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固執을 몽땅 한순간에 놓으세요
만나고 아니 만나고도 없이 또 만났군요. 사계절이 한결같이 이렇게 오늘인 것을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이 따로 없습니다. 만남도 따로 없고, 그러면서도 이렇게 역력히 반갑고 이렇게 만남이 있으니 얼마나 묘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가는 것을 알아야 오는 길도 알고, 또는 귀로 보고 눈으로 들을 줄 알아야 자유인이 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은 질문을 받겠습니다.
▲질문자1: 다른 분을 대신해서 제가 몇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까 과학은 발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가운데에서 느낌으로 아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여러 가지, 이것저것 연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을 한다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궁극적으로 과학의 발견은 종교적인 데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스님께서 말씀하신 심성과학과는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 우리 생활이 그대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또는 모두 모였다 흩어지고 책정을 하고 이렇게 하는 생활이 그대로 과학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고 과학과 선(禪), 선이라는 그 자체와는 다릅니다. 선은 나를 먼저 발견해 가지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둘이 아니게 나툼을 알아야만이 100% 간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은 물질로서의 과학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수소폭탄을 과학적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수소폭탄 있기 이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합니다. 천체망원경이 100% 다 본다 할지라도 전체를 볼 수 없습니다. 듣는 것은 천체 무선 통신기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또는 남의 속을 탐지기로써 다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또 과거를 알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넣어주어야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팩시밀리처럼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온다고 하더라도 물질을 넣어야 물질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일러주신 이 길의 진리는 그래서 평등공법이요, 칠활궁공법이요, 팔수레공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리가 심안으로 보아서 빛보다 더 빨리 간파할 수가 있고 천체를 듣는 것은 듣지 않는, 즉 말하자면 무심 도리까지, 하다못해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까지, 꽃이 한 송이 피는 것까지도 서로 이심전심으로 통과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과학으로 해결을 하려고 합니까?
▲질문자1: 그럼 결국 과학의 바탕은 바로 마음에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스님: 과학의 바탕은 일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나기 이전을 먼저 간파해야 마음을 내서 우리가 과학이라는 발전을 할 수 있고 일체 만법에 모든 것을 분야에 맞게 할 수 있지요. 근본이 마음이니까, 마음 떠나서 뭐 있겠소?
▲질문자1: 다음 질문 올리겠습니다. 일체를 놓는 그런 공부를 하다보니까 내 마음속에서 일체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체의 생각을 바라보다 보니까 육근 육적이 내 집을 차지해서 이렇게 휘젓는 것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주인공에서 그 의단이 자생적으로 나온다고 말씀하셨는데 일체를 놓는 것과 의단을 내는 것과 가끔 혼동이 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일체를 놓는다고 그러는 것은 우리가 지금 걸어왔지만은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 짊어지지 않고 왔습니다. 고정됨이 없이 그냥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본래는 그냥 돌아가는 거죠. 놓고 간다는 말 자체도 할 게 없는 겁니다. 헌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맨날 마음으로 꿰어 잡고 착을 두고, 욕심을 두고, 집착을 하고 이렇게 모두 하니까 거기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되풀이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망상으로 끄달려서 하는 것과 지금 놓는 것과 어떤 것이 더하냐고 했는데, 망상은 망상이 아니라 그대로 자성을 길러내는 원소자체의 그 과정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구요. 그러니까 망상이라고 할 게 없다 이런 거죠. 그 생각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목석이지 그게 어떻게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망상이다 하는 관념 그것을 떠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그 놓는다 하는 것은 ‘이뭣고?’ 하기 이전에 직접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해결할 수 있다라는 얘기입니다.
