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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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다 부처와 둘 아닌 줄 알아야
평생을 산다 하더라도 한 철 나날이 살아가는 게 한 찰나생활

마음공부 바르게 하는 방법

스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는 마음공부를 꼭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인지요?

옛날에 어느 부부가 바닷가에서 살면서 외동딸 하나 낳아 놓고서는 애지중지 기르면서 절에를 열심히 다니면서 살았습니다. 그 아이를 위하고 가정을 위해서 말입니다. 누구든 다 그랬겠죠. 그 어머니가 절에 갈 때는 항상 깨끗하게 쌀에 뉘를 골라서 가지고 갔는데 십 년이나 그렇게 해 가지고선 다녔어요. 왜 그렇게 지성으로 절에 다녔느냐? 거기 풍습이 나이가 열일곱 살에서부터 열아홉 살까지의 처녀는 해마다 산에 바치게 돼 있었어요. 만약에 바치지 않으면 그 동네가 발칵 뒤집히고 농사도 안되고 사람이 자꾸 죽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해마다 처녀 한 명을 바치게 됐던 거죠.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그 나이가 닥쳐오니까 어머니가 안절부절못하고 절에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머리에다 공양물을 이고서는 딴에는 기도의 효험이 있다는 절로 찾아가는데, 찾아가는 도중에 보니까 스님 한 분이 턱 나오시거든요. 그래서 “여기 아무 데 절이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 계신 법당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니까 “허, 이 보살 보게. 아, 부처님이 여기도 계시고 저기도 계시잖나!” 그러면서 소나무도 가리키고 돌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기도 부처가 있고 저기도 부처가 있잖나. 그걸 모른다면 어떻게 딸을 건지노?”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눈이 그냥 탁 박힌 겁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저 소나무를 부처로 볼 수 있고 돌을 부처로 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꼭 딸을 살려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까 “저 돌이나 소나무나 당신하고 똑같소. 둘이 아니요. 둘이 아닌 줄 알아야, 일체가 다 부처하고 둘이 아닌 줄 알아야만이 그 자식을 건질 수 있소.” 이러거든요.
그래서 매일 기복으로 빌다가 그때부터는 소나무를 붙들어도 ‘둘이 아닌 내 부처님, 우리 딸 살려 주시오.’ 돌을 봐도 ‘나와 당신이 둘이 아니니 우리 딸을 살려주시오.’ 하면서 그때부터 더 열심히, 물을 봐도 그렇게 하고 나무를 봐도 그렇게 둘이 아니라고 관하고, 흙을 봐도 그렇게 관하는데 하다못해 큰 벌레를 봐도 ‘너도 나와 둘이 아니잖니. 그러니 네가 나 좀 도와줘! 너도 내 주인공이야.’ 그 어떤 걸 봐도 ‘너도 주인공, 나도 주인공, 주인공은 둘이 아니니까 나 좀 도와줘!’ 하면서 관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얘, 아무개야! 너도 나와 둘이 아니고 모든 게 둘이 아닌 것을, 앞서에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헤맸구나.” 그러시고는 한 일주일 곡기를 끊고 그냥 앉아서 계시더니 나중에는 “얘, 나는 지금 급해! 그러니까 내 옷을 내와라.” 그러시더니 하얀 옷 한 벌 지어 놨던 것을 탁 입고서는 그냥 앉아 계시니까, 딸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어머니가 왜 새 옷을 입고 앉아 계신가?’ 그렇게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녁밥을 짓는다고 나갔다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열일곱 살 먹던 해에 말입니다. 돌아가셨으니 어떡합니까? 아버지를 부르고 그래서 장사를 치를 준비를 하는데, 장사 치르기 전날에 그 어머니가 꿈에 나와서 “아버지는 말을 안 들을 터이니 너라도 관을 지고 가서 물에 갖다 넣어라.” 그러더란 얘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니까 “일평생이 아니라 수억겁을 거쳐서 나는 먹어 왔다. 그런데 내 몸뚱이 하나 던져 주는 거야 뭐가 그렇게 아깝겠니? 그것도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건데, 큰 고기든 작은 고기든 다 먹게 던져 주는데 뭘 그러느냐?” 그러거든요. 소원이니 꼭 그렇게 해 달라고 그러니 어찌할 수가 없는데, 아버지는 상여로 내가서 묻으려고 관을 갖다 놓고 염을 하고 병풍을 둘러쳐 놓고 야단났거든요.
