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 심술 다스린 절터
웅덩이가 깊으면 이무기가 살기 마련이고, 세월이 깊으면 전설이 깃들기 마련이다. 이 땅에 싸움 잦고 천둥번개가 비를 자주 뿌리는 것은 천지, 백록담 방방곡곡 크고 작은 웅덩이가 많고, 웅덩이마다 세월이 깊기 때문이다. 웅덩이가 깊고 세월이 차면, 담(潭)과 소(沼)가 된다. 물은 하늘에서 내려와 지상을 순례하는 것이므로, 이 땅에 웅덩이가 많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그만큼 고였다는 것이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이무기들이 수시로 출몰하며 또아리를 틀었다는 것이다.
설화와 예술의 고향 남원에 옛 이야기 길어 올리던 그럴듯한 웅덩이가 없을 리 없다. 칼을 쓴 춘향이나, 만복사 양생을 유혹한 저승처녀가 이승의 인연을 끊고 머리를 푼 채 깊은 골짜기로 올라갔다면 아마도 그곳은 청솔 우거진 용담천 계곡일 것이고, 흥부네 초가집 처마 끝에 제비 둥지 노리는 텃구렁이가 기어 나왔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용담사(龍潭寺) 터 깊은 물가에서 허물을 벗은 이무기 중 하나일 것이다. 용담사지의 ‘용담(龍潭)’은 세월에 그 수심이 메워졌어도, 아직도 그 물소리만은 여전하여 소리치며 남원시내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젖은 양말 허물 벗듯 잠시 벗어 풀 섶에 걸치려고 찾아간 용담사지는 빈 집 아닌 빈집, 사지(寺址) 아닌 사지여서 걸음을 되돌릴까 하다가 다시 찾았다. 폐사지 순례는 복원이든 방치이든 잊혀진 가람만을 찾는 여행인데, 잊혀진 가람으로 알려진 용담사지는 맞이하는 이가 있고, 비바람을 막는 요사채가 있으므로 절터 아닌 절터인 것이다. 폐사지 여행의 간이역쯤으로 물 한 대접 마시고 그냥 지나칠 용담사지에 아예 자동차 시동을 끄고 걸터앉는 것은 한 걸음 씩 들여놓을수록 그 수심이 깊은 탓이다.
남원시 문화안내 책자나 답사 여행의 길잡이에도 용담사지는 분명 절 아닌 사지로 나와 있다. 그러나 용담사지는 아직 사적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사적지 지정도 안 됐고, 본격적인 발굴조사도 없었다. 용담사지를 잊혀진 가람의 범주에 들여놓는 것은 주인 없는 절터라 할지라도 그 관리가 이름 없는 사문에 의해 이렇게 소박하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과, 그렇더라도 종단 차원의 관리나 당국의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라면 그것은 또한 그것대로 짚고 넘어 가야할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지의 주인은 원칙적으로 불교요, 불자이다. 돌보지 못한 묵뫼라 할지라도 그것은 못난 그 자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부동산인 그 사지의 소유자가 있다면 그 원칙이나 가설은 괜한 억지나 딴청일 것이다. 전통사찰보존법이 있더라도 그 사지에 현존하는 전통 사찰이 없다면 그 틈새에는 슬쩍 이무기들이 세 들어 또아리를 틀고 텃구렁이 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여 이 글이 7년 전에 이 절터에 들어 석불입상(보물 제42호)의 보호각을 세우고, 1평에 15만씩 주고 주변 사유지를 사들여 절터를 관리한다는 정암(靜庵) 스님에게 누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글은 그 누구의 공과나 허물을 들추기보다 총체적이고 합리적인 폐사지 관리의 대의성을 찾고 명분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기에, 누구든 저 이름 없는 불제자의 수고를 함부로 허물하지 말아야 한다.
