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히 놓아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 원력이에요
▲사회자: 스님! 외람되게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법회에 자주 참석을 못하고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여러 분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말씀을 더 해주신 다음에 질문을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스님: 질문하고 대답하는 데서 다 나오는 걸요. 생활이 바로 불교이며, 풀 한 포기라도 불교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 입멸 후 1천년 뒤에는 말법 세상에 들어가서 그때에는 “미륵불이 나와서 세상을 구제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스님께서는 이 세상에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님: 그건 나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왜 미륵이라고 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미륵이라 함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다시 동쪽으로 오는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몸이 흩어지면 돌아서 다시 나오는 과정이 미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동방에는 아촉불을 말하고 서방에는 아미타불을 말하며 지천국에는 지장을 말했거든요. 그리고 이 사바세계에는 관세음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깨달으면 지장이자 관세음이요, 깨닫지 못하면 중생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부처를 모시고 있고 속에 중생들을 잔뜩 안고 있습니다.
누가 그러더랍니다. 천도를 시켜달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지나 않았으면 죽지도 않았을 것을 그랬구나.” 하구요. 이것이 참 묘한 말입니다. 이 말은 동방의 아촉불과 서방의 아미타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찰나에 불을 켰다가 찰나에 불을 끄고, 다시 쓸 일이 있으면 또 켜서 쓰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납득하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애가 태어나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른이 되고 늙어서 다시 애로 태어나 자라서 또 어른이 되는 것처럼 돌아 나오는 것을 미륵이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아는 것이 너무 많아서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다 놓고 가다보면 홀연히 참자기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그걸 뜻으로 알아들어야지 일일이 따지다가는 자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고 나면 스스로 뜻이 나오게끔 되어 있는데 뭘 그렇게 따지려 합니까.
▲질문자1: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저희들만 듣기에는 너무나 아쉬운데 미국에 오셔서 좀 오래오래 머무르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법을 설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리고 저희같이 힘없는 사람들보다는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 예를 들어서 정치가나 교육자, 또는 경제계의 여러분에게 스님의 무상, 무아법을 설해주셔서 그분들이 마음을 돌려서 나라의 삶이나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그대로 이 세상을 부처님의 국토로 만드는 데 보다 시일을 단축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스님 같으신 분들이 여러 나라의 국사가 되면 더 많은 이들에게 포교가 되리라 생각하는데, 그런 운동을 전개한다면 스님께서는 그 자리를 맡아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스님: 부처님께서는 국사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으셨어도 전 세계 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 우주 전체를 한 손아귀에 넣고 중용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다를 떠나서 그런 능력으로 지금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떨 때에는 “스님, 이걸 이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잘 안됩니다.” 하고 얘기들 하면 저는 그러냐고 대답만 합니다. 이유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이 지켜보나 봅니다. 그래서 실험을 하는 분들도 많고 또 체험을 한 후에 와서 “스님, 어쩌면 그 대답이 그렇게도 명언이십니까? 말씀을 안 하셨는데도 스스로 이렇게 체험을 하게 되니 부처님 법은 정말 묘법입니다.” 하고 고마워들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 사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가 했다 네가 했다 할 것도 없으며, 그래서 원력이 있어서 잘되고 원력이 없어서 안된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서로 한마음으로 슬기롭게 굴릴 수 있으니 교수님도 슬기롭게 자유자재하실 수 있습니다. 못 믿지 마시고 그렇게만 실험하면서 체험을 해 보세요. 한다 안 한다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마음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해가 뜨면 햇빛을 쬐기도 하고 말릴 것은 말리며, 경우에 따라서 응달지게 할 것은 햇빛을 가리듯 천차만별인데 말입니다. 천체 물리가 터져서 과학으로 생활할 수 있는 자재법입니다. 그런데도 기복으로만 믿고 여기저기 빌기만 할 겁니까? 그런 관념과 습을 벗어 버려야 됩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처의 행을 안 하고 귀신짓을 하고들 있으니 이 세상에 귀신이 꽉 찰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질문자1: 오늘날 역사를 보면 티벳의 성자 달라이라마 같으신 분도 계시고 스님 같으신 분도 계시지만 결국은 티벳이 현실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고, 또 1910년 한일 합방에서 한국이 멸망했을 적에 우리나라엔 도인 스님이 계셨는데 그 무심의 도력으로써 세속적인 약육강식의 정책을 방어할 수는 없었는지요.