근데 일가친척들 보라고 관 뚜껑도 안 덮고 병풍을 쳐 놓고 관에만 넣어 놨어요. 그랬는데 밤중이 되어서 초상 치르는 사람들은 다 나가고 딴 데서 자고 그러니까 거기를 딸이 지키고 앉았다가 몰래 겨우 관을 쓰러뜨려서 빼내 가지고 그걸 그냥 걸머지고 나갔습니다. 옛날 시골에서는 여자도 지게를 잘 졌지 않습니까? 지고 가서 돌을 달아서는 물속에 그냥 얼른 넣고는 왔단 말입니다. 와서 자는 척하는데…, 그게 인제 소원을 이루어 드린 거죠?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삼 일 만에 말입니다. 두꺼비 한 마리가 슬슬 부엌으로 기어들어오는 겁니다. 그 두꺼비가 들어오면서 눈물을 주루룩 흘리거든요. 전날 저녁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셔서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어서 이렇게 하니 그런 줄 알아라.”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딸이 이 두꺼비가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걸 보고 “아이구, 엄마가 날 살리려고 이렇게 했는데 두꺼비가 돼 가지고 나를 어떻게 살리려고 하는가.” 이러면서 둘이 운 거죠. 그러고는 부뚜막에다 항상 밥을 주고 해서 몇 년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인제 딸도 열아홉 살이 됐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그렇게 바치기 전에는 아무도 시집을 못 갔고 그렇게 일 년에 한 명씩 바치고 난 뒤에 나머지 처녀라도 남아야 시집을 갔거든요. 그런데 이 딸이 뽑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서 두꺼비를 보면서 “내가 지금 저 집에 들어가 있느니라.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 이 몸을 해 가지고 이 세상에 왔는데 너를 살리고 난 뒤에는 이 몸을 벗고 갈 것이니라. 네가 만약에 가마를 타고 그 산중 골짜기에 있는 산당에 가거든 꼭 나를 치마에다가 싸 가지고 가거라.” 그러시거든요. 그래서 그 딸은 어머니 두꺼비를 싸 가지고 갔어요.
싸 가지고 갔는데 밤중이 되니까 큰 지네가, 서까래만한 지네가 그냥 주욱 나오는데 차디찬 입김으로 인해서 아주 그냥 쓰러질 것만 같은 겁니다. 그래 푹 주저앉았는데 그 두꺼비가 치마 위에다가 앞발을 척 걸더니 그냥 보꾹을 쳐다보고 안개를 뿜어 대는데 안개가 자욱해지더랍니다. 이 딸은 그 지네를 보고 너무 기가 막혀서 앉아서 그냥 오그라진 채 까무러쳤어요. 그런 사이에 이 두꺼비는 한 서너 시간 동안 안개를 그냥 그렇게 뿜어 댄 거죠.
그랬는데 뭐가 털썩 내려앉는 소리에 까무러쳤다가 홀연히 깨어나 보니까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아요. 불도 꺼지고 했기 때문에 안 보이는데 그냥 그 두꺼비가 치마폭에서 자꾸 발로 손을 치면서 얼른얼른 나가자고 하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어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새벽에 동네 사람들이 전부 와서는 와 하고 달려들었어요. 인제 창문이 훤해지니까 그렇게 큰 서까래만한 지네가 떨어진 거를 알았어요. 그 어머니가 두꺼비의 몸을 해 가지고 나와서 딸을 살리고 마을을 살린 겁니다. 그게 다 부처님 법이죠.