과거로부터 이끌어 온 주인이 모든 것을, 몸을 시자로 끌고 다니면서 아프게 됐으면 제 시자를 제가 낫게 할 수 있고, 또 이끌어 갈 수 있고, 화목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체 만법을 다 그놈이 하는 일이니 그놈 탓으로 돌려야 하고 그놈으로 해서 모든 길로 이끌어진다는 걸 믿고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놓고 눈을 번연히 뜨고도 쉬는 그런 자체가 돼야 그것이 진짜 놓는 것입니다. 놓으라고 그러니까 어떨 때는 다 놓고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그냥 그대로 하는 것이 놓는 겁니다. 내면에 그대로 들이고 내는 것. 이거 보십시오. 그것을 모르시겠거든 들이고 내는 숨 쉬는 것 있지요. 들이고 내쉬는 그 자체가 없다면, 죽고 숨쉬는 자체가 없다면 죽습니다. 그러면 들이고 내는 숨 쉬는 것을 어떤 놈이 쉬고 있습니까?
그와 같이 생활도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에 여러분이 계시니까 들이고 내죠? 여러분이 계시지 않다면 들이고 낼 것조차도 없죠. 그리고 여직껏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끌고 온, 진화되어서 끌고 온 장본인, 지금까지도 끌고 가는 그 장본인 주인이 아니라면 간파를 못하니까요. 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증명도 못하니까요. 그거는 사람의 마음으로 다스려서 놓는 데 아주 간파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질문자1: 그러면 지금 스님께서 말씀을 해주신 것에 따르면 일체의 생각들을 그 한마음 주인공 자리에다가 놓는 것이 바로 의단을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까?
▲스님: 그래야만 의단도 대의단이 나오지 의단을 일부러 지어서 의단을 한다면 그것은 빈 맷돌 돌리는 것과 같다 이 소리입니다. 한때 이런 예가 있었죠. 내가 항상 그런 말을 합니다. “이 길이, 이 대로(大路)가 길이 아니니라.” 정말 발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산골, 아주 그냥 낭떠러지, 그게 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어떻게 생각을 했겠습니까? 마음, 반드시 마음은 체가 없어서 지구 밖에도 나갈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도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육신의 길만 찾아서 다닌다면 그건 기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한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마음의 거미줄에 얽혀서 발목을 못 빼면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나는 금방 듣고도 또 잊어버리죠. 얘기하다가 잊어버려요. 지금 뭐라고 그랬죠?
▲질문자1: 바로 그러한 모든 생각을 한마음 주인공 자리에다 놓는 다면….
▲스님: 그렇죠.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것이 실험이 되고 또 체험이 되고 이런다면 스스로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대로예요. 그대로, 그대로 들이고 내는 그놈이 한다는 그 한 가지 믿음만이 남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묘하고 얼마나 무변하고 얼마나 광대한지, 자기도 모르게 어떤 때는 싱긋이 웃을 때가 있어요. 나는 가끔 그러길 잘해요. 옛날에도 어떤 한순간의 일이었지만 ‘부모가 자식한테 오면 자식과 하나가 되고 자식이 부모한테 오면 부모와 하나가 되느니라. 그것은 무슨 연고인가?’ 하다 거기에서 그만 생각을 딱 하고 나니까 하늘을 보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고 땅을 보고 울지 않을 수가 없었더란 얘기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이렇게, 모두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자체들이 전부 업을 짓고 걸어가기 때문입니다. 걸어가되 그냥 걸어가면 될 것을 그냥 내 다리가 어떻고, 어떻게 걸리지 않고 걸어가나 하는 생각에 그만 걸리는 겁니다. 다리 많은 지네가 왜 서슴지 않고 걸어갑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두 다리로 걸어가건만, 두 다리로 걸어가는 것조차도 걸릴까봐 바들바들 떠니까 매사에 걸리게 되는 겁니다. 모두가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없으나 이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의 잘못이 거기에 대두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려 놔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다스려야 한다. 잘못 나가는 것을 다스려 놔야 한다. 그냥 무조건 다 여여하다고 해서 도둑질을 해도 괜찮다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행을 하는 데 있어서 남에게 아주 이익이 되게 행을 하고, 이익이 되게 말하고, 또 이익이 되게 생각하고 이렇게 해야 된다 이 소리입니다.