용담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터이다. 절터를 휘돌아 나가는 용담천 깊은 물에 이무기가 살면서 온갖 행패를 부리기에, 도선국사가 이를 제압하고자 절을 짓고 용담사라 하였는데, 이후 이무기의 행패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전설을 뒷받침하듯 지금 새롭게 남아있는 대웅전은 남원시내가 아닌 북향으로 용담천을 바라보고 있다. 마음이 미혹한 중생들의 눈으로 보면 수로 관리가 안 되어 계곡을 넘친 물이 마을을 휩쓰는 현상이 이무기의 공포쯤으로 보였을 것이고, 자비로운 도선국사의 눈에는 그것이 한갓 용담천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보(洑)를 세우고 물길을 돌리면 방지될 토목공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용담사지는 큰길인 730번 도로에는 사지의 이정표가 있으나, 정작 사지 경내에 당도해서는 어떠한 표식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일주문 대신 시멘트 기둥에 녹 쓴 철 대문이 매달려 있을 뿐, 당간지주 같은 늙은 벚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면 절터는 그냥 한가로운 민가쯤에 불과할 것이다. 용담사지 대문을 들어서면 앞마당에 높이 9.9m의 7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탑인데, 좁은 안마당에 장식처럼 서 있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탑은 너무 길쭉하고 홀쭉하여 안정감이 없는 상태이나 몸돌의 자욱한 이끼가 범상치 않음을 말해준다. 마치 운주사의 석탑들 중 어느 하나를 옮겨놓은 듯한 질박하고 소박한 솜씨가 고려인의 정성을 말해준다.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전 시대를 걸쳐 석탑이 가장 많이 조성된 시기이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신라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대체로 기단과 탑신은 신라 석탑에 비하여 폭이 좁아지고 탑신은 층수가 많아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 안정감을 특징으로 한다면 고려시대의 석탑은 늘씬한 자태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지방적인 색채를 드러내고 있는 것도 한 특징이다. 이는 고려가 불교를 국교로 장려한 탓에 탑의 조형에 국가, 왕실, 귀족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참여하였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강릉 신복사지 3층석탑 앞에 무릎을 꿇은 보살상이 공양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용담사지 7층석탑 앞에는 별다른 꾸밈없는 작은 석등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오똑한 채 불 꺼진 법등의 심지를 돋우고 있다. 마당 한끝에서 일직선으로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석불입상은 타원형의 자연석을 다듬은 대좌 위에 광배를 갖추고 있는 높이 6m의 거대한 불상이다. 석불 입상은 긴 얼굴에 높은 육계를 얹고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얼굴표정을 알아보기가 힘들다. 목에 형식적인 삼도가 희미하게나마 보이며, 두 손을 아랫배에 모으고 있으나 수인(手印)의 형태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등에 짊어진 듯한 육중한 광배는 불상과 하나인 통돌로 불상의 지대석 양쪽에 원형과 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것으로 불상을 보호하는 목조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담사지는 현재 요사채 뒤쪽, 용담천 쪽으로 다시 전각공사가 한창이다. 인근 농협창고에서부터 주변 전체가 사지인 듯한데, 발굴조사 없이 전각공사가 계속되고 있어 남원시 당국으로부터 적법한 절차를 거친 공사인지 궁금증이 남는다. 용담천 깊은 물은 이무기가 아닌 용이 사는 곳이기에 함부로 구정물을 일으키면 하늘의 섭리를 그르치는 것이 될 수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저토록 쉬지 않고 ‘너희들 이 이치를 아느냐’고 외쳐대도 아무도 그 법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전남 화순 운주사지 편
용담사지 가는길
용담사지는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에 있다. 남원시내에서 남원대교를 건너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은 남원국민관광단지로 가는 길이고, 왼쪽길이 주천면을 지나 지리산 정령치로 가는 730번 지방도로이다. 용담사는 이 길을 따라 1.7㎞ 정도쯤 가면 된다. 좁은 시멘트 산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