나이에도 스님은 빨리어 경전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그다지 경전을 가까이 하지 않는 한국의 불자들을 걱정하며 논장을 제외한 니까야와 경장과 율장에 나오는 중복되는 내용을 정리해 한 권으로 엮어서 무료로 배포하고자 하는 원을 세우고 오늘도 오롯하게 한없이 무량한 부처님 말씀 속을 걷고 있다.
■불교방송 ‘차 한잔의 선율’ 진행자
200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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