▲질문자1: 방금 전에 스님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저는 이와 같이 생각이 됩니다. 일체 놓는 것도 또 다스려 나가는 것도 그 한 믿음에 결국은 귀결이 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에 대해서 저희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믿어야 될는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어떻게 믿긴 뭘 어떻게 믿어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있는 거니까 믿어야죠. 자기 끌고 다니는 그놈이 바로 자기 마음의 주인인데 주인이 과거로부터 이끌고 지금도 또 이끌고 가고 있고 그러는데 어떻게 안 믿겠소? 허공을 믿겠소, 이름을 믿겠소, 고깃덩어리 형상을 믿겠소? 무엇을 믿겠소? 나부터 믿고 나부터 알아야 상대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 우주를 알고, 세계를 알고, 내 나라도 생각할 수 있고, 내 가정도 생각할 수 있고, 사회 국가 모두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어떤 때 어떻게 믿느냐고 이렇게 말을 하면 나는 이상스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 자기를 못 믿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믿고 돈을 주고 또 남의 보증을 서고 망하고 온통 이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자기도 못 믿는 사람들이 남을 믿습니까? 세상에 믿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픈 것도 대신 아파줄 수 없고, 죽는 것도 대신 죽어줄 수 없고, 먹는 것도 대신 먹어줄 수 없고, 대신 똥 눠줄 수 없고, 대신 자줄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못 믿어요. 자기 자신인 자기를 어째서 못 믿습니까?
사람이 본래 직감적이라고 그러기도 하죠. 그런데 자성신이 없다면 그 직감이라는 것도 없고 목석인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믿어야지, 어떻게 무조건 믿지 않습니까. 내가 있음으로 상대가 있는 것이고 세계가 벌어졌는데,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이 무효인데 나를 어째서 믿지 못합니까?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아직, 50%의 물질에 관념을 가지고 습이 되어서 졸졸히 그냥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집, 또 날짜를 보지 않으면 이사를 못 간다는 고집, 또 구랑신이 내리면 집을 못 짓는다는 고집, 팔자운명이 있다는 고집, 업보가 있다는 고집, 유전이 있다는 고집, 모두 고집을 다 몽땅 한 순간에 놓으십시오.
날 보고 예전에 어느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디다. 눈을 뜨고 삼 년만 쉬어라. 자거라 이 소리죠. 눈을 뜨고 어떻게 삼 년을 잡니까? 생각들을 해보세요. 그러니 믿는 것을 철저하게 여러분이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겁니다.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께서, 일제시대 때 먹을 게 있나요? 건빵을 우거지에다 넣고서는 푹푹 끓여서 한 그릇씩 먹는데 아, 딴 집들은 보리밥이라도 쌀 넣고 해 먹는 걸 보았거든요. “남의 집은 그렇게 해 먹는데 우린 이걸 먹어?” 그러니까 “그 집의 쌀밥보다 우리 이 우거지 건빵 넣고 끓인 게 더 좋으니라.” 이러신단 말입니다. 그게 그때는 아예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못났든 잘났든 못 배웠든 잘 배웠든 내 부모가 제일인 것처럼, 못났든 잘났든 나 자체가 제일인 것입니다. 내가 있음으로써 내 주인이 있고 내 주인이 있음으로써 나를 끌고 다닌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시고 진짜, 활을 쏠 때 자기한테 진짜 쏘십시오. 그러면 일천만 가지가 다 녹아서 쓰러져 버리고 과거 또는 유전성·업보성·세균성·윤회성 이런 것이 다 몰락 그냥 녹아버리는 것입니다.
▲질문자1: 마지막으로 질문 올리겠습니다. 육적 육진의 작용이 공하여 칠각이라 설하시는데, 육근의 작용과 그것이 공한 칠각 팔식 구해탈, 그리고 십이인연을 좀더 상세히 설법해 주십시오.