▲스님: 그때 시절에는 그쯤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죠. 모든 사람들의 머리가 그만큼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방편을 그렇게만 썼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현대는 문화 문명이 꽃피고 사람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밝고 사회의 모든 상식에 밝은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우리가 불교를 기복으로만 믿는다면 점점 힘은 약화되고 말겠지만, 그래도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는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밝은 눈으로 보되 조그만 것만 보시지 말고 넓게 살펴보고,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한생각 내서 그 순간에 속의 의식들이 전부 바깥으로 나가서 그 사람들을 이끌어 가게 해야 합니다.
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신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원래의 공산주의는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고자 하는 불교에서 나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으로 공산국들은 본래의 뜻에서 어긋난 사회주의이면서도 독재입니다.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진짜 맛을 모르는 것이죠.
또 한 가지는, 일본에서도 우리의 것을 얼마나 많이 본따 갔습니까. 스님네들의 행전을 보고 각반을 만들고, 오조가사를 보고 앞가슴의 총받이를 만들고, 장삼을 보고는 기모노를 만들고, 발우공양을 본따서는 그들의 밥공기를 만들었습니다.
밥통에 밥을 담아다 놓고 공기에다 덜어서 먹는데 부족하면 더 떠서 먹고 많으면 덜어서 먹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발우공양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우리들의 역사 문화는 또 얼마나 많이 가지고 가서 자기네 것으로 만들었습니까?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영향으로 여기저기 단을 차려 놓았는데, 하다못해 우동 집까지도 단을 차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보편적으로 자기를 깨닫는 근본 수행을 하지 않고 마치 회사에 나가는 것처럼 생활화가 되어 있습니다. 양복 입은 위에 가사 하나 걸치고는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 겁니다. 제가 가서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질문자2: 여기 모인 많은 분들이 어떡하면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대각을 이루고 부처가 되느냐 하는 뜻을 가졌다고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끔 도 닦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님: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고서 세상은 벌어졌습니다. 여러분 속의 진짜 자기 뿌리와 씨를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을 충만히 자기가 쓸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광대하게 재료가 주어져 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 말을 믿지 못한다면 그건 바로 여러분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그 재료를 가지고 말하자면, 신족통은 팩시밀리로 비유할 수 있는데 한생각에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기계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마음은 한계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속을 잘 안다는 타심통은 탐지기로 비유해도 되는데, 마찬가지로 기계 탐지기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무심 탐지기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천이통은 무전통신기로 비유를 할 수 있는데, 육신의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나무나 돌, 흙이나 꽃들이 말하는 것도 다 들을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공생 공용 공심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죠. 그리고 천안통은 천체망원경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심안의 망원경은 한계가 없어서 천체를 탐험하고도 남음이 있는 겁니다. 앉은 자리에서 앞에 끌어다 놓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은 믿지 못하시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체험하시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또 한 가지는 숙명통인데 컴퓨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살았던 대로 전부 입력이 되어 있다가 하나하나 나오는데 인연 지었던 모든 마음 의식들이 원수를 갚는다, 은혜를 갚는다고 자꾸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생활 속에서 수없이 나온다 해도 끄달리지 말고 속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나온 곳에 되놓아 좋게 다시 입력을 시켰을 때 과거에 입력되어 있던 인과응보,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들이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무너지게 되면 현재 입력시키는 것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겠습니까?
거기에는 팔자도 붙지 않고 운명도 붙지 않고 병고나 액난도 붙지 않습니다. 내가 공해서 없는데 어디 붙을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섯 가지 여섯 가지가 한 데 합쳐서 돌아가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니 주인이자 공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안되는 것이 나올 때는 되게 할 수 있다 하고 믿고 맡기고, 또 잘되면 감사하게 맡겨 놓으며 오직 거기에서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절대로 물러서지 마세요.
한결같이 그렇게 하다 보면 홀연히 밝아져서 팔자운명이 송두리째 무너지니 내 마음이 편안해서 좋고 중생들을 제도하니 좋고, 부처님과 한자리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깨달아지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걸 거기다 맡기십시오. 주인공이 죽는 법은 없습니다. 영원하니까요.
▲질문자2: 수행하는 데 있어서 주인공이 하나의 화두가 됩니까?
