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이 있기에 청정이 돋보이는 이치
‘집착’이 ‘화엄세계’파괴하는 근원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화단을 볼 때면 우리는 우선 그 찬란한 꽃들의 모습에 감탄함과 동시에 그 화단을 곱게 가꾸어낸 주인의 마음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이름모를 수많은 꽃들에 비하여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꽃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한편, 벌레 먹어 죽어가는 풀도 있고 잘 자라는 풀도 있지만, 벌레 먹어 죽어가는 풀이 있기에 배불리 먹고 잘 자라는 벌레도 있음을 생각할 때 다양한 이 세상 모든 것은 병든 것이나 건강한 것이나 모두 함께 있을 때 진정 구족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렇듯 자연계는 스스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름답다, 보기 싫다, 선하다, 악하다, 길다, 짧다 등등의 많은 기준을 지니고 분별하며 아름다운 것, 선한 것, 보기에 좋은 것, 그리고 청정한 것만을 취하려 한다. 그러나 소위 못난 것이 있어야 아름다운 꽃이 있는 것임을 알 때 우리는 못난 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오탁이 있기에 청정이 있음을 알 때 오탁과 청정은 상호의존의 관계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일한 것임을 알게 된다. 어찌 생과 사가 둘이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을 것인가.
따라서 우리 눈에 아름다운 것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화단의 아름다운 꽃 한 송이 만들고자 그 주위에서 솎아버렸던 튼튼하지 못한 꽃들과 이름모를 잡초들의 생명을 생각할 때 우리의 아름답다는 기준이 얼마나 인간만의 횡포이며, 더 나아가 소위 생명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의 취향에 맞게 자연의 생명체를 조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오만인지도 잘 알 수 있다.
이렇듯 자연은 삼라만상 모든 것을 각자 제 모습대로 그대로 여여히 드러내어 모두 다 제 몫을 하면서 제 모습대로 천하의 기틀을 보이고 있으며 이 세상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기에 구족한 것이다. 왜 내가 괴로움 속에 있어야만 되느냐고 묻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지은만큼 받을 뿐이니 무엇을 버릴 것이요, 무엇을 취할 것인가. 그것은 마치 장미만 있는 세상이 보기 흉한 것과 같이, 또 아름다운 꽃도 곧 지고 마는 것과 같다. 그리고 본디 괴로움도 아닌 우리의 환상이듯이.
우리의 고통과 죽음, 그리고 사물의 성주괴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는 생명과학은 허공꽃을 찾아 헤매는 격임을 알아 다양한 생물종으로 장엄된 이 화엄세계를 파괴하는 우리의 집착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비록 본 마음자리에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바 없으나 돌에 짓눌린 잡초 하나를 곧 바로 펴주는 한 손길, 주위에 헐벗고 고통 받는 이에게 작은 것 하나 해주는 우리의 마음속에 우주의 모든 사랑이 담기게 된다. 오늘도 이 화엄법계를 이루는 한 생명체로서 모든 생명과 하나로 존재함에 무한한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며 더 나아가 아름다운 꽃, 쓸모없는 잡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에게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되나니 나와 너의 기쁨이 온 우주의 기쁨이 되며, 너와 나의 아픔이 온 세계의 아픔이 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