▲스님: 그것을 이론적으로 말할 게 아니라 육근 육진 육식이 공했어요. 공해서 칠각이 되고, 아까도 그랬잖습니까? 칠해탈이라고요. 칠해탈도 되고 칠활궁공법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거는 그대로 들어가는 법입니다. 이 선(禪)에서는 이렇다 저렇다, 무슨 육근이 어떻고 무슨 육진이 어떻고 이런 게 하등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세월에 나를 내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아까 얘기했듯이 그게 공했습니다, 전부가. 일체가 다 공했어요.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것 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까 부처라고 했던 거예요. 반야심경에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다 하는 그 자체가 그대로, 그대로라고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삥삥삥삥 돌아서 맨날 그놈의 걸 굴려 봤자야 맛을 생전 못 보고 그 씨를 되심어서 되나오고 되먹이고, 되나오고 되먹일 수가 없어요.
▲질문자1: 감사합니다.
▲질문자2: 스님께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설명하셨는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노사나 부처님은 뭐 하시는 부처님이신가 싶은 의심이 생겨서 그 한 가지하고, 또 한 가진 이건 기계적인 건데 이걸 거기다 결부를 시켜서 되겠나 하는 의단이 생겨서 두 가지를 여쭈어볼까 합니다.
며칠 전에 버스좌석을 물어보니까 좌석이 없다고 그래요. 그럼 내 차로 올라가야 되겠구나 그러고 차를 모는데 1단 기어는 괜찮은데 2단 기어만 들어가면 힘이 없고 3단 4단도 괜찮아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차도 새것인데 이론적으로 나쁘면 3단 4단 전체가 다 힘이 없어야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이래가지고 가겠나 하고 혼자 생각을 하다가 ‘어이, 친구! 당신, 가다가 터지면 밑에 들어가는 놈도 네가 들어가야 될 것이니 네가 대답을 해주어야 내가 정비 공장에 갈 거 아니야?’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한 이틀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모니까 전에 2단하고 똑 같애요. 그래서 이걸 누구한테 이야기하면 ‘저 양반은 맨날 주인공 찾아다니다가 엑스트라도 못 찾고 어디 좀 이상한 사람 아니겠나.’ 이럴까봐 말도 못했습니다. 이런 일도 사람에게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건지 의심스러워서 나왔습니다.
▲스님: 사람한테는 누구나 다 자력과 전력 통신력 광력이 있습니다. 지수화풍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내가 마음으로 진정, 그것도 자기가 부리는 겁니다. 차도 자기가 부리는 거죠.
▲질문자2: 예.
▲스님: 그래서 운전수가 차를 끌고 다니듯이 댁의 몸은 댁의 주인이 끌고 다닙니다. 그래서 이 주인으로 하여금 그냥 진짜로 믿는다면, 믿는 바탕이 있어야만이 그것이 움직거리게 되어있죠. 그러니까 자력이 그것을 발동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움죽거려진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힘이 똑바로 맞아지질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또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니까 되게 하는 것도 댁의 마음이고 안되게 하는 것도 댁의 마음입니다.
▲질문자2: 그런데 마음보다도 산에 올라간다고 올라가는데 2단을 넣으니까 힘이 전혀 안 나와요. 그래서 ‘아, 이거 분명히 고장이구나.’ 즉 말하자면 제가 의심이 나서 그런 게 아니고 시운전을 해보니까 그렇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제 마산 가면서 해보니까 꼭 이상하게 전처럼 힘이 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게 나를 시험을 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여기에 노이로제가 걸렸는가 싶어서요.
▲스님: 그러니까 모두 자기가 생각을 하기에 달렸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냐 저러냐 하는 거는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라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 조그마한 것 하나도 조그맣게 생각하지 마시고, 고 조그마한 거나 큰 것이나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고 들어가시든지 그게 아니다 할지라도 믿는다면 그렇게 자꾸자꾸 그것이 커집니다. 에너지 광이 커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과 그 움직이는 놈 양쪽이 다 없어지고 새삼스럽게 툭 튀어나오는 놈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십시오.
