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장소 가리지 않는 보살행 강조
세간 관찰하는 삼매 성취해야 중생교화
선재동자가 다음으로 찾아간 선지식은 남쪽의 무량도살라(無量都薩羅)라고 하는 큰 성에 있는 변행(遍行)이라고 하는 출가한 외도이다. 변행 외도에게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는 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모든 곳에 이르는 보살의 행에 편안히 머물렀고, 세간을 두루 관찰하는 삼매의 문을 성취하였으며, 의지한 데 없고 지음이 없는 신통의 힘을 성취하였고, 넓은 문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였다.
나는 넓은 세간에서 갖가지 방소(方所)와 갖가지 형상과 갖가지 행과 이해로 온갖 길에 나고 죽나니 이른바 하늘 길, 용의 길, 야차의 길과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지옥, 축생의 길이며, 염라왕 세계와 사람과 사람 아닌 이들의 모든 길이다. 여러 가지 소견에 빠지고 이승(二乘)을 믿고 대승을 좋아하는 이런 중생들 가운데서 나는 갖가지 방편과 갖가지 지혜의 문으로 이익되게 한다. 이른바 모든 세간의 갖가지 기술을 연설하여 온갖 공교한 기술다라니지혜를 갖추게 하며, 네 가지로 거두어 주는 방편(四攝法)을 말하여 온갖 지혜의 길을 구족하게 하기도 한다. 모든 바라밀다를 말하여 온갖 지혜의 지위로 회향케 하기도 하며, 보리심을 칭찬하여 위없는 도의 뜻을 잃지 않게도 하며, 보살의 행을 칭찬하여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소원을 만족하게도 한다. 나쁜 짓을 하면 지옥 따위에 빠져 여러 가지 고통받는 일을 말하여 나쁜 업을 싫어하게도 하며, 부처님께 공양하고 착한 뿌리를 심으면 온갖 지혜의 과보를 얻는다 말하여 환희한 마음을 내게도 한다. 모든 여래, 응공, 정등각의 공덕을 찬탄하여 부처님의 몸을 좋아하고 온갖 지혜를 구하게도 하며, 부처님의 위엄과 공덕을 찬탄하여 부처님의 무너지지 않는 몸을 좋아하게도 하며, 부처님의 자유자재한 몸을 찬탄하여 여래의 가릴 수 없는 큰 위덕의 몸을 구하게도 한다.
선남자여, 이 도살라성 중의 여러 곳에 있는 여러 종류의 남녀들 가운데서 나는 갖가지 방편으로 그들의 형상과 같이 모습을 나타내고 그들에게 알맞게 법을 말하지만, 그 중생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사실대로 수행하게 한다. 선남자여, 이 성에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처럼 염부제의 여러 성중과 도시와 마을의 사람이 사는 곳에서도 이와 같이 이익되게 하노라.
선남자여, 염부제에 있는 96종 외도들이 제각기 야릇한 소견으로 고집을 세우면 나는 그 가운데서 방편으로 조복시켜 모든 잘못된 소견을 버리게 하며 염부제에서와 같이 다른 사천하에서도 그렇게 한다. 이와 같이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의 중생바다에서도 중생의 마음을 따라서 갖가지 방편ㆍ갖가지 법문ㆍ갖가지 몸ㆍ갖가지 말로써 법을 말하여 이익되게 한다.
선남자여, 나는 다만 이 모든 곳에 이르는 보살의 행만을 알 뿐이다.”
이와 같이 변행 외도가 설하고 있는 법문은 ‘모든 곳에 이르는 보살의 행’에 관한 것이다. 그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모든 방향과 장소로 가서 가지가지의 형상과 행(行)을 나타내 보인다. 그의 이름이 변행(遍行)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세계로 널리 나아가 중생들을 갖가지 방법으로 교화하고 이롭게 하여 그들을 한없이 기쁘고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변행 외도가 살고 있는 성의 명칭이 ‘무량도살라(도살라: 기쁨의 출생)’이다.
변행 외도가 ‘모든 곳에 이르는 보살의 행’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세간을 두루 관찰하는 삼매(普觀三昧)를 터득하고 의지함이 없고 지음이 없는(無依無作)신통력을 성취하여 보문(普門)의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구애됨이나 사로잡힘이 없이 세간의 일체를 바르게 관찰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시방세계 중생들의 마음을 따라서 갖가지 방편, 법문, 형상, 말 등으로써 법을 설하여 그들을 이익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보살도는 불교라고 하는 특정의 이념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릇된 삶을 깨우쳐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요체(要諦)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모습이나 형식, 색깔 등을 내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변행외도가 외도(外道)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무수한 세계의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외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는 분명 불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를 내세우고,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무수한 비행들을 돌이켜 볼 때에 변행 외도의 삶은 종교인의 삶의 올바른 지평을 제시해준다고 할 수 있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