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완성위해 함께 구르는 두바퀴
균형감각 유지하며 실천 뒤따라야
요즘 시민들은 무엇인가 허전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회의 혼란에서 오는 실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때는 황소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전진하는 것이 최상이다. 세상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만큼 믿음이 필요하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잡아함경>제22에 나오는 게송에 이런 찬송이 있다. “믿음은 모든 시내를 건너게 하고/ 게으르지 않음은 넓은 바다를 건너게 하며/ 정진으로 모든 고통을 버리고/ 지혜로 맑고 깨끗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시내는 윤회를 의미하며, 바다는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정진이란 부단한 수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믿음을 바탕으로 무상, 고, 무아를 자기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수행은 법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열반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을 <중아함경>제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만하지 않은 것이 감로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 교만이 없으면 죽음이 없으나/ 교만이란 곧 수행자의 죽음이다.”
교만이란 믿음이 결여된 상태요, 정진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교만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교만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적이다. 아직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며, 탐욕과 분노가 서려 있는 마음이다. 남을 능멸하며, 남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이며, 남과의 경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는 마음이다. 그렇기에 그 마음에는 사랑이 없다. 연민도 없다. 남을 포용할 줄 모르며,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다.
교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정진뿐이다. 이 경우 정진이란 법답게 수행하는 것이며, 가르침대로 살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그 결과 교만한 마음이 세련된 마음으로 바뀌며, 맑고 향기로운 마음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게 되며,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비와 인욕과 포용은 여기서 가능해 진다. 그렇기에 ‘교만하지 않음이 감로의 길’이라 가르친 것이다. 감로란 단 이슬이란 의미이지만 이것은 범어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감로를 의미하는 범어는 죽지 않는다는 의미(不死)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단 이슬과 죽지 않음은 하나의 단어로 표기되면서 필요에 따라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중아함경>에 나오는 게송에선 죽지 않는 것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교만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 길에 들어간다는 의미를 전달해 주게 되기 때문이다. 정진 즉 부단한 수행을 통해 열반을 얻게 되기 때문에 이상과 같은 찬송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성적으로 말하자면 믿음은 유용하고 사실적인 직접 증거로 증명되지 않는 교리들에 찬성하는 것이다. 지성이 믿음의 문제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알고 있는 사실들을 초월해야 한다. 사실적인 것들을 초월하지만 믿는 자는 믿고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태도로서 기꺼이 그의 지식의 틈을 메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성적인 태도 때문에 믿음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주로 의심과 당혹감이다.
불교에서 믿음은 단지 예비적 즉 임시적인 단계로 간주한다. 믿는 사이에 직접 발생하게 되는 정신적인 자각이며, 알고자 했던 것을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믿음은 정진이라는 이름의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의 덕이 사물의 진실한 본성에 대해 강한 통찰력을 유지할 수 있는 만큼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믿음이 없으면 정신적인 통찰이라는 식물이 싹을 틔울 수 없다. 그래서 믿음을 씨앗에 비유한다. 요즘과 같은 회의적이고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신앙이 지니고 있는 지성적인 면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믿음이든 신앙이든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지성 보다는 마음에 더욱 밀착되어 있다. 따라서 믿음이란 ‘주어진 관념에 마음의 힘을 집중하여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덕은 자기수련에 의해 강화되고 증진되는 것이지 각자가 지닌 신념을 토론해서 증진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감한 결단력이자 자기 확신의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틀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후회하기 보단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언제나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정진은 각각 따로 굴러가는 바퀴가 아니라 상호의존 속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다. 불교적 가치가 너무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세상의 평화를 위해 필요한 가르침이며, 반면에 그 가치가 실현되지 않는 것은 믿음과 정진에 근거한 우리들의 실천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