▲질문자2: 그러면 제일 처음에 질문한 노사나 부처님은 뭐 하시는 부처님인지 그게 궁금합니다.
▲스님: 댁에서도 아버지 노릇을 하시죠?
▲질문자2: 아직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 아니요. 자식이 있지요.
▲질문자2: 예.
▲스님: 그 아버지 노릇 하는 놈은 무슨 놈입니까?
▲질문자2: 글쎄, 아버지하고 자식하고는 알겠는데요. 그리고 청정법신하고 석가모니불은 분명히 비교를 해 알 수가 있는데 노사나 부처님이 계신단 말입니다.
▲스님: 알고 보면 노사나 부처님도 이름일 뿐입니다. 이름입니다. 댁에서 아들 노릇 하는 것도 이름이고, 자식 노릇 하는 것도 이름입니다. 아버지가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그러고는 행동을 금방 아들로서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식이 “아버지!” 그러면 금방 아버지 노릇을 하고 아내가 “여보!” 하고 부르면 또 금방 남편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자동적으로 그렇게 하는 거죠.
오죽하면 부처님의 마음이, 일체 사대성인들이 다 깨우쳐도 부처님 마음, 한마음이라는 얘기입니다. 한마음이니까 한마음에서 나온 이름이죠. 그래서 수만 명이 깨우쳤다 하더라도 그 한마음 도리에서는 부처는 하나다 이 소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 하나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 그 이름을 가지고 늘어지지 마십시오.
진드기처럼 이름을 가지고 늘어붙으면 아버지 노릇 아들 노릇 남편 노릇 할 때에 내가 아들이다 하고 진드기 붙는 것처럼 남편 노릇도 못하고 아버지 노릇도 못합니다. 사위 노릇도 못하고 형님 노릇도 못해요. 하나를 가지고 진득하게 붙으면 그렇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전부 놓고 돌아가면 아주 다양하게 그냥 자동적으로 이것저것을 다 여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질문자2: 그러니까 지금 스님 말씀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보라.’는 바로 그 말씀이시네요.
▲스님: 과거는 없습니다. 왜 없는 줄 아시죠? 왜 없습니까?
▲질문자2: 예. 지나가서 없습니다. 붙들지 못하고 지나가서 없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스님: 짊어지고 나왔죠.
▲질문자2: 예.
▲스님: 이 배낭 속에다.
▲질문자2: 예.
▲스님: 배낭 속에 지금 수억이 들어 있습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말입니다. 수억 마리가 들어있어요. 지금 그게 인연입니다. 과거의 인연에 따라서 모두 뭉친 ‘고(苦)’라고 하고 ‘중생덩어리’라고 하죠. 그렇다면 그 중생이 바로 자기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선(禪)은 뭉치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뭉친다면, 뭉쳐서 그 자리에다가 되놓는다면, 즉 숙명통(宿命通)을 컴퓨터로 비유한다면 자꾸 거기에다가 ‘그놈이 하는 것, 전부 그놈이 하는 노릇이다.’ 하고 믿는다면 과거의 인과 업으로 된 업보가 녹아져 버리고 없어지죠. 입력되었던 게 하나하나 지워지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새 것을 자꾸 자꾸 넣는 반면에 그릇도 비워지고 담기고, 비워지고 담기고 이러다보면 자기가 자기를 너무 잘 알게 되어 있고 ‘자기가 어떻게 양면을 다 작용을 하는가를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말이 나올 거예요.