그러면 그 어머니가 두꺼비의 몸을 했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처님도, 만약에 사람을 건지는데 두꺼비로 화해야만이 그 사람을 건진다 할 때는 두꺼비로 화하는 겁니다. 돼지를 건지려면 돼지 속에 들어가야 돼지를 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떠한 모습으로 되지 않는 때가 없으니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름이 없는 것이 부처님이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딸을 살리고 그 마을을 다 살린 겁니다. 다 살려 놓고 그 딸의 꿈에 턱 나타나서 “이제 나는 갈 터이니 내가 입었던 그 옷과 저 지네의 옷도 다 태워 버려라. 그 지네의 마음도 이제는 둘이 아니게 인간으로 화했느니라. 마음을 고쳐서 인간으로 화해 가지고선 좋은 일을 많이 할 거고 나도 옷 입었던 것을 벗어 놨으니 둘 다 태워 버려라. 지네도 둘이 아니요 두꺼비도 나와 둘이 아니요 너도 나와 둘이 아니니라, 이제는.” 이러면서 훌쩍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보니까 과연 두꺼비가 죽어 있더라는 얘기죠. 그래서 “어머니! 어머니!” 하고 공중을 쳐다보고 울면서 장작을 이쁘게 쌓아 놓고선 거기다가 그 두꺼비를 백지로 싸서 올려놓고 화장을 시켰대요. 딸이 그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답니다.
그러니까 벌써 그 스님으로 인해서 어머니는 딸을 살리고 동네를 살리고, 그 뜻으로 인해서 동네 사람들에게 전부 불씨를 심어 줬답니다. 그 스님이 그 부인에게 똑바로 자성본래불을 찾게끔 해 줘서 일체 모두 자기 아님이 없는 줄 알게 만들어서 딸도 살리고 동네도 살리고, 딸과 동네 사람 모두에게 불씨를 심어 줘서 자력으로써 마음 도리를 공부했대요. 그래서 전부 보살을 이루어서 하늘을 오르고 내리면서 모든 중생을 건졌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일체 만물만생이 모두 어항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거를 모르고 사는 겁니다. 한 발도 바깥으로 떼어 놓을 수가 없어요. 공기주머니 속에서 살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대로 자유스럽지를 못해요. 그래서 어떤 체제 속에서 저항을 받고 사는 거지요. 그래서 한마디로 말해서 그 위치에서 마음으로 그냥 자유자재 못하고 제 마음을 가지고도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이 되어 있는 겁니다, 모두가. 벌레에 이르기까지 제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연어는 자기가 난 자리에 다시 와서 새끼들을 낳아 놓고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한마디로 고렇게 표현을 해서 인간도 박아 놓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이 어항 속에서 벗어나야, 즉 말하자면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우리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 할 수가 있다 이거예요. 그 박탈 속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겁니다. 지금 우리는 노예가 돼가지고 갇혀서 사는 형국이거든요.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마음 먹기에 달려 있으니까, 한 마음 먹기에 달려서 한 마음을 잘 먹으면 부처가 되고 한 마음을 잘못 먹으면 그냥 중생으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이겁니다. 이러한 의지 하에 인간이 되면 만물의 영장으로 부풀린다 이런 거지요.
그러니까 필연적으로 우리가 마음공부는 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찾는 자나 믿는 자나 자기를 믿고 자기를 발견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본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이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자기가 발견을 못하니깐 꼭 해야만 하는 거죠.
지금 색경을 보고 있으면 색경 속에서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색경 속에서 하지요? 그것과 같이 마음이 하자는 대로 육신은 움죽거리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림자와 그림자가 아니라, 참자기와 자기 그림자가 둘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림자 하나만 가지고 자기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문제가 커지지요. 앞의 예화에서도 말을 했지만 여러분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어요. 살아서 그 도리를 모른다면 죽어서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 모두가 몸뚱이가 없어지기 전에 꼭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입니다.

먼지 앉을 자리가 없다는 까닭

육조단경에 보면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고 신수대사가 말씀을 하셨는데, 육조대사께서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라고 답하셨습니다. 스님께서도 프로펠러 돌아가듯 공한 자리이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왜 그런 것인지요?


원래 청정한 그 자리는 죄도 없고 업보도 없고 유전도 붙을 자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억겁을 살아오면서 차원이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얼마나 업을 많이 짓고 나왔겠습니까? 우리가 지금도 장창 이 도리를 모르고 가면 자기가 한 대로 자기 차원대로 자기한테 오는 겁니다. 그거는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하고 피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날 수 없느니라.’ 이랬습니다.
