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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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호지계
‘가르침’ 잘 지키고 전하기위한 규범
자비·용서로 해결안될때 ‘절복’허용

대승불교사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징 중에 정법을 호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의 계율로 규범화 시킨 것도 있다. 대승불교의 경전들 중에서 불성에 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는 <열반경>은 정법호지계의 주창자라 할 수 있다. 물론 대승경전에는 부촉품이 있어서 정법의 유통을 위해 힘써 달라는 내용이 강조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규범화 된 것은 아니다. <열반경>에 나오는 정법호지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만일 비구가 법을 파괴하는 이를 보고도 그냥 두고 달려가 꾸짖지 않으면 이런 사람은 불법의 원수다. 만일 달려가 꾸짖는다면 이들은 나의 제자요, 진실한 성문이니라.”
둘째,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법을 수호해야 한다. 법을 수호하는 과보는 한량없이 크고 넓으니라. 선남자여, 그렇기 때문에 법을 보호하려는 우바새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법을 지니는 비구를 옹호해야 하느니라. 설사 5계를 갖추어 받아지녔다고 하더라도 대승의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5계를 받지 않았더라도 정법을 보호한다면 대승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바른 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이나 병장기를 들고 법사(法師)를 호위해야 하느니라.”
셋째, “임금이나 대신, 장자, 우바새 등이 법을 수호하기 위해 칼이나 작대기를 지니더라도 그 사람은 계행을 갖는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왜 이러한 계율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먼저 정법을 파괴하는 사람을 보고도 방관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행동이며, 원수나 마찬가지라 정의한다. 정법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우바새가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고 주장한다. 5계를 수지하고 있더라도 법사를 보호하지 않으면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상에서 말하고 있는 경전의 내용에는 초기불교의 율장에서 가르치고 있는 계율의 정신과 어긋나는 내용이 있다. 무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가르침과 5계를 받지 않고도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가르침이 가능했던 것이며,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게 되었을까? 많은 연구가들은 초기불교시대에 편집된 경전과 대승불교 경전들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것은 경전을 편집한 사람들이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경전의 편집자들이 달랐다는 점에서 불교적 이념을 달리하는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초기불교 이념과 다른 불교운동가들을 대승불교운동가라고 후대의 불교사학자들은 명명하게 되었다. 이들은 초기불교의 이론을 더욱 실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득권층인 부파불교교단의 강한 비판과 압박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 물론 대승불교운동의 보편화는 대승불교운동가들 중에서도 다른 입장의 운동가들이 등장하며, 여기서 법의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이 첨예하게 전개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런 점에서 자파의 존립을 위해 압박과 비판에 거세게 대항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정법이란 무엇인가? 결국 자기가 속한 종파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초기불교 이래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4제 8정도와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입각한 4념처관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인가? 경전의 내용에 충실하자면 정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열반경>을 가르치는 법사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며, 경전의 가르침을 보호하고 실천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열반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정법을 수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정견(지혜)을 갖추고, 대승경전을 잘 설명하며, 임금에게 실수하지 않고, 이익을 위해 국왕이나 대신, 장자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시주자들에게 아첨하지 않으며, 위의를 갖추어 파계한 사람들까지 항복받는 것 등이다.
법사란 경전의 내용을 해설해 주는 사람이다. 따라서 경전과 법사는 동일시된다. 정법을 보호한다는 것은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량한 중생의 생명을 현양하기 위해 자신의 희생도 마다해선 안 된다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달리 칼이나 막대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수용해야 하나? 현대사회가 다양한 만큼 포용할 것은 포용하고, 항복시킬 것은 항복을 받아야 하는데 그 도구로 이용해야 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것을 절복(折伏)이라 말한다. 인생지사는 자비와 용서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은 데 그럴 때 부득이 무력은 사용하되 욕심이나 미움이 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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