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시대 ‘일승도’ ‘일행도’로 표현
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란 표현은 일승도(一乘道)란 용어를 풀이한 것이다. 일승(一乘)이란 <법화경>에서 사용하여 유명해졌지만 본래는 초기불교 이래 사용되고 있었다. 초기불교시대에는 일승도 혹은 일행도(一行道)란 말을 사용했으며, 일승도 보다는 일행도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다. 이 말의 원어는 에카야나 마가(ekayana-magga)이며, ‘yana’를 수레로 번역하면 수레 승(乘)이란 글자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yana라는 말에는 어딘가를 향해 간다는 의미가 있기에 행(行)이나 취(趣)라 번역하기도 한다. ‘magga’라는 말은 길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일승도나 일행도는 수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길을 의미한다. 즉 죽은 사람이 해탈이나 열반을 향해 가야 바람직한 일이 된다는 점을 암유(暗喩)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이상과 같은 의미를 <법화경>은 유일한 수레라 재해석한다. 대승 중에서도 이것 이외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일한 길인가? <법화경>에선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법화행자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이념적으로 이성과 감성에 동시에 호소하고 있다. 보다 적극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교리만 가지고는 힘들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합리성과 논리적 정합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인간사를 겪으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치유해줄 방책을 필요로 했다. 그런 점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쉬운 수행 방법, 부처님의 설법이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법화경>은 당시의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실상(實相)이니 일불승이니 하는 고상한 가르침도 있지만 부처님의 덕을 찬송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초기불교시대는 상황이 달랐다. 초기불교 교리는 매우 이론적이며, 합리성을 추구한다. 모든 것은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일행도 내지 일승도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일승도가 있어서 여러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 슬픔을 초월하여 번뇌와 불만을 없애게 한다. 이른바 4념처이다”(<잡아함경>권24). “유정의 정화, 근심과 슬픔의 초월, 불만과 번뇌의 소멸, 이법에 대한 통달, 그리고 열반의 증득을 위해 이 일승이 있으니 바로 4념처이다”(<남전대장경>9).
이상에서 중요한 정보는 일승도 혹은 일행도가 다름 아닌 4념처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 4념처관을 수행하면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생노병사 우비고뇌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4념처관을 닦으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승도 혹은 일행도라 정의한다.
이상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일승도를 닦으면 윤회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인도 전통사회에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삶의 질곡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미움과 저주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세상, 눈물과 웃음이 점철되어 인간의 한 평생을 수놓게 되는 실존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도인들은 그래서 계급모순과 빈부의 차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을 초월하는 길은 수행밖에 없다고 믿어왔다.
불교도 같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가지 가지 번뇌를 끊고, 각종의 생사를 소진하면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 “나의 생은 이미 다했다. 청정한 행이 이미 반듯하게 섰으며, 할일을 이미 했다. 스스로 후유를 받지 않는다고 안다”. 이것은 모두 <잡아함경>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후유는 뒷날의 존재란 의미이며, 여기서는 윤회하여 받게 되는 삶을 지칭한다.
일행도가 4념처관을 닦는 것이라면 바로 관법을 통해 몸은 청정하지 않으며, 우리들의 감각은 만족할 줄 모르며, 우리들의 마음은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존재들은 고정불변의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실천궁행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현실을 직시하며, 그것들을 그런 줄 알고 대처하고 운용하는 지혜를 지니게 된다고 본다.
일행도에 대해 어떤 경전들은 37조도품을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4념처관은 37조도품을 대표하는 관법으로 지칭된 것이다. 37조도품이란 4념처, 4의단, 4선, 5근, 5력, 7각지,8정도를 말한다. 결국 이들을 수행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