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밭으로 변한 ‘절골 7만평’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는 폐사지를 찾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와 마찬가지다. 한갓진 돌담이나 예사롭지 않은 바윗돌, 울창한 송림이나 대숲이 보이면 혹시 여기가 옛 선지식들이 가부좌를 틀던 그곳이 아닌가 하여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이 나라가 불법(佛法)의 땅이어서 실제로 고샅고샅 운수납자들 머물던 흔적 없는 곳이 없고, 나무든 풀이든 부처님의 숨결 느껴지지 않는 곳이 드물다. 강이든 산이든 무심코 대하거나 함부로 스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무상한 것이 세월이어서 가까스로 찾아낸 옛 절집이라 하여도 달려가 와락 안겨 들지 못하는 것은 밀려드는 그리움보다 등 돌려 외면하는 방초들의 몸짓이 완강한 탓이다. 세월이 수상하면 아무리 대중들 밥그릇을 탑처럼 쌓았던 대가람이라 하더라도 놋대접에 푸른 녹슬 듯 쇠멸하기 마련이다. 어쩌다 사세(寺勢)가 기울어 동으로 서로 흩어져 장식품으로 전락한 성보들을 보면 그 이산(離散)의 아픔에 가슴이 울컥거린다.
‘대(竹)의 고장’ 담양. 서봉사지(瑞峯寺址)는 그 서북쪽 노령산맥의 한 갈래인 추월산 아래, 무등산으로 이어진 자미탄가의 후미진 암봉 골짜기에 숨어있다. 화순 땅 운주사지로 가려다가 식상한 감이 없지 않아 숨은 그림을 찾듯 새로운 절터인 담양읍 남면 정곡리 ‘절골’을 찾아가기로 했다. 폐사지 탐험에도 격식이 있다. 발굴 복원으로 유명세를 타는 곳이라도 입장료를 받는 곳이 아닌 곳, 암자나 전각 정도로는 안 되고, 적어도 남원 땅 ‘만복사의 귀승’처럼 저물녘 탁발을 끝내고 돌아오는 사문들의 행렬이 장관이었던 곳, 지목이 농지나 임야이더라도 그 나락들 발치에 추억의 편린처럼 부서진 기왓장이나 도자기 파편들이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는 곳이어야 한다.
서봉사지에 대한 기록이 풍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국여지승람>창평현조에는 ‘서봉사 재 무등산(瑞峯寺 在 無等山)’이라 되어 있고, 조선총독부 발행 <호남읍지> 창평조에는 ‘서봉사 재 무등산 동북 경술화소(瑞鳳寺 在 無等山 東北 庚戌火燒)’라고 되어 있다. 서봉사의 정확한 사명(寺名)이 ‘서봉사(瑞峯寺)’인지 ‘서봉사(瑞鳳寺)’인지 혼돈스러우나 절골이 위치한 산 이름이 서봉산(瑞峯山)이므로 후대에 와 소실과 중건을 반복하면서 절 이름이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절터를 에워싼 산봉우리, 솔숲과 대숲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 느껴진다는 것이다.
기록이 분명치 않아 절에 관한 사료를 찾기가 마땅치 않으나 점심을 먹으려 들린 ‘정곡가든’에서 그나마 실오라기 같은 반가운 소식을 듣는다. 송광사 천자암 활안스님이 서봉사의 복원에 관한 원력을 세운 모양인데, 그 모연문을 이곳 저곳에 돌린 것이다. 모연문에 의하면 서봉사는 고려 명종 때 황주서기와 충주판관을 지낸 이지명(李知命)이라는 사람이 창건하여 조선시대 철종 3년(1852)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되어있다. 사료의 출처가 모호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려우나 출가사문의 소명이 현존사찰의 대소가를 거느리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의 뒤안길에 주저앉은 망가진 가람의 끊긴 법맥의 대를 잇는 것도 의미가 있으므로 그 분의 목탁소리가 메아리 쳐 절골 안에 울리기를 기대한다.