▲스님: 화두라고 해도 되죠. 그런데 내 몸 나온 것이 화두인데 화두에다 화두를 또 붙일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화두에다 화두를 거듭 든다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고 헤어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여러분이 여기 이렇게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분명한 증명입니까?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있음으로써 생각을 낼 수 있고, 생각을 낼 수 있음으로써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고정됨이 없이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보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군데만 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전부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부모일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자식일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또는 남편이나 아내가 되었을 때 나라고 하겠습니까? 어느 것을 먹을 때 내가 먹었다고 하며 어느 것을 할 때 내가 했다고 하겠습니까? 가만히 보세요. 한 사람이 몇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를요. 쉴 사이 없이 돌아가면서 바뀌는 겁니다.
▲질문자2: 한마디로 말해서 주인공에 모든 것을 맡기라는 말씀을 자기를 잘 다스리면서 맡겨놓고 부지런히 뛰라
우리들이 생활하는 그대로가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일체가 나로 인해서 생긴 것이니 나로부터 풀어야 합니다. 이 몸을 가지고 있을 때 모른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다음 생이 되는데 다음 생에도 그 차원에서 또 고통을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이 몸 떨어지기 전에 알아야 하기 때문에 온전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49년 동안 설하시면서 “너로부터 너를 알고 너에게서 벗어난다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절에 가서 공을 들여야만 된다는 관념과 습관으로 인해 부처님 법은 절에만 있다고, 항상 그런 생각으로만 살아오셨기 때문에 그 습을 못 버리는 겁니다. 하루 빨리 그런 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마음으로 이끌어주지 못하고 이론으로만 해나간다면 헛되이 한데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더욱 마음 도리를 강조하셨고, 또 한마디의 말이라도 한데 떨어뜨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앞으로는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대처해 나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이제는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밤낮없이 뛰어야 하는 여러분이 바로 부처이자 중생입니다. 이끌어나가는 마음은 부처요, 몸속에 있는 생명들은 중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부터 알아야 물리가 터져서 일체를 터득하고 지혜로운 자비가 나오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며, 찰나에 일체 제불이 들고 나심을 증득할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모두 한 집안 식구들이니까 잘하든 못하든 상관하지 말고 하다못해 “밥을 짓는데 왜 안됩니까?”라고 질문해도 좋고 생활 속에서 느끼는 점을 꾸미지 마시고 어떠한 것이든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하시는데, 오래 살겠다고 하면 그게 착이 되지 않습니까?
▲스님: 어려서 죽건 젊어서 죽건 늙어서 죽건 한 번 죽긴 마찬가지인데 죽는 걸 원통해서 그러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걸 모두 놓으라는 겁니다. 죽느냐 사느냐와 생사윤회도 모두 거기에 맡겨 놓으라는 겁니다. 악과 선, 일체가 다 한군데서 나옵니다. 한군데서 나오는 것이니 자기를 잘 다스려 가면서 맡겨 놓고 부지런히 뛰라는 겁니다.
▲질문자2: 맡기는 방법을 다시 한 번….
▲스님: 이제껏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자기의 근본을 믿지 않고 허공을 믿으실 겁니까? 형상을 믿으실 겁니까, 이름을 믿으실 겁니까? 뭘 믿겠습니까? 믿을 건덕지가 있어야 믿죠. 여러분을 형성시켰고, 이끌고 다니며 말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그 장본인을 믿어야지 누구를 믿습니까?
▲질문자2: 그러니까 스님과 똑같이 되려고 여기까지 왔지 않습니까.
▲스님: 그래요. 자기 자신을 무조건 믿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따르세요. 그러신다면 여러분이 아주 달라질 겁니다.
▲질문자3: 시심마라는 화두를 잡고 공부할 적에 ‘시심마, 주인공이 무엇이냐?’ 하는 마음 자세로 공부하면 괜찮습니까?
▲스님: 주인공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항상 말씀드리듯이 작년 수박씨를 심어서 올해 수박이 다시 열렸으니 ‘이게 뭣고?’ 하는 것은 이미 시대가 지났다는 얘깁니다. 수박은 그대로 수박이며 수박 속에는 반드시 수박씨가 들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고 들어가야지 ‘이게 뭣고’ 하면서 십 년, 이십 년 언제 그러고 있겠습니까? 그냥 갈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수박 속에 수박씨가 있다는 걸 믿고 새 봄이 오면 심어서 싹이 나고 수박이 열리면 만 중생을 다 먹이고도 되남아서 끝간 데 없이 먹인다는 생각을 하면 화두다, 화두가 아니다가 붙질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실상에서 어긋나지 않게 질서정연하게 해 나가는데 거기에 뭐가 붙습니까?
