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집착하면 그게 업이 되고 그냥 뛰어넘으면 도입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문
지금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나라가 많이 위태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특히 국민들의 의식이 물질만능에 너무도 젖어서 카드 빚을 갚기 위해서 은행을 터는 주부가 생기기도 하고, 그토록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도 졸업 후 취직을 할 수 없어 해외로 이민을 가는 젊은이들이 생기는 등 아침에 일어나면 많은 문제들이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요즘 같은 시기가 바로 불법에서 말하는 오탁악세가 아닌가 생각이 들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비전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문제가 오늘 내일 일은 분명 아닐 터인데 어찌하여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요? 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을 위해서 자비의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답
우리나라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다른 나라처럼 기술이 요요합니까? 마음이 깨어서 삽니까? 정신세계를 추구하며 삽니까? 물질을 좇으면서 자기 분수에 맞춰서 살 줄 모르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정신세계는 언제 돌아다보겠습니까. 미래의 세계에서 본다면 지금 현실세계가 과거가 되고, 과거의 세계에서 본다면 정신세계가 미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세계와 정신세계가 둘이 아니요, 또는 과거와 현실이 둘이 아닌 까닭에 항상 마음으로 다스려 가면서 모든 거를 놓는다면, 크면 큰 대로 다스리고 작으면 작은 대로 다스려서 놓는다면 화목이 오지 않을 수 없고 조화를 이루어서 끝간 데 없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정신과학으로 이탈 없이 가려면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도 정신세계, 무심 도리를 알 수 있게 해야 하죠. 무심 도리를 배워야만 물질세계에 바로 내놓을 수 있는 힘이 생겨서 과학적인 문제를 첨단으로, 정신세계로 올려놓을 수 있는 나라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남들과 같이 눈 달리고 귀 달리고 코 달리고 입 달리고,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보다도 더 부지런하고 머리가 영리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왜 따라가지 못하느냐 하면 보고 들은 게 없기 때문입니다.
왜 보고 들은 게 없느냐. 예를 들어서, 남들이 자장면을 만들었다 합시다. 그런데 우리는 자장면을 만드는 것도 못 봤고 먹어 보지도 못했고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네들은 먼저 자장면을 연구해서 만들었고 먹어 봤습니다. 예전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인 박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당신이 말씀하듯 내 생산처가 여기 있습니다.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쥘 수도 없지만 내 생산처가 무궁무진하게 내 깊은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고 갑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그 핵심을 이렇게 여러 사람한테 불어넣어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남들은 그걸 믿지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러한 첨단의 무심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물론 말은 다르지만 그 뜻은 다 똑같았습니다. 벌써 그런 사람들은 자기 집에 주인이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그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맨날 빈집 단속하는 거죠. 빈집! 마음에 주인이 없다면 ‘네 마음이 그렇게 한마음으로 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면 내가 한마음으로 너의 마음속에 같이 밝게 할 수가 없다. 한마음이 될 수가 없다.’ 하는 거죠. 임제 스님이 “네가 주장자가 없다면 내 주장자를 주지 못할 것이고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줄 것이니라.”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네가 주장자가 없다면 빈집이 돼서 털구멍을 통하고 콧구멍을 통하고 눈구멍을 통해서 바로 세균성, 영계성, 귀신들, 도깨비 모두가 들락날락거려서 녹이 슬고 거미줄이 생기고 곰팡이가 슬고 그래서 그 집은 순간 망가질 수 있느니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가르쳐 드릴 때 여러분이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주인이 나한테 있다는 것을, 생산처가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빈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항상 신이 바깥에 있는 줄 알고 잘되게 해 달라고 바깥으로 찾는데 아무리 해 봐도 그건 허탕이에요. 공덕이 될 수가 없어요. 한마음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공덕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우리가 왜 이 세상에 나서 이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 흙을 파내도 흙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물도 말없이 흐르고, 봄이 오면 말없이 잎이 푸르르게 나오고 꽃이 피는가 하면 가을이 되어 저절로 낙엽이 져서 떨어지곤 하지요. 이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만 이 세상을 살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으로서 모든 것이 찰나에 돌아간다는 점을 여러분이 캐치해야만이 물질세계로부터 벗어나서 정신세계로 들 수 있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물질과학으로 첨단을 달린다고 하지만 정신세계로 첨단을 이루는 과학이 돼야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그대로 과학이니만큼 정신과학으로 첨단을 이룰 수 있어야만 되죠. 그러려면 우리 조그마한 인간의 씨가 우주를 싸고도 남음이 있고, 우주를 굴리고도 남음이 있고, 우주를 딛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대 능력자가 되고 대 자유인이 돼서 자력과 광력과 전력과 통신력을 자재로이 끌어서 연구할 수 있고, 그런 연구와 기술, 문화 문명을 꽃피우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 가지만 물리가 터진다면 바로 여러분의 몸과 가정을 이끌어 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정치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나 국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요?