그런데 왜 ‘고는 없다’라고 한마디로 말했겠습니까? 고 하나만 알면 고(苦)·집(集)·멸(滅)·도(道)가 다 없다고 했습니다. 그건 왜냐. 내가 줄창 말씀드리듯이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못 알아들으신다면, 과거에 살아왔던 거를 카세트에다 녹음했다고 합시다. 그럼 카세트를 짊어지고 나온 거죠? 그 짊어지고 나온 카세트 테이프에 감겨 있는데다가 새로운 녹음을 하니까, 나오는 자리에다 다시 넣으니까 자꾸 넣는 대로 앞서 녹음되었던 과거의 업보는 다 무너지고 맙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다못해 카세트로까지 비유를 했습니다. 지금 새로 넣으면 앞서 넣은 것은 없어진다, 또 새로 넣으면 그게 또 없어진다. 이러니까 업보가 붙을 틈이 없어요. 그래서 예전에 신수대사가 ‘갈고 닦아야 한다.’ 이랬는데, 육조선사는 ‘먼지 앉을 틈이 없는데 어째서 닦고 갈아야 되느냐.’ 하고 그냥 한 마디로 말한 겁니다.
그런 것과 같이 진리를 가만히 고찰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평생을 산다 하더라도 한 철입니다, 한 철!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나날이 살아가는 게 한 찰나 생활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여러분이 친구를 만날 때는 자동적으로 세 가지가 포함돼서 나갑니다. 말도 뜻도 행도 그냥 친구로서 나갑니다. 근데 그 친구와 헤어지고는 자식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아버지가 됐죠?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자동적입니다. “얘, 너 어디 갔다 오니?” 이렇게 말이 나가죠? 생각과 뜻도 그렇게 나가죠? 행도 그렇게 나가죠? “너 배고프지 않으냐?” 할 수도 있고 “집으로 어서 가자.” 이럴 수도 있고, 그렇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또, 집에 들어가서 부모를 만나 보세요, 어떻게 되나. 아버지는 또 그냥 없어지고선 금방 자식이 되어서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어머니가 “아유, 이제 들어오니?” 이렇게 응대해 주시죠. 그런데 자동적이 아닙니까? 아내를 만나니까 또 금방 자동적으로 남편이 됐습니다.
염주알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역할을 할 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의 내가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를 만났을 때입니까, 자식을 만났을 때입니까, 친구를 만났을 때입니까, 아내를 만났을 때입니까? 그렇게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공했다고 했습니다. ‘공했다. 공했느니라.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그렇게 돌아가는데 무슨 먼지 앉을 자리가 있고, 업보가 붙을 자리가 있고, 지옥이 있겠는가 이겁니다. 안되는 것도 찰나요, 되는 것도 찰나니, 되는 거 안되는 거를 다,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맡겨 놓아라. 맡겨 놓으면 거기에서 그대로 자유스럽게 사용해도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것이 바로 법이니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토록 믿었는데…

그토록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보니 정말 이 세상에 누구를 믿으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삶의 의미가 없어지고 세상이 싫어집니다.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는지요.

누구든 자기가 만들어서 행복하게 사는 거지 누가 행복을 갖다 주는 게 아닙니다. 누구를 기대고 누구를 믿고 그렇게 살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기대고 믿었다면, 100% 믿었다면 아마도 100% 후회가 되거나 미움이 생기고 배신감을 느끼고 그럴 겁니다, 아마.
그러니까 무엇이든 밖으로 믿지 말고 자비하게 사랑하라 이겁니다. 밖으로 믿지 말고 그대로, 나는 그대로 두고 사랑하라 이겁니다. 거기다 착을 두지 말고요. 천 냥을 주었더라도 착을 두지 말고, 만 냥을 주었더라도 착을 두지 말고요. 자기가 굶으면서 주라는 게 아닙니다. 가진 돈을 내버리라는 것도 아니고 물질을 내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쌓아 놓고 살더라도 좋은 일을 하면서 관리만 하라는 거죠. 내가 말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돈을 버리라는 게 아니고 그 돈을 가지고 살아도 당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관리인이다 이겁니다, 관리인! 내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돈은 다 나가요. 언제고 다 나갑니다. 그러나 그 돈을 관리한다고 생각할 때 그건 내 돈도 아니고 네 돈도 아니죠. 그래서 돈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밥 한 그릇에 숟가락 서너 개를 끼워 놓고 같이 먹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야 그것이 즐거움이고 보람입니다. 그야말로 고기반찬에 음식을 잘 해 놓고 먹으면서도 그냥 울고불고, 속으로는 부아가 치밀고 해서 티격태격하고 먹다가 수저를 놓고 뛰쳐나가고 이렇게 한다면 그건 삶이 아니라 지옥이죠. 그런 지옥을 누가 가져오나요? 자기네들이 가져오지요. 여러분이 돈이 아무리 많아서 부처님한테 처덕처덕 갖다 놓는대도, 또는 절을 지어 주고 부처님 제자들에게 의복을 해 준다 하더라도 이 도리를 모르고 ‘이렇게 해 주었으니 내가 잘될 거다.’ 하고 기복으로만 나간다면 공덕이 하나도 없습니다.
