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팔공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귀에 솔깃한 표지판이 눈에 띈다. “제2의 석굴암”. 국보 제109호 지정된 군위삼존불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누가 이 말을 붙였는지는 모르지만, 매우 적절치 못한 표현이다. 아마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이 워낙 유명하니까 그 유명세에 기대어 군위삼존불을 드높이려는 의도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불상을 석굴암과 비교하면 또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군위삼존불은 7세기말에 조성되고 석굴암은 751년에 건립되었으니, 군위삼존불이 석굴암보다 약 60여년 앞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앞의 방식대로 군위삼존불을 표현하자면, “제2의 석굴암”이 아니고 오히려 “제1의 석굴암”이다. 더욱이 석굴암은 자연 암반을 뚫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돌을 쌓아 만든 석굴이다. 석굴사원이 인도에서 살인적인 더위를 피해 산 중턱의 석굴에서 예배를 하면서 시작하게 된 원래의 취지를 염두에 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석굴사원은 군위삼존불이다. 따라서 군위삼존불을 정확히 평가하자면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석굴사원이자 본격적인 석굴사원”인 것이다.
팔공산 봉우리중의 하나인 가산에서 군위 쪽으로 내려온 산줄기는 거대한 암벽을 드러내 보이면서 멈춰 섰고, 그 앞에는 계곡의 물이 흐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곳만큼 석굴사원을 조성하기 좋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도 드물다. 돈황막고굴, 유림굴, 병령사석굴, 맥적산석굴, 용문석굴 등 중국의 여러 석굴사원들로 이처럼 거대한 암반과 충분한 물을 갖춘 곳에 조성되었다. 역시 신라인들은 이곳을 놓치지 않았다. 웅장한 절벽에 동그랗게 굴을 뚫어 아미타삼존불을 모신 것이다. 그런데 중국 석굴사원에 익숙한 감각으로 보면 생경하게 느껴진다. 바위의 크기에 비하여 석굴의 크기가 작고, 수많은 굴들이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것이 아니고 단 하나만 뚫은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은 실크로드의 석굴사원처럼 국제적인 교역이 활발했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 실크로드의 석굴사원들은 상인들이 머물면서 사업의 번창과 안전을 기원했던 곳이다. 아무튼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중국으로 이어진 석굴사원의 열풍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드디어 팔공산 자락에서 아시아 석굴사원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군위삼존불은 나름대로 엄연한 역사적 의의와 가치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의 석굴암”이라는 잘못된 평가로 일반인들을 호도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군위삼존불에 대한 명예훼손이고 역사에 대한 왜곡이다. 군위삼존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해야 할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