문
평생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자던 사랑의 약속은 다 어디로 가고 서로를 배신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사랑보다는 자식들에 대한 의무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 아닌 현실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요? 영원한 사랑은 본래 없는 것인지요?
답
어느 때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자식 다섯을 낳아 놓고 부인이 그만 배신을 당했습니다. 같이 한 푼 두 푼 벌어서 철물점을 하게 되고 아주 부자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그만 남편이 이쁘고 나이 어린 여자를 얻어서 살게 됐습니다. 그래서 울고불고 그러기에 내가 그랬습니다. “진짜 사랑을 한다면 놔 줄 수 있지 않느냐. 남편이 오죽해서 그렇게 했겠느냐. 어려서 장가들어서 가난에 찌들고 그렇게 살았으니 당신하고 무슨 애정이 있겠느냐. 그러니 애정 한번 느끼면서 살아 보겠다는데, 그것을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누이동생으로서 한번 생각해 봐라.”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한다면 놔 줘라. 그리고 애들은 아버지가 있어야 되니까 들어오면 따뜻하게 말해 주고, 또 그것도 싫다면 그저 편안하게 해 줘라.”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이 부인은 내 말을 듣고 그 상황을 잊어버리고 살 양으로 조그맣게 장사를 하면서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랬는데 그 작은마누라가 재산을 다 거덜 나게 하고 죄 긁어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니 미안해서 죽겠거든요. 큰마누라에게 들어올 수도 없고 안 들어올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바깥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데 부인이 그랬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집에 들어와서 편안하게 자고 편안하게 먹고 편안하게 드나들면서 만날 사람 만나고 하시오. 애들의 아버지인 당신이 우리 가족의 하늘이고 기둥이고 주춧돌인데 만약에 당신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큰일나잖아요.” 그러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참, 당신은 사람도 아니오. 당신이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소.” 하면서 그때부터 마음을 잡아서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얼마나 세련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잘 사는 사람도 보았습니다만,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사람은 억울함이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일러 주면 스님이 하라는 대로 그렇게 했는데 안되더라고 그러거든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안되더라 이거예요. 그것은 인내가 필요한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진짜 사랑을 한다면 모두 다 주면 어떻습니까? 자기가 울지언정 상대를 울리지 않고, 내가 죽을지언정 그 사람을 죽이지 않고, 내가 괴로울지언정 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말입니다. 그것이 진짜 자비요 사랑입니다. 입 안에 붙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금방 만나면 “야! 너, 나 사랑해! 사랑해!” 하다가 며칠 안 가면 싸움을 하고 온통 야단이에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거는 도깨비장난을 하는 거지 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사랑은 자식이 물에 빠졌을 때 아무 조건도 없이 건지려고 뛰어드는 부모의 마음 같은 거죠. 그런 마음이 자비예요.
그래서 때로는 싱긋이 웃기도 하고 때로는 참, 뼈저린 눈물이 흐르기도 합니다. ‘다 줘 버리면 그뿐인 것을, 뭐 때문에 저렇게 울고 저렇게 애탄지탄 끈적끈적하게 애를 쓰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냥 ‘모두가 못나서 그러니까 다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다.’ 하고 옛날에 생각도 해 봤죠. 근데 그게 아니더군요. 없애야 되는 거는 바로 마음이죠. 그 요동치는 마음을 없애고 탁 놔 버리는 거예요. 이까짓 몸뚱이, 이까짓 고깃덩어리 한 철 사는 거,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듯 하는 거, 그거 가지고 한 철을 울고불고 왜 애를 써요? 그러니 편안하게들 사세요.