스님들이 왜 출가 해서 스님 노릇을 하는 줄 아세요? 여러분한테 돈 받아서 먹고 살 양으로 스님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오산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도 안 갖다 주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합니다. 여러분이 먹고 살려고 어렵게 벌어서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시죠? 그런데 여러분을 위해서 돈을 주고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 오지, 상점을 위해서 물건을 사 오십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스님들을 위해서 여러분이 오시는 게 아닙니다. 냉정하게 판단을 하십시오.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자식을 위하여 여러분이 오거나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남편이 오신다 하더라도, 그 가족을 위한다고 정성을 들이는 것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남편이 잘되고 자식이 잘돼야 내가 편안하고 좋으니까 말입니다.
이렇듯 모두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사는 거지, 다른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돌아가셨다 해도 자기가 가난하고 밥을 굶고 죽겠을 때, 무슨 일이 있어 죽겠을 때는 그 부모님을 여읜 슬픔으로만 우는 게 아니라, 자기 신세까지 첨보해서 애절복통을 하고 울게 되죠. 동시에 울음이 터지는 거죠.
그 뒤에 자기가 돈이라도 벌어서 살 만하고, 자식들을 낳아서 키우다 보면 부모 마음을 그때서야 조금 짐작하고, ‘아휴! 우리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내가 그러지를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불법이라는 이 자체가, 우리 사는 것이 불법이지 우리의 삶을 떠나고 우리 자신을 떠나서는 불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한 일을 모두 알고 있고 바로 그 일을 하게 했던 그 자체, 자기를 형성시킨 자체에다가 ‘네가 했으니까 네가 알아서 나를 이끌고 다니고, 네가 형성시켰으니까 사는 것도 네가 알아서 끌고 다녀라.’ 하고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놓는 겁니다. 잘못된 게 있어도 ‘너밖엔 해결 못한다.’ 하고 믿고 거기에다가 맡겨 놓고 산다면 바로 나도 발견하고 내 몸도 건강해지고 집안도 편안하고 화목해져서 모두가 좋은 거거든요.
그렇게 너그럽고 자비하게 생각을 하면서 일체를 내 탓으로 돌리고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있으니까 상대가 있는 거다.’ 하고 모든 것을 그렇게 놓고 간다면, 바로 내 속에서도 한마음 한뜻으로 자꾸 좇아가게 됨으로써 자동적으로 천백억화신으로 화한다 이겁니다. 털구멍을 통해서 바깥 경계를 다, 마음을 조절하면서 일들을 다 하고 안에서 일어나는 것도 다 조절을 합니다. 안에서 보살들이 용도에 따라서 관세음이 됐다가 지장이 됐다가, 산신이 됐다가 용신이 됐다가, 지신이 됐다가 판사가 됐다가, 의사가 됐다가…. 이렇게 화해서 조절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픈 것도 고정된 게 아니요, 사는 것도 고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고정됨이 없이 용도에 따라서 다 원활하게 순환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유전성이라든가 업보성이라든가 그 모두가 다 무너진다 이 소립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스님, 저는 순간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몇 년을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실수가 저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저의 가족들에게까지 죄인의 가족이라는 허울이 씌웠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의 가족들한테까지 악영향이 미치게 되는 이 현실이 너무나 싫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의 가족들이 저 하나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화목하게 살 수 있을는지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런 잘못을 다시는 범하지 않으며 죄업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요.