▲질문자4: 전통적인 선법에서는 화두를 잡고….
▲스님: 화두를 가지게 된 것은 중간에 생긴 법이지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세월에 화두를 준다면 늦어진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무나 아는 것이 많은데 ‘이게 뭣고’ 하라고 가르치니 그게 먹혀들어 가겠습니까?
▲질문자4: 그럼 저희같이 잘 모르고 처음부터 공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맡기는 방법에 있어서 자꾸 이 마음이 뭔가를 생각해야 되는지요.
▲스님: 때로는 ‘주인공이 도대체 무엇인고?’ 하고 생각하게 되겠죠. 어떤 때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가 지금 급하니까 무조건 맡겨야지.’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자기를 믿으세요. 물러서지 마시고 믿고 맡기는 작업을 하세요. 용광로에다 헌 쇠 모두 가져다 쓸어 넣으면 새 쇠로 생산이 되어서 나오듯이 그런 작업을 하시란 말입니다.
▲질문자4: 그러면 저희가 생활하면서 곤란을 받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 그 괴로운 마음을 스스로 이겨 물리치는 거죠.
▲스님: 여기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공부하다 보면 괜히 시시껄렁한 것을 가지고 괴로워했구나 싶어지고 또 아무리 괴로워해도 사량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맡겨 놓고 지켜보다 보면 슬그머니 돌아서 현실로 옮겨질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감사해서 눈물을 흘릴 겁니다. 자기 주인공이 그렇게 위대한 것을 그제서야 알고 그렇게들 좋아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도 오늘부터 그렇게 믿고 놓는 공부를 하세요. 차를 운전하고 다니는데 차가 주인이 아니고 운전수가 바로 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우리들 몸은 주인이 끌고 다니는 대로 끌려 다니는 차입니다.
여러분! 잘났든 못났든 자기를 믿으세요. 잘난 것 찾으러 다니지 말고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잘난 것 찾으러 다니다가는 못난 것도 건지지 못합니다. 생활 속에서 한 일 년 동안이라도 그렇게만 해 나간다면 정말이지 즐거운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겁니다.
현실이 없다면 미래도 없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승천하자고, 극락가자고 지금 빌겠습니까? 오늘 없는 내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즐거움이 있어야 내일도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냥 인상을 찌푸리고 무겁게 두 어깨에다 잔뜩 짊어지고 다니는 그런 삶은 삶의 보람이 없어요.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짊어지고 다니다가 다음에 극락가거라.’ 하고 49년 설하신 게 아니에요. 오늘 모르는데 내일 천당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기 근본에 모든 것을 믿고 맡기게 되면 마음이 푸근해지니 그게 바로 극락이자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서 행하는 것이 바로 중용이에요. 보이지 않는 곳과 보이는 곳을 싸잡아서 활용하는 것이 중용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내가 말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거짓이라면, 나를 믿으라고 하지 왜 여러분 자신을 믿으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부처님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 “네가 네 마음을 안다면 내 마음도 알 수 있느니라. 네가 네 가죽을 얻고 살을 얻고 뼈를 얻고 골수를 얻는다면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되는 것이니 둘이 아니니라, 그러니 걸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떨 때 난 떡 한 그릇, 물 한 그릇, 향 한 개비 꽂아놓고 천도해 주는 예가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좀 해 달라고 하면 “그래, 알았어.” 그러면 그만입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우리 스님들더러 “이 돈 어려운 사람들 나누어 주어라.” 하거든요. 아, 그게 얼마나 잘한 천도입니까? 다시 이 세상에 나올 때 무심 예금통장을 가지고 나오게 만들어 드리는데 그보다 어떻게 더 잘해요? 이게 거짓이라면 여러분 앞에 이렇게 앉아 있지도 않을 겁니다.
▲질문자1: 스님께서 주인공을 보려면 극락세계에 가는 것도 바라지 말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는데, 그러나 무명에서 해탈하지 못한 불우한 중생들은 혹시 지옥이나 무지한 짐승으로 떨어지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마음으로 다스려야 합니까?