서봉사지는 수 백년 된 버드나무가 마을의 연륜을 말해주는 마을 뒤 켠 분지에 담겨있다. 마치 대바구니에 가지런히 과실을 담은 형상이다. 적어도 수 십채의 전각이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면 그 향기는 유림(儒林)이 아니라도 군침을 삼켰을 만하다. 사실 담양 땅 광주호 일대는 이름난 정자와 원림(園林)이 즐비하다. 이름 하여 ‘정자문화권’의 고장이다. 16세기 무렵 조선 사회를 진동했던 사화의 와중에서 중앙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사대부들이 이 곳 고서면과 봉산면 그리고 남면 일대에 들어 면양정, 송강정, 명옥현, 식영정, 소쇄원, 독수정 등 정자와 별원을 짓고 은둔하였던 것이다. 숭유배불로 사고체계가 굳은 그들의 눈에 풍광 수려한 서봉산 암봉 아래 안개처럼 피어나는 절집의 향냄새는 그리 향기롭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7만여평 감나무 과수원으로 변질된 서봉사지는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겉만 보는 사람들의 시력으로 보면 그러할 뿐, 눈여겨보면 감나무 그늘마다 낙과 보다 무상하게 깨어진 자기 조각 등 절 터의 흔적들이 뒹군다. 성한 것이라고는 없다. 낙과는 비바람에 깨졌고, 유구들은 절망과 자해로 상처투성이다.
이것이 모두 무엇인가? 지난 번 태풍으로 계곡 곳곳이 패여 겨우 땅 속에 얼굴을 묻고 있던 석축이며 부재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빗방울이 살짝 건드렸어도 이 정도인데 제대로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면 서봉사지는 또 한번 이 땅의 폐사지 지도를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절 터 중심부에는 석등부재와 괘불지주 부재가 한가로이 장좌불와를 하고 있고, 자연그대로의 바윗돌을 이용해 만든 토굴이 있다. 바위 돌에 걸린 쪽문은 굳게 잠겼으나 그 형태로 보아 절이 살아있을 때는 큰스님께서 독차지하던 목 좋은 암자 노릇을 톡톡히 했을 듯 하다. 임자 없는 토굴 문턱 아래는 떨어진 은행알이 흩어진 염주알인 듯 흐르고 있다. 산비탈에서 들려오는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사문들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로 들린다.
모두다 어디로 갔는가? 계곡을 메운 대나무 줄기들은 무엇을 말하려는 듯 저희끼리 바짝바짝 다가서며 허리를 세우고 있다. 광주시의 상수원 구실을 하는 서봉사지 계곡은 그린벨트로 묶인 탓인지 청정한 기운이 감돈다. 계곡에는 쇠별꽃, 고마리, 바보여뀌, 오이풀이 군락을 이루고, 물뱀 한 마리 재빠르게 풀섶으로 꼬리를 감춘다. 개울물에 유영하는 버들치도 천적이 없는지 그 지느러미가 손바닥 크기만 하다.
서봉사지에 있던 성보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의 아픔을 곱씹고 있다. 삼층석탑과 석종형 부도는 도굴범에 의해 반출되려던 것을 되찾아 1969년 호남문화연구소에 의해 전남대 교정으로 옮겨 놓았고, 석조보살입상은 증심사로 이사를 갔다. 가문이 망가졌으니 그 권속들이 사방에 흩어져 애꿎은 장식품이 되어도 누구하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문화재를 그릇된 방법으로 빼돌리는 것만이 도굴이 아니라 지키지 못하는 것도 도굴이다. 대나무는 속을 비워 내고 그 절개와 충절을 담아낸다. 속을 텅 비운 대나무들이 눈 부릅뜨고 지키는 폐사지. 그곳이 바로 담양 땅 서봉사지인 것을….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무안 총지사지 편
서봉사지 가는길
서봉사지는 광주에서 동광주 IC로 진입하여 29번 국도로 좌회전. 남원 방향으로 직진하다가 소쇄원 방향으로 이어지는 887번 도로를 따라 5㎞ 정도 달리면 된다. 광주호 일대의 정자문화권인 식영정, 소쇄원 등을 지나면 담양읍 남면이 나오고, 서봉사지는 남면 석정리 마을 절골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