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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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에서 솟은 부처님들
지하서 염불소리 들려 파보니 불상이…
출현방식 신라인의 토속신앙과 연관

안개 낀 어느 날 아침, 경주 시내에 있는 굴불사지 사방불을 찾았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부처님들이 바위 속에서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안개 때문에 그러한 환상이 보인 것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배경의 바위가 자연 그대로 다듬지 않은 상태인데다 불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기에 그러한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자연스러움을 살리려는 의도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처럼 자연스러움을 표현하는데 치중한 것일까? 그 궁금증은 <삼국유사>에서 풀 수 있다.
신라 경덕왕(재위기간 742~765)이 백률사를 가던 도중 산 밑 땅 속에서 나는 염불소리를 들었다. 하도 신기해서 그곳을 파보게 하니 사면에 불상이 조각된 큰 바위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곳을 불상을 파낸 절이라는 의미로 굴불사(掘佛寺)라 명명했다. 바위를 다듬어 불상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땅 속에서 불상이 출현한 것이다. 적어도 굴불사지 사방불은 그러한 느낌을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이 기사와 함께 실려 있는 사불산(四佛山)의 기사를 보면, 이보다 한술 더 뜬다.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사방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다. 하나는 땅에서 솟았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졌으니, 그 출현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표현된 굴불사지 사방불이 신라문화가 절정기에 달한, 석굴암과 불국사가 조성된 경덕왕 때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석굴암이라면 인공미의 절정을 보여준 대표적인 유적인데, 어떻게 자연스러움을 극도로 살린 굴불사지 사방불이 같은 시기에 공존한 것일까? 그러나 이 불상들이 서로 다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공통점도 있다. 그것은 당대에 유행했던 여러 표현기법을 한 유적에 종합적으로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서쪽의 아미타삼존불을 보면, 아미타불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양옆의 보살들은 두리새김으로 따로 만들어 세웠다. 반대쪽 동쪽에는 약사불을 새겼는데, 얼굴은 돋을새김으로 입체감을 충실하게 나타내었으나 점차 아래로 내려오면서 돋을새김이 낮아져 급기야 배경의 광배는 음각 선으로 파고드는 흐름을 보였다. 또한 남쪽에는 삼존불을 배치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왼쪽의 보살상이 떨어졌다. 나머지 불·보살상은 모두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통일신라 조각의 관능미를 보여주고 있다. 북쪽에는 미륵보살상과 십일면관음보살상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미륵보살은 돋을새김, 십일면관음보살상은 선각으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기법의 총합’이라고 할 만큼 당시 애용된 기법들이 다양하게 활용된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표현방식은 석굴암 조각들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니,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조각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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