▲스님: 육도윤회에서 지옥에 떨어지면 어떡하고 짐승이 되면 어떡하나 하지 마시고 과감하게 그걸 몽땅 놓으세요. 과감하게 놓아야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 원력이에요. 그렇게 하시면 처사님이 다시 탄생을 하실 겁니다.
여러분이 기복으로만 비는데, 비는 그 사람이 바로 영원한 자기 부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근본이 인간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거든요. 이 세상 살림살이가 전부 가설이 되어 있는데 마치 전기선이 가설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우주가 세포와 같은 법계란 말입니다. 지구도 얼기설기 거미줄처럼 되어 있어요. 없는 게 아닙니다.
▲질문자1: 스님께서는 육신통을 다 통하셨는데 저희들이 오늘 무슨 인연으로써 이 자리에서 법을 듣게 됐습니까?
▲스님: 과거도 미래도 없는 지금 인연이죠. 이렇게 만난 것이 인연 아닙니까? 무슨 과거를 찾고 미래를 찾습니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안다, 깨달았다는 말을 안 합니다. 어찌 여러분과 내가 둘이겠습니까? 작으면 작은 대로 여러분이 되어주고, 여러분이 작으면 나도 작고 여러분이 크면 나도 큰데 무엇이 거기에 붙겠습니까?
▲질문자1: 저희들이 세속 인연이 다해서 스님도 저희들도 이승을 떠난 후 언제 다시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스님: 삼천 년과 오늘을 대보니 합쳐져서 똑 같더라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 작년이니 올해니 하는 것이지 시공을 초월해서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하는데 거기 삼천 년이 붙을 자리가 어디 있고 오늘 내일이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요. 그대로 하나 하면 그냥 하나이고, 둘 해도 둘이 하나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어서 내생에 인연이 된다 안된다를 떠나서 참자기를 발견하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둘이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면 세세생생 끝 간 데 없이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으면서 네가 있고 내가 있으니 그 인연이 영원한 것이죠. 처사님하고 내가 둘이 아닌데 내생에 또 만나자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따로따로이겠습니까?
▲질문자1: 스님께서는 우주의 구조나 다른 혹성들의 이치와 그곳에 살고 있는 인종들의 세계도 알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혜안으로 인공위성이라든지 비행접시 등의 장비를 현대 물리학자들이 탐구하는 데 지혜를 제공하셔서 물질문명의 발전에 기여를 하셨으면 합니다.
▲스님: 비행접시는 한 차원, 두 차원, 세 차원 넘어간 사람들의 공학입니다. 마음으로 만든 것이지 물질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리드해 나갑니다. 이쪽으로 가자 하면 그냥 가는 것이지 운전을 하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볼 때 지구 안에서 만드는 건 물질입니다. 그런데다 정신이 통일되지 않은 문제, 즉 허공에 꽉 차 있는 생명들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물건을 못 만드는 겁니다.
▲질문자1: 물리학적으로 봐서 빛의 속도 미만에서는 자연과학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습니다만 빛의 속도를 초월하는 마음의 현상은 현대 이성에 입각한 자연과학에 의해서는 규명이 불가능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님: 이 공부를 해서 시험해 보세요. 교수님이 학교 강당에 들어가시면 강당 바른쪽에는 무엇이 놓여있다는 걸 지금 금방 보고 오실 수 있죠?
▲질문자1: 네. 그렇습니다.
▲스님: 바로 그겁니다. 또 댁에 가시면 바른쪽의 화단에 무슨 꽃이 활짝 피어 있는지 그것도 금방 보고 오실 수 있죠? 그와 같이 한 순간에, 한 순간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는, 빛보다 더 빠른 거예요. 빛보다 더 빠른데 한 쪽만 보는 게 아닙니다. 한 찰나에 전체를 보고 오는 그 맛이야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 해도 부처님께서는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질문자1: 그래서 현재 과학이 당면하고 있는 서구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스님 같으신 분들께서 그러한 혜안으로 중생들을 이끌어 주셔야 된다고 보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스님께서 미국에 오래오래 계시면서 크신 진리를 여러 나라 말로 번역해서 홍보 활동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님: 교수님께서 그렇게 마음 내신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무조건 주인공에 맡기면서 주인공만이 그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는 걸 믿으세요. 교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3개국의 언어에 손색이 없으시니 잘 하시면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마음도 사로잡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글이 나오게 될 겁니다. 죽은 글은 필요 없습니다. 살아 있는 글이어야만이 그 책 한 권을 보고도 꾸부러진 허리가 쭉 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질문자5: 스님, 금강경에 과거, 현재, 미래가 불가심이라고 했는데 절에 가서 스님께 생활이 참 어렵다고 말씀드리면 “보살님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습니다. 업장을 녹이면 괜찮아질 겁니다.” 하고 말씀하시던데요.