그러니까 한눈팔더라도 “여보, 당신이나 나나 인간으로 태어나서 뭐 그렇게 저거 했다고, 나가서 맛있는 것 먹고 그저 마음 편안하게 삶의 보람을 좀 잠시라도 느껴 보시오.” 이러고선 탁 줘 버리고 편안하게 있으면 좀 좋겠습니까. 조용하게 말이에요. 외려, 그냥 줄줄이 붙어 있는 거 다 떼버리고 편안하게 조용한 데 앉아 있으면 그 참,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을 거예요. 여러분은 붙어 있는 것만 좋은 줄 알지만 탁 털어 버리고선 훨훨 날아다닐 때가 여간 좋지 않은 거예요.
이 집 저 집 쳐다보면 집집마다 불빛이 찬란하게 별빛처럼 불이 비치는데, 아주 순탄하게 다 좋은 거 같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전부 그냥 이리 박히고 저리 박히고 그러질 않나, 사람이 죽었다고 울지를 않나, 온통 사랑한다고 끌어안고 야단들을 하지 않나, 그게 도대체….
여러분이 가정을 이루고 나가는 데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부드러운 말,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해 주고, 생활 속에서 어떠한 고통 받는 일이 있더라도 “야, 뭐 어쩌고저쩌고….” 이러면서 욕하지 마세요. 한생각이 그렇게 무서워서, 모진 욕 한마디가 상대에게 그냥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자긴들 좋겠습니까? 또 남편도 그렇고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 얼마나 오래 살 겁니까? 한 철인데. 욕을 먹든 매를 맞든, 나가서 바람을 피우든 어떻게 하든 말이에요. 사랑을 한다면 다 줘 버리지 그깟 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을 다 놓고, 들어오면 따뜻하게 웃고 대해 주고 속은 상하더라도 속상한 건 주인공한테 맡겨 놓고 ‘당신만이 저 사람의 마음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거기 놓을 때에, 그 주인공하고 내 주인공하고 둘이 아니니까 그렇게 돌아가게 됩니다.
누구든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대해 준다면 그곳으로 고이게 마련이고, 더운 여름에는 자리를 시원하게 해 준다면 시원한 데로 앉을 것이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회개를 할 겁니다. 그렇게 따뜻하게 행복을 갖다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하는 거죠. 그래서 사랑을 하려면 진짜 해야해요. 그냥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그렇게 사랑하는 거 말고요. 그런데 그것이 누구의 탓이 아니라 각자의 업보예요. 자기가 전자에 부인을 그렇게 속을 썩이고 울렸고 그랬기 때문에, 지금 현실에 안고 나오고 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지 누구 탓이 아니거든요. 자기 탓입니다, 모두. 그러니 남을 원망하고 그러지 마세요.
밖에서 찾지 않아야 하는 이유
문
스님의 법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언제나 나의 근본을 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속에는 수없이 많은 수행법들이 있는데 내 안으로 찾지 않는 많은 수행법들을 배우는 사람들은 나의 근본을 찾지 못하는 것이 되는지요? 밖에서 찾지 않고 오직 내 안에서만 찾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답
내가 이런 얘기 하나 할까요? 어느 부부가 산골에 살면서 삼 형제를 길렀어요. 그런데 막내는 아주 늦게 낳았죠. 옛날에야 지금처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랬으니까요. 늦게 생겨서 그거 낳아 놓고선 어린 것을 두고 부모가 고만 죽어 버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형들 둘만 있으니 형들이 사냥을 해다가 그걸 팔아서 먹고 살고 이러다가 형들마저 다 죽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보고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 할 수 없이 사냥을 나가서 토끼나 짐승들을 잡아다가 팔아서 연명을 하고 살았더랍니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가니까 사슴 두 마리가 그냥 붙어서 아주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저거라도 잡아서 갖다가 팔아야 입에 풀칠을 하겠다 싶고, 그래야만이 또 남한테 꾸어다가 먹은 쌀도 좀 갚겠다 싶어서 활로 그냥 쏘아 버렸단 말입니다. 새끼 두 마리가 비비고 놀다가 그냥 한 꼬챙이에 다 꽂혔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으러 가려고 막 나서는데 어미 사슴이 또 왔어요. 어미 사슴이 와서 그 새끼 사슴에 꽂힌 화살을 빼기 위해 그냥 발버둥이를 치는데 거기서 피가 그냥 콸콸콸콸 쏟아지거든요. 그러니까 어미 사슴이 막 그냥 엉엉 울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저 어른 사슴마저 잡으면 오늘은 수지가 맞겠다 싶어서 화살 하나를 또 겨냥하려고 그러는 순간 쏘지도 않았는데 그냥 어미가 쓰러져요. 참 이상스럽다 그러고는 거두어서 내려가 보니까 어미 사슴이 그냥 새끼 사슴을 안고 죽었어요. 그래서 아주 이상스럽다고만 생각을 했죠.
