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역사 속의 기적이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국력이 열세이고, 지역도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강대국이었고, 백제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할 만큼 국제적 역량을 갖춘 나라였다. 그러나 정작 삼국을 통일한 나라는 외형상 가장 허약한 신라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의외의 결과에 의문을 갖고 저마다 그 이유를 찾고 있다. 김춘추의 뛰어난 외교가 상징하듯이 국제정세를 읽고 이에 대처하는 신라인들의 능력이 그 원인이라고 보기도 하고, 신라의 통치조직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견실한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또한 신라의 통치세력이 백성들과 밀착되어 있는 점이 삼국통일의 원동력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던 간에 통일을 성취한 자신감은 불상에서 권위적인 그 무엇으로 나타났다. 삼국시대 불상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이미지에서 위엄과 권위로 지배하는 이미지로 옮겨가고 있다. 군위삼존불이 바로 통일 직후의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른 예이다. 본존불은 묵직한 체구에 표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이다. 인간적인 부드러움과 친근함보다는 종교적인 권위가 강조된 것이다. 중국 수나라 불상의 위엄 있는 양식이 이러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한 몫을 거들었다. 다만 양쪽의 보살들에는 부드러운 인상인데, 이는 삼국시대의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권위와 종전의 부드러움이 함께 공존한 모습이 신라가 통일되면서 불상에 나타난 특징이다.
신라가 통일한 뒤 주력해야 할 역사적 과제는 고구려와 백제를 어떻게 신라와 화합하느냐에 있다. 이와 더불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내부적인 갈등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그의 맏아들인 신문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취임한 첫해에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세력이 반란을 일으켜서 진압하였다. 문무왕 때부터 진골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책이 신문왕 때 갈등이 불거진 것이다. 이러한 왕권강화 정책 속에서 신문왕이 탈출구로 삼은 것이 달구벌, 즉 대구로의 천도이다. 7백여 년을 수도로 지켜왔던 경주를 떠나 대구로 옮기려 했으니, 그 정치적 상황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신문왕 때의 기사가 “689년 왕이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다가 실현하지 못하였다”고 실증하듯이, 천도를 하지 못한 것이다.
통일신라 불상의 새로운 특징인 권위적인 이미지가 경주가 아닌 대구 팔공산 자락의 군위삼존불에 처음 나타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근엄한 형상 속에서 우러나는 경외심을 통하여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종교적인 목적이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인 의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