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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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진화, 그리고 수용
현대 생물학에서는 이미 유전자 수준에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진화론이고, 진화론이란 간단히 말하여 너(환경)와 나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같이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반드시 우리가 생각하듯 최선의 모양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지닌 특정 조건 속에서 비교적 안정된 형태로 진행될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생물체의 진화는 최적의 모양이라는 우리의 관념적 기준이나 결과론적 입장과는 전혀 무관하게 스스로의 흐름 속에서 빚어진다는 점이다. 불자라면 굳이 생물학자의 설명이 없더라도 이러한 부분이 부처님의 말씀과 그리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창조론을 이야기 하는 이웃 종교에 대해서 불자들도 많은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 유일신의 창조론에 익숙한 분들은 진화론뿐만 아니라 불교적 관점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생명과학을 하는 불자의 입장에서 볼 때 창조론에 익숙한 사람이나 혹은 불교적 입장에 익숙한 사람들이나 상대에 대한 피상적 지식만 지니고 제대로 된 이해는 없이 열렬하게 반대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런데 과연 창조론과 소위 다양한 우리의 모습이 한물건, 한마음으로부터 비롯되어 고정된 실체 없이 변화해 간다는 불교적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우리가 각각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진리, 생명, 법(法), 불성(佛性), 한마음(一心), 한물건, 하나님, 여호와, 길(道) 등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삼라만상의 근원, 바탕과 이로부터 비롯된 생명체의 관계를 어느 위치에서 표현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본다. 생명, 신의 입장에서 표현한다면 생명체는 창조되어진 것이고 생명체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생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뿐이다.
불교나 다른 대부분의 종교도 비록 각자의 고유한 단어로 표현할지는 몰라도 진리나 법, 생명 이외의 방법으로 진정한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 우리들의 육신이라는 것도 단지 흙이나 사대(四大)라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종교란 긴 시간 동안 역사적, 문화적 축적의 모양을 지니고 있기에 비록 가르치는 궁극적 가르침은 같아도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이나 관점에 있어서 많은 다른 점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달이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기에 어느 종교이건 그 가르침만 제대로 알아들어 자기 삶의 변화가 올 수 있다면 결코 다른 종교의 외적 모양이나 그 특정 종교의 종교인들의 모습만으로 서로를 비방하거나 수용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이해나 공감을 통한 수용이란 것은 결국 나의 아상(我相)에 맞는 것만 수용한다는 것이기에 진정한 불제자라면 종교나 학문적 관점을 떠나 너와 나는 이대로 온전한 것임을 받아들여 똑같이 평등하게 차별하지 않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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