▲질문자3: 스님, 죄송합니다. 저는 신병으로 한 20년간 고생을 하다보니 병원에 가본들 임시조치밖에 안 됐습니다. 선원의 신도들께서 스님께 조언을 한번 받아보라고 해서 한 3년 전부터 왔는데, 개인 친견을 못해서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20년 전부터 천식이 있습니다. 병원에 가보아야 임시조치밖에 안 되고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해서 낫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도님들이 스님을 친견하고 좋은 말씀을 들어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둘째는 늙으면 다 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백내장이 생겨서 눈이 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수술해보려고 하니까 영 안 보여야 수술을 하지 지금은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님께서 좋은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그것이 지금 믿음에 의해서 대두됩니다. 이 믿음이라는 자체가 그냥 허탕 믿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영원한 이 친구놈아!’라고 할 수 있는 정도라야 되겠죠. 그런 정도로, 정말이지 내가 송장이 될 거니까 이렇게 아주 절실히 믿어야죠. 갈팡질팡해서는 절대 될 수가 없죠. ‘네 시자를 끌고 다니는데, 네 종을 끌고 다니는 네 심부름꾼인데 이렇게 안 보이게 하고 또 기침이 나서 이렇게 죽게 만드니, 죽는 날까지는 꼭 심부름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심부름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어쩌겠느냐.’ 하는 그 믿음에서 그렇게 하십시오.
▲질문자3: 결과적으로 병원에도 가지 않아도 되는 건지요?
▲스님: 병원에 가지 마라, 가라 이런 건 아닙니다.
▲질문자3: 예.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자4: 스님, 지난번에도 뵈었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그때는 약을 복용해 보아서 부기가 빠졌었거든요. 그런데 요번에 다시 아파서 스님께 전화도 드렸습니다만 약을 안 먹고 주인공한테 저 나름대로 놓고 관하느라고 해도 잘 듣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약방에 약을 주문해서 먹어도 부기가 안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고 그래도 주인공자리에 맡기고 맡기고 하느라고 했는데 제가 잘못해서 그러는지, 요 며칠 새는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구요. 저 혼자는 도저히 이래도 안 되겠고 저래도 안 되겠고, 집에 할 일은 있고, 아이들 돌이고 그래서 이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를 못하니까 행동이 불편해서, 가만히 누워있으면 되는 게 아니고 두 달 가까이 누워있어도 안 되겠구나 싶어, 해결책은 스님께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서울까지 왔습니다. 저는 제주도에 있습니다. 스님, 좋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님: 댁네들은요, 어떻게 마음이 이상야릇하고 진실치를 못한지 조금 급한 불만 끄면 그냥 해이해져요. 해이해져서 바쁘게 먹고살고 일하고 이런 것만 알고 지내면서 또 흐지부지해지는데 그게 누구 탓입니까? 댁의 탓이죠? 가만히 보면 다 누구의 탓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여러분 각자의 탓이죠. 그게 좀 괜찮았다고 해서 그냥 두면 안 되거든요. 그대로 뿌리를 뽑아야죠. 그리고 좀 나아진다 싶으면 그냥 해이해져서 ‘아이구, 이거 일할 것 있으니까 일해야지.’ 하는데 아니, 일 다 하고 죽는 사람 보았습니까. 이것은 죽으나 사나 자기 영혼이 자기를 끌고 다니고, 그래서 가는 길을 알면 오는 길도 알 수 있고 온 것도 알아야 눈으로 들을 줄 안다고 그랬어요. 귀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여러분이 진짜로 진실로 믿고 인내가 있고 좀 당당함이 있고 좀 패기가 있어야 되는데 이건 아주 조금만 뭐하면 그냥 해이해지고 조금만 뭐하면 “아니, 그까짓 거 뭐!” 그냥 이래지고 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자기가 그냥 그까짓 것이라고 무시하면 진짜 그까짓 게 되는 것이죠, 그냥.
▲질문자4: 저는 그렇게 생각을 안 했었는데 모르겠습니다.
▲스님: 아니, 모르겠습니다가 아닙니다. 그동안 뜸했었죠. 아예 뜸했지요. 그렇게 마음이 뜸하고서야 어찌 그게 도로 그렇게 안되겠습니까? 그런 분들 참 많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좀 당신들을 위해서 그러지 마시고 영원한 내 자성을 찾기 위해서도 그러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마디 하겠는데 이 몸속에 말입니다. 과거에 살던 인연들이 전부 몸속에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은 나쁘고 좋은 걸 모르고 거기서 그냥 일어나는 겁니다. 모든 게 거기서 일어나니 거기에다 모든 걸 맡기고 거기를 믿고 그 여러 놈들이 하나로 뭉쳐서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주인공! 너밖에는 해결할 수 없다.’ 할 때 비로소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이 없다 이 소리입니다.