그래서 집으로 내려와 화살을 빼고, 그 어미가 왜 죽었나 보기 위해서 동네 여러 사람하고 배를 갈라 보니까 창자가 모두 동강동강 끊어졌어요. 그 동강동강 끊어져서 죽은 걸 보고 그때서야 그걸 안 거예요. 나이가 스무살도 안 됐지만 자기 어머니 생각이 난 거예요, 그때에. ‘아하! 이것도 역시 우리 엄마와 같구나.’ 어린 자기를 두고 엄마가 돌아가실 때 자기 손을 붙들고 눈을 감지 못하던 생각이 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때 그 사람은 돼지나 사슴이나 토끼나 다 엄마가 있고 부모가 있다는 생각을 했고 또, 사람이나 짐승들이 부모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또 부모가 되고 이러는 도리를 알았단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그거를 몰랐었거든요. 그 도리를 알고 나서 그거를 그냥 판 게 아니라 꼭 싸가지고 자기가 짊어지고 가서 그 잡은 자리에다가 묻어 줬어요. 묻어 주고 그때서부터 집도 버리고 다 버리고 절로 들어갔어요.
절로 들어갔는데 스님이 “뭘 하러 왔느냐?” 하니까 “제가 이런 경험을 해 보니까 덧없이 살기는 정말이지 싫습니다.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하고 먹을 것도 주저로운 데다가 더욱이 인제는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미 사슴이 그렇게 죽은 것을 보니까 내 마음에 변화가 와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여길 왔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그것을 아느냐?” “뭘 말입니까?” “네가 공부하면 저절로 알게 되느니라. 그 어미 사슴이 누구였는지, 그 새끼 사슴이 누구였는지 네가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거든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 정진을 한 겁니다. 그것을 빨리 일러 줬으면 공부도 못했을 거예요, 아마. 하여튼 지금으로 치면 한마음의 도리, 나 자체 있기 이전을 찾으려고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하루는 그 은사 스님께서 “얘야! 저기 흘러가는 물 좀 봐라. 물이 틈이 있느냐 없느냐? 세상이 틈이 있느냐 없느냐? 네가 지금 돌아가고 있는 것, 공양 짓고 나무 해 오고 앉고 서고 눕고 하는 게 모두 틈이 있느냐 없느냐?” 그 세 가지를 물었단 말입니다. 가만히 대답도 못하고 있다가 “틈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습니다.” 그랬거든요. “그러면 어떠한 것이냐?” 하니까 아무 소리도 않고 일어나서 삼 배를 올리고 딱! 딱! 딱! 손뼉을 세 번을 치더니만 탁 꿇고 앉았거든요. “인제는 그 사슴이 누군 줄 알았느냐?” “예, 전자에 제 어머님이요, 제 형님 두 분입니다.” 하고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가 이렇게 어머니인 줄 알고 형님인 줄 알았지만 형님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줄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수행하면서 조상들의 마음을 둘 아니게 한자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상 할아버지서부터 모든 분들이 산골에서 쭉 아무것도 모르고 그 많은 짐승들을 살생하고 내려왔는데, 그것을 한마음으로 놓으면 할아버지의 마음도 내 마음이고 아버지의 마음도 내 마음이고 형제들의 마음도 내 마음인 그 마음은 체가 없으니 내 물 한 그릇에다 물방울을 수만 개를 넣은들 어찌 한 그릇이 아니오리까. 그러니 이것을 이름해서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하더랍니다.
