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세가지 삼매의 조건-공
“만일 공,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세 가지 지혜가 삼매의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어리석은 지혜가 될 것이다. 그 경우 많은 오류와 의심에 빠질 것이다. 만일 삼매의 상태에 머문다면 모든 욕망을 버리고 일체 존재들의 실질적인 모습(實相)에 투철하게 될 것이다.”
열반을 체득하기 위한 관법을 수행하게 되더라도 이상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용문에서 말했듯이 이상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하지 않고 얻게 되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비불교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세 가지 조건은 매우 관념적인 성격이 강하며, 그런 만큼 논리적으로 표현하기는 쉬워도 내면에서 소화시켜 자신의 행동거지에서 저절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는 시가 <법집요송경>에 나오고 있다. “결코 오온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음식이 뜻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집착으로 사는 사람들/ 그들의 자취는 쫓기 힘들다/ 마치 하늘을 날으는 새의 자취처럼.”
이 게송에서 오온은 정신과 육체, 관념과 물질을 의미하는 말이다. 음식이란 수행이며, 수행의 조건은 바로 공, 무상, 무집착(無願)이어야 하며, 그렇기에 그들의 자취를 범인들이 따라 간다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오온에 집착하지 않고, 공과 무상, 그리고 무집착으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이게 된다. 슬픔을 슬픔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바라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고원한 정신상태에서 나타나게 되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래서 외적인 대상에 얽혀 사는 사람들의 정신상태, 사물을 받아들이고 평가하는 의식의 흐름이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심리적 정신적인 평정과 고요함을 얻게 만드는 조건이 바로 세 가지 삼매의 조건인 것이다. 만일 명상이나 참선 혹은 기타의 수련을 통해 어떠한 정신적 경지를 체득했다고 하더라도 세 가지 삼매의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불교가 아니라 말할 수 있다.
세 가지 중에서 우선 공(空)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공이란 어떤 것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를 표시한다. 그런 점에서 부파불교의 아비다르마에서는 ‘아(我)가 없는 혹은 아(我)에 속하거나 부속되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이라 정의한다. 여기서 아(我)란 아트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가 없다는 것은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며, 아트만에 속하거나 아트만에 부속되는 어떤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철학에서 아트만이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실재(實在) 혹은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공이다. 여기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불교의 핵심교리인 무아(無我)이다. 무아의 의미와 공의 의미가 상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공이란 무아의 다른 표현이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실재 대승불교에선 공과 무아를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한다.
공을 명사화한 공성(空性sunyata)이란 말은 내면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동시에 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성이란 말은 열반에 대한 다른 각도의 명칭이 되며, 그 상태에서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진 열반임을 나타낸다. 이것이 수행과 결부되면 ‘둘도 없이 순수하며, 어떤 것으로도 능가할 수 없는 깨달음’을 얻으려고 마음속에 특별한 관념을 남기지 않고 마음을 비워두는 것을 지칭한다.
공이나 공성을 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공이란 개념을 사물에 적용시키거나 존재론적인 차원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원초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지성적인 탐구나 존재론적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논리적 도구 내지는 철학적 탐구의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구원과 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종교란 점을 망각해선 안 된다. 종교적 차원에서 공이란 용어는 구제의 과정을 어떻게 진행해야 가장 합리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가를 웅변하는 것이다. 때문에 구제의 과정에서 공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는 공에 대한 명상은 우리들을 번민케 하는 무지를 제거하고, 우리가 오욕으로 물든 이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생명이자 인간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그들을 포용해야 하는 것이며,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기에 너를 죽이고, 사회를 속이고, 자연을 파괴하는 일이 곧 나의 파괴요 나의 죽음임을 직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공의 실천인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10-15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