▲질문자5: 스님, 부모 형제 간에 만나기만 하면 지금까지 서로 죽이려고 하는 법이 무슨 법입니까? 아무리 천도재를 지내고 해도 잘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스님: 되는 방법이 있죠. 그놈더러 해결을 하라고 그러세요. 네놈이 과거로부터 그 모두를 이끌어 왔으니 네놈이 다 해결해라 하고 무조건 밀어던져 놓으세요. 그 자리에서 해결을 하게 해야지 생각으로 아무리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그건 더 꼬이게 되고 안됩니다. 그 속에 들은 자기 마음의 주인공만이 양면에서 다 그것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내 한마음 주인공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굳건히 가지십시오. 그러면 모두 착해집니다.
▲질문자5: 그게 다 인과응보라고 지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스님: 그 인과응보가 그렇게 되면 그냥 없어집니다.
▲질문자5: 그래서 조상들한테 내내 천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절대 안 들어요.
▲스님: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마음으로 자꾸 놓다보면 언젠가 스스로 녹아지게 되고 또 식구 모두가 화목하게 되니 그때부터는 서로 싸울 일이 없어지게 되니까 그렇게 믿고 열심히 관하도록 하세요.
▲질문자5: 저도 조상 병이 천칙되었어요.
▲스님: 글쎄 그렇게 하세요. 그렇게 무조건 하셔야 합니다. 저 수원에 어느 삼 형제가 사는데 6·25가 나니까 아파서 누워있는 아버지를 그냥 놔두고 자기들만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그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동네 사람들이 담요에다 그냥 둘둘둘 말아서는 아무 데다 묻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러고부터 삼 형제가 서로 조금만 일이 생겨도 작대기를 들고 온 동네를 막 뛰어다니면서 서로 때리고 치고 박고 온통 머리가 다 깨지도록 삼 형제가 싸우고 난리를 치니까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여길 찾아와서 그 얘기를 쭉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담요로다 둘둘 말아서 그렇게 했어도 자식들이 컸으면 무덤을 좀 다른 곳으로 잘 모시든가 또는 화장을 하든가 이렇게라도 양심적으로 해야지 왜 아직 그러고 있느냐고 했습니다. 지금은 돈이 있어서 다 잘 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안그러겠느냐고 그러면서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다 거기에다 놓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천도도 시키고, 시신도 화장을 잘 시키고 해서 천도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랬죠. “그래, 그냥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사람을 저희들만 살겠다고 산 채로 놔두고선 달아나서 거기서 그냥 죽게 만듭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동네 사람들이 담요에다가 둘둘 말아서 갖다 묻은 것을 여직껏 내버려두었습니까?” 이러고 얘기를 했더니 어떻게 담요에다 둘둘 말아서 묻은 것을 아느냐는 겁니다. 사람이 이렇게 답답합니다.
▲질문자5: 그럼 화장도 하겠습니다.
▲스님: 그러니까요. 그렇게 하는 것은 한마음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기고 거기에다 진심으로 맡기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었더니 그렇게 하고부터는 아주 삼 형제가 친절해졌답니다. 그리고 집안도 잘되구요. 그러니까 열심히 그렇게 하십시오. 자기를 자기가 못 믿으면 어떡합니까. 이제 사대를 다 흩어버리고 또 이끌고 이 세상으로 또다시 나올 텐데 그렇게 못 믿어서 어떻게 합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고 요다음에 또 질문 받기로 하겠습니다. 어떠한 질문도 받아들이면서 그 질문에 대답만 해 드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진실하게 받아들인다면 에너지까지도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