여러분이 과거에 업보가 있다는 둥, 인과로 인해서 뭐가 있다 뭐가 있다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뒤집어쓰는 겁니다. 왜? 여러분이 인식을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믿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렇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은 자유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찰나의 생활을 하면서 이 몸뚱이를 가지고 한 철 사는 겁니다! 한 철 꽃이 피었다가 시들어도 그 나무가 죽는 게 아니라 꽃이 시들어서 떨어지는 거죠. 봄이 되면 다시 잎이 나고 꽃이 피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무한정인데도 여러분은 항상 기복으로, 바깥으로 끄달리니까 미치는 수도 있고 머리가 도는 수도 있고, 안에서 파워를 일으켜서 병이 드는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깥에서 세균이 들어오거나 또는 유전성으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업보로 인해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는 얘기죠. 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하는가? 자기가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루를 지내는데 배고프면 밥 잡숫죠? 과일도 잡숫고 뭐 별의별 거, 고정되게 밥만 먹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를 먹죠? 여러분의 환경에 따라서 말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좀 나으면 나은 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자시면 그게 그냥 고정되게 속에 들어가서 담긴 채 있습니까? 항상 배설이 됩니다. 먹으면 배설되고 먹으면 배설되는데 거기에 뭐가 붙을 게 있어서 죄업이 있겠습니까? 이건 한 찰나의 생활입니다. 우리가 밥 먹고 똥 싸는 게 한 찰나의 생활이란 말입니다.
자주 하는 얘기입니다만, 카세트에 노래가 들어 있는데 거기다가 또 노래를 넣으면 앞에 있던 것은 없어지고 또 넣으면 또 앞서 있던 게 없어지고 이러는데 과거의 빚이 어디 있겠느냐, 업보가 어디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 모든 업보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없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는 겁니다. 왜?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니까 말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거니까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여러분의 생각에 달린 거다 이겁니다. 생각 하나가, 한 생각이라는 것이 전체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가 하면 전체에 말릴 수도 있는 거지요. 생각 하나가 그렇게 귀중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그 한생각의 도리를 안다면, 체험하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보살행을 하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천체물리학이라든가 천문학, 또는 현재의 정치학이라든가 지리학이라든가, 이 모두가 다 하나의 복합체로서 구성이 돼서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공식(共食)하고 공존하는 것을, 공체(共體)로서 공용(共用)하고 공심(共心)으로서 공생(共生)으로서 같이 돌아가는 이것을, 바로 여러분이 천차만별의 여러분의 가락에 맞추어서, 용도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그걸 포착해서 용도에 따라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자유인이 돼라고 하는 거지, 항상 남한테 기대고 항상 무엇을 해 달라고 하면서 살라는 게 아닙니다.
이름이 수만 개로 퍼져 있는데, 지장보살이니 무슨 무슨 보살이니, 용왕이니 지신이니 조왕이니, 이름은 많지요. 보살 이름도 많고 부처님 이름도 많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밝으면 그 밝은 연등부처님의 마음과도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을 밝게 하고, 본래 밝은 것이니까 얽매이지 말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 우선 내 마음에서 나오는 일체를 놓아야 합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일체가 있는 겁니다. 내가 있는 것이 화두고, 내가 지금 있으니 바로 주인공이 있는 겁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으니까 나로부터 알아야 되겠기에, 바깥에서 경계가 들어오는 것도 놓고 안에서 나오는 것도 거기 놓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것이고 주인공이 모든 것을 내고 들이는 거니까요.
그러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의 고덩어리가 어디에 있느냐? 내 몸속에 수십억 마리의 고덩어리가 회전을 하고 있거든요. 그 속에서 아상과 아만, 괴로움, 병, 이런 수많은 마음들이 다 나오는데 그거를 주인공이 다 하는 거니까 다 주인공에 놓으라는 거죠. ‘주인공이 나를 형성시켰고 나를 이끌어 가고 있고 주인공만이 안되게 할 수도 있고 되게 할 수도 있는 거니까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그게 놓는 공부요, 그게 바로 집안을 화목하게 만드는 공부입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니 좌선이요, 나를 발견하게 하니 참선입니다. 바로 생활을 그대로 아주 편안하게 해 나갈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업보도 녹일 수 있고요. 여러 가지죠.

먹는 것에 대하여

요즘 다이어트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먹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관해야 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도 자기 안에서 벌써 압니다. ‘이것은 나한테 맞는 거야.’ 하고 안에서 받아들이는 대로 심부름만 해줍니다. 숟가락 들고 심부름만 해줘요. 만약에 서너 가지를 식탁에 놨다고 하면 자기 입에 맞는 것부터 벌써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게 입에 맞는 게 아닙니다. 속에서 벌써 자기 입맛에 맞는 걸로 다 찾습니다.