그런데 자기 있기 이전을 찾으라고 그러면 여러분은 바깥에서 찾는 겁니다. 나 있기 이전이 바깥에 있습디까? 여러분이 생각해 봐요. 여러가지 씨를 갖다 심으니까 참외가 나오고 오이도 나오고 수박도 나오고 죄 나왔어요. 그런데 수박씨든 참외씨든 무씨든 홀딱 그 껍데기는 벗어지고 알맹이가 싹이 돼서 나오지 않습디까? 그러니 싹이 돼서 나와서 한 철 사는 겁니다. 그게 한 철이에요. 한 철 그 과정을 겪으면서 자라서 열매가 열려서 열매가 그 나무에서 무르익어요. 무르익어 가지고 씨가 거기 들어 있어요. 작년에 있던 씨가 그 속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씨가 그 속에 들어 있으니 그 속에서 찾아야 될 텐데, 이건 땅에 심었다고 바깥에서 그걸 찾는다 이거예요.
누구든지 바깥에서 각각 찾는데, 여러분에게 구비돼 있는 마음이라는 거, 보는 거 듣는 거 먹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전부 여러분한테 구비가 돼 있지 바깥에 있습니까?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걸 알아야죠. 내가 있기 때문에 부처도 있고 우주도 있다는 걸 알아야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체가, 내가 나오기 이전의 씨가 내 속에 들었다 이거예요. 내 속에 들어 있고 씨도 그렇게 들어 있는데 아니, 참외씨를 심으면 참외 싹이 나지요. 참외 싹이 나고 참외가 열리지 다른 게 날 수 있나요.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거지요.
그 속에 들어 있는데도, 이것이 거죽은 노랗고 속은 하얗고 뭐, 물렁물렁하고 씨가 들어 있다는 둥, 여러분은 매일 이론으로만 듣고 실천에 옮길 줄 몰라요.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할 줄을 모르고 만날 이론이에요, 이론! 그러고 이론으로 하다 보니까 망상이 생기고 망상이 생기니까 놓을 줄도 모르고 놓을 줄 모르니까 만날 바깥에서 찾는 겁니다, 네? 제 씨는 제가 갖고 있으면서도 바깥에서 제 씨를 찾느라고 온통 헤매는 거지요. 10년이 되든 20년이 되든 30년이 되든 온통 바깥에서 찾아요. 이럴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미거하더라도 이럴 수가 있느냐 이거예요. 그래도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타고난 사람인데, 99%가 부처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인데 어찌 그럴까 이거지요, 네? 사람 되기 이전에 얼마나 쫓기고 쫓기면서 미생물에서부터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얼마나 그 시련을 겪었느냐 이거지요. 그렇게 겪으면서 경험을 얻고, 겪으면서 지혜를 넓히고, 겪으면서 좋고 나쁜 걸 알게 되고 이러면서 인간까지 됐는데도 불구하고, 또 오르락내리락하고 윤회에 말려 끄달리면서 쳇바퀴 돌아가듯 끝없이 그 고통을 받아야 되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잘되고 못되고를 떠나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거를 주인공에다 맡겨 놓고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다. 주인공만이 낫게 해 줄 수 있다.’ 하고 입력을 해야 합니다. 내가 엎드러지면 내가 일어나듯이, 나한테서 병난 거는 나한테서밖엔 해결할 수 없듯이, ‘내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맡겨 놓아야 합니다.
습을 떼어야 하는 이유?
문
지금까지 해 온 습을 떼는 게 업을 녹이는 게 되는 것인지요? 남을 미워하는 습, 남이 미워서 험담을 하는 습, 자식에게 지나치게 착을 갖고 공부하라 재촉하는 습 이런 거 말입니다. 이런 습을 뗐을 때 과연 자유롭게 살 수 있는지요?
답
우리가 공부를 하다 보면 공부라는 게 무슨 별달리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탄생해서 이 세상에 나와서 사는 게 공부예요. 생명이 이 세상에 나오면 불(佛)이요, 나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배우는 것이 바로 교(敎)예요. 그러니까 불교가 별다른 게 아니죠. 우리들의 살림살이를 빼놓고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간편하게 생각하세요. 내가 움죽거리고 그러는 것이 다 공부예요. 참선이구요.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면 그냥 참선이 되고, 누워서 하면 와선이고, 앉으면은 그대로 좌선이 되구요. 그대로입니다. 일을 하다가 생각을 하면 행선이 되니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조심하시라고 하는 것은, 극히 더 우리가 나쁘다 좋다, 밉다 곱다 또는 잘한다 못한다 이런 거를 염두에 두고서 항상 꼬집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업(業)이 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말을 하면 구업(口業)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것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럭하면 안되죠. 밉다 곱다 하질 말고 안에다가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을, 저게 저 사람이 미운 게 아니니까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맡기고 부드럽게 말하고, 부드럽게 행동해 줘라 이런 말을 항상 하죠. 그래야만이 그 모든 업이 녹아 버린다는 얘기죠.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어느 신도가 남편이 술을 마시는데 간절하게 믿고 자꾸 관하고, 부드럽게 말해 주고 부드러운 행동을 해 주니까 어느 날부터 술도 안 마시게 되니 가정이 화목하게 돌아가더랍니다. 그런데 그냥 악하게 말을 하게 되면 점점 더 악은 모아지는 겁니다.