▲스님: 모두 공해서 돌아가는 것이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한다고 했는데 거기 업이 붙을 자리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다 공해서 돌아가는데 무슨 업이 붙습니까? 외려 업이 있다는 그 관념 때문에 업이 붙어 돌아가는 겁니다. 이제라도 제발 그런 데서 벗어나야 해요. 둘이 아닌 까닭에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고 했습니다.
▲질문자1: 스님께서 여태까지 한마음에 대해서 강조하셨지 않습니까? 스님하고 저하고 마음이 같은 상태에서 한마음이라고 그러셨는데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 한마음이 된 거 아닙니까?
▲스님: 여기 계신 분들뿐만 아니죠. 우주전체, 삼천대천세계가….
▲질문자1: 그러면 저같이 한마음이 안된 상태에서 한마음으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제 마음을 돌려서 스님하고 똑같은 위치가 되게 해 주세요.
▲스님: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부처님 생명과 내 생명과 댁의 생명이 다릅니까?
▲질문자1: 다르지 않습니다.
▲스님: 다르지 않죠? 그런데 어리석게 생각하기 때문에 얽매이는 겁니다. 그 얽매이는 것만 벗어난다면 똑같은데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몸까지도 몽땅 버렸어요. 그러시면서 “전부 나 아님이 없기에 작은 것 하나도 버릴 게 없네.” 하셨어요. 그 분의 자비는, 다 버리고 더 버릴 게 없으리만큼 자비라는 말도 붙지 않을 대자비 아닙니까? 그 뜻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지수화풍을 먹고 사는데 이 공부를 하지 않으면 감사함을 몰라서 공덕이 하나도 없습니다. 잘살든 못살든, 돈이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고통을 받고,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고통을 받으니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따로 있다면 어떻게 한마음이 됩니까? 부처님께서는 보살로 화해서 원하는 대로 응해 주셨습니다. 그걸 이름해서 32응신으로 나투신다고 하는 거예요. 부처를 어디서 구합니까? 중생들의 마음속에서 구하죠. 중생들은 부처님을 따라서 마음을 발견하고, 중생들 마음속에서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중생들이 있기 때문에 그 모두를 버릴 게 없이 얻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질문자6: 스님의 설법을 들은 건 한 두 번밖에 안되는데요. 불교를 전혀 모르는데도 하나의 생활철학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기 때문에 스님을 존경하고 자꾸 뵙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교육정도, 환경의 척도로 희노애락을 나누는 것이 전부 다 틀리고 진실된 게 없으니 그걸 다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갖고 진아를 발견하고, 또 지금 여러분이 질문하시는 걸 들으니 각자 자기 생각하는 걸 질문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스님: 아니 답답하지 않아요.
▲질문자6: 스님께서 말씀하시면 굉장히 시원함이 있습니다. 중생들이 희노애락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그 다음에 남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스님: 남아 있지 않으면서도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을 내놔 보십시오. 방구를 뀌셨으면 내놔 보십시오. 여러분이 여여하게 말하고 움직이고, 여기 오실 때에 발자취를 짊어지고 오셨습니까? 놔버린다, 버리지 않는다도 없이 그냥 걸어오시지 않았습니까? 살아가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뭘 걱정하십니까? 항상 그대로 여여하게 놓여지고 있고 돌아가고 있는데요. 그러기에 남아 있다, 남아 있지 않다하는 언어가 붙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뜻을 알고 그와 같이 해 나간다면 그 맛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장면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지만 내가 맛이 어떻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때서야 한번 시켜 먹어 봐야지 하고 생각을 내듯이 여러분이 직접 먹고 맛을 알아야 하겠기에 오늘 말씀을 드렸습니다.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알고 또 찾게 되는 것이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찾겠습니까? 그러니 오늘부터 그 맛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