자기 현재의식 자체가 찾는 게 아니라 잠재해 있는 속의 생리적인 운영을 할 때 벌써 ‘내가 이게 모자라니까 이걸 다오.’ 하기 때문에, 말없이 달라 하기 때문에 주는 거뿐입니다. 이것이 조절입니다. 그래서 알칼리성이 적으면 어떤 때는, 멸치 같은 종류가 많이 들어가죠. 그런 게 먹고 싶을 때가 있고, 후루룩 뜨뜻한 국물을 만들어서, 그저 신선하게 해서 마시고 싶은 생각도 나고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경 쓰고 모든 것을 적합지 않게 자꾸 만들어 가지고 속상하고, 속은 안 상한다고 하면서도 어딘가 은근히 그것이 누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부진하니까 위막이나 장막이나 간막에, 음식을 먹어도 언제나 거기에 찌끄럭지가 항상 누적이 되게 돼 있습니다. 마음이 누적이 되니까 역시 물질도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병이 오는 것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군데가 꼭 아프다 그래서 거기서 고장이 난 게 아닙니다. 딴 데서 고장이 나서 거기까지 오는 것이죠.
어떤 때 한 번만 속 끓여 보십시오. 숨이 차고 벌써 눈이 게슴츠레해지고 귀가 멍멍하고 보이는 게 없고, 누가 잘하든 못하든 벌써 보면 신경질이 납니다. 그럴 때는 꼬투리가 없어서 말을 못하게끔 됩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를 때는 자기 몸을 자기가 긁어서 피를 내는 거죠. 그러고 아파서 애를 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음식을 먹고 싶은 대로 이거 먹고 저거 먹고 이러면서 소화가 되고, 이것도 소화가 되고 저것도 소화가 돼야 좋죠. 그런데 그것이 잔뜩 고여 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먹고 싶어서 우리가 먹으면 스스로 소화가 되고, 또 소화를 시키는 것이 바로 거기라는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 먹으면 스스로 그냥 녹아 없어져요. 그런데 그걸 끊어 없애려면 됩니까? 그럼 위를 갖다 끊어버려야죠. 아예 넣지도 말고. 그러니 쌓아놓은 게 없이 먹으면 없어져요. 우리 공부하는 것도 그렇죠? 망상이라고 끊으려고 한다면 그게 끊어집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인간인데 우리더러 어떻게 놓으랍니까? 뭐든지 살아야 하는데….” 이러죠? 그렇지만 살아야 하니까 놔라 이거에요. 그냥 넣으면 녹아서 슬슬슬슬 그냥 내려가니 그냥 놔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밥 먹고, 똥 싸고, 잠 자고, 이 세 가지를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밥 먹고 체하면 그냥 부대끼고 병이 나고 그러지요. 체하는 데서 큰 병이 생기고 그래요. 그와 같이 우리는 지금 살림살이하고 돌아가는데 걸리고 자꾸 그런다면은 그것은 부작용이 일어나서 우리가 공부하는 데 무척 지장이 있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걸 닥치는 대로 집어 먹어라, 모든 거를 닥치는 대로 집어 먹되, 걸리지 않게 집어 먹어라, 체하면 막힌다, 막히면 죽는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생활을 하는 데도 내가 한생각과 또는 행과, 내가 음식을 먹는 데도 또 마음을 쓰는 데도 항상 조절의 활용을 제대로 지혜로운 마음으로 할 수만 있다면 나쁜 거는 소탕하게 돼 있습니다. 안에서도 말입니다. 나쁜 건 왜 소탕이 되느냐. 내 안에서 작업을 하면서 원자력에서 모든 나쁜 거는 태워 버리기 때문입니다. 안에서 원자가 태워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썩은 물이나 나쁜 물이나 좋은 물이나, 좋은 건 좋은 것대로 받아들이면서 굴리고 또는 체내에나 세포의 모든 것이 공급이 되게끔 되지만, 만약에 나쁜 물질이 잘못 공급이 되면 사람이 나쁘게 될 땐 그거는 태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한테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체험하고 돌아가는 얘기를 그대로 하는 겁니다. 내가 내 몸 하나로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서 수만 개가 돼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가 붙습니까, 거기.
200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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