그러니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만 안 한다면 송두리째 없어지게 됩니다. 길고 짧고 더디고 느리고 하는 거는 있을지언정 그게 없어집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얘기하듯이, 녹음기에 자동녹음이 됐는데 자동으로 또 거기다 입력을 하면 앞서 입력이 없어지겠죠. 그러니까 잘라도 아니 되고, 끊어도 아니 됩니다. 칼로 물 베기죠. 그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렇게 해서 없애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아주 우리가 공부해 가면서 습을 떼어 가면서 모든 것을 같이 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이 모습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이 모습을 가지고 살려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얼마 기간 동안에, 한 철 사는 기간 동안에 그것을 다 다스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다음에 또 나와서 고생을 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극히 조심하셔서 우리가 요다음 생에 또 나와서 고생한다는 거보담도, 지금 현실에 자기 위로는 부모와 아래로는 자식들이 항상 염주알이 같이 꿰여 있듯이 그렇게 꿰여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네들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빨리 성취를 해야 빨리 그네들도 따라서 성취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모습을 가지고 언제까지 살겠습니까? 한 철입니다, 한 철! 캠핑 왔다가 한 철 놀다 가는 한 철입니다. 그런데 편안하게 웃고 살아야지, 왜 그렇게 울며 아프며 복장을 찧으며 이러고 살아야 합니까?
하여튼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살아가는 게 말입니다.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그러지만 그게 아니죠. 내가 콩씨 얘기를 가끔 허죠. 무씨 얘기도 하고요. 싹이 없어지면 고만이지 이러지마는 그 종자가 있으니까 또 심어서 또 나오거든요. 그러니 고만이 어디 있습니까? 영원토록 돌아가는대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콩씨가 팥씨가 될 수도 있고, 팥씨가 콩씨가 될 수도 있고, 또 아주 참 상승의 사람이 사람의 종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냥 하의 종자가 될 수도 있는 거죠. 이런 자유자재권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아시고 열심히 놓는 작업을 해나가세요.
죄가 많은 데 깨달을 수 있는지?
문
죄와 업이 이토록 많은데, 저 같은 사람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요?
답
여러분이 과거에 살아나온 것을 생각하면서 ‘양심이 허락지 않아. 내가 잘못한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데 내가 무슨 도를 이루랴!’ 이러지 마시고, 나쁜 것 좋은 것이 다 한군데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지금부터라고 열심히 공부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됩니다. 그러니까 한군데다가 그냥 양면을 다 놓으시고 가는 거예요. 그대로 우리가 지금 현실에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붙잡고 늘어지는 거예요, 그걸! 본래 놓고 가고, 본래 자기 자신이 바로 자불인데, 자불이 자기를 형성시켜서 이렇게 고등 동물로서 쓰고 단 거를 알게끔 형성시켰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쁜 거 좋은 것이 반반 섞여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해와 달이 뜨듯이,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되듯, 건강하고 건강치 않고, 잘되고 잘못되고, 길고 짧고 넓고 좁고, 이런 게 모두가 그냥 그렇게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진행하고 있으니 거기에 겁내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그냥 자기가 봐서 ‘이걸 이렇게 해야겠다’ 하면 누구한테 묻지 마시고 거기다가 물으시고 거기다가 놓으세요. 그러곤 그냥 해나가는 것이 정법이에요.
그렇듯이 그냥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왜 붙잡으세요? 마음으로 어저께 걱정 내일 걱정, 이렇게 만날 하고 지내니까 ‘태어나면 고(苦)다’ 이런 말을 하는 거죠. 태어나도 태어난 사이가 없단 얘기예요. 왜냐? 보이는 데서 심부름 하게끔 자기 몸을 자기가 형성시켜 놓은 거기 때문에 그냥 공체란 말입니다. 공체! 내 몸속에도 생명들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인연을 이어서, 청법가에 ‘새 인연을 이어서’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과거도 없다. 왜냐하면 지나갔으니까. 현재로 이어진 거예요. 그럼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현재로 이어진 거구요.
그러니까 현재에 모두 우리가 공했으니까, 함이 없이 하는 거니깐 걱정하지 말라 이겁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을 하지 말고 그냥 ‘이것도 그 자리에서 하는 거니깐 그 자리에서 알아서 해라. 죽이든지 살리든지 너 알아서 해라.’ 하고 거기다 놓고는 부지런히 심부름만 하면 돼요. 물에 떠내려가든지 섰든지, 하여간에 말입니다. 한계가 있는 몸뚱이는 언제든지 죽습니다. 영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실질적인 자기의 자신은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토록 이끌어 줄 수 있는 보배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재차 얘기하지만, 내 불성은 본래 영원하다, 내 부처는. 본래 이 세상 돌아가는 거는 크다 작다가 없다. 왜냐?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듯 하니까. 나쁜 거든 좋은 거든 바람처럼 나가 버리니까요. 그런데 자기 양심이니 뭐니 찾고선 거기다가 부착을 시키니까 이거는 외려 사람의 마음이 낙오가 되고 의욕이 없어지고 걸음이 잘 떼어지질 않아요. 그냥 나쁘든 좋든 싹싹 쓸어버려야죠. 본래 진리라는 게 싹싹 쓸고 가는 거예요. 거기 남는 게 뭐 있습니까. 마음은 체가 없어서 한 자체가 없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폐가 있다고 하겠지만, 최상승에 이르려면 그렇게 하세요. 잘못하고 잘한다는 양면을 다 놔라. 본래 진리가 양면을 놓고 가는 거다 이런 겁니다. 본래 양면을 놓고 가고 본래 고정된 게 없이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면서, 보는 것도 나툼이요, 바로 듣는 것도 나툼이요, 찰나찰나 나툼이고 찰나찰나 함이 없이 하는 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법도 없고 공도 없고 다 없다’ 하는 뜻은 뭐냐? 여러분은 과거를 생각하고선 그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에 있었던 거를 걱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걸 걱정을 하고 이럽니다. 우리가 과거를 생각하면서 살아온 집착, 관습, 욕심, 그 모든 게 부착이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는 그것이, 그대로 일체 만법이 다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그게 업이 되고 과거를 생각지 않고 그냥 뛰어넘으면 업이 아니라 도입니다.
그러니깐 과거는 묻지 마라, 이런 소립니다. 과거를 묻지 말고 우리가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놓는데 뒷발자국이 자꾸 없어진다는 거를 알면, 내가 항상 그런 말을 하죠. 보는 거 듣는 거 말하는 거 만나는 거, 가고 오는 거, 모두가 함이 없이 하는 거니까 거기에 집착을 두지 말고, 고난을 고(苦)라고 생각하지 마시라고요, 지나간 거니깐. 그렇게 모두가 공해서 그렇게 돌아가는데 내가 ‘어저께 참 몹시 잘못했는데….’ 이렇게 하더라도 벌써 한 발짝 떼어 놓고 두 발짝 떼어 놓은 셈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떼어 놓은 거니깐 잘못한 것도 거기서 한 거고 잘한 것도 거기서 한 거니까 그냥 무효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돌아가면 그냥 컴퓨터에서 지워지면서 바로 그 마음이 그냥 입력이 되는 거죠. 그러니깐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그 99%가 정말 고등 동물이라는 데서 오는 거죠. 그러니깐 우리가 산다 죽는다도, 내일 죽더라도 걱정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왜냐? 자기를 형성시킨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심부름꾼이 뭘 그렇게 생각을 할 게 있습니까? 한 발짝 떼어 놓고 없어지고 한 발짝 떼어 놓고 없어진다는 것만 잘 아시면 나쁜 것도 법이고 좋은 것도 법이고, 잘못하는 것도 법이고 잘하는 것도 법입니다. 그러니까 그 양면을 다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도입니다. 그런데 양면을 다 놓으려면 과거에 잘못한 것도 자기가 놔야지, 본래 진리라는 것은 놓고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놓고 가는 걸 붙들고 괜히 애를 쓰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