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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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 버리면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어
어떤 생각이 올라오든지
모든 것을 다스려서 돌려놓고
누구에게나 이익되게 작용해야

주인공 발현해야 하는 이유?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견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주인공이 발현되어 내면의 이끎을 받는 그 자체가 견성인지, 아니면 주인공의 이끎을 받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결과적 현상으로 견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견성을 하였다는 스님들의 행적이나 어록, 또는 경전에서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스님들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는데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런 내면의 이끎이 없었던 것인지요. 없었다면 그 스님들이 말하는 견성은 무엇이며, 내면의 이끎이 없이도 견성할 수 있다면 주인공을 발현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질문을 참 잘했는데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 하면 경전에 담겨있는 내용을 파악해 가지고서 모든 것을 알아 경전을 통달한 것하고, 내 마음을 깨달아 증득한 것하고는 다릅니다. 경전의 말씀을 고대로 터득한 사람은 말을 유창하게 하고 모든 것을 다 유창하게 잘합니다. 다 잘하는데, 결정적인 문제에 가서는 해결을 못하는 겁니다.
예전에 경을 아주 통달한 어느 큰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을 전체 위로 꿰고 바로 꿰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닥치는 것을 어찌할 바가 없더라.” 이러셨어요. 그러고는 단식을 하시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도리와 경과 선과 교가 둘이 아니게끔 된 것은 다 모두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구랑신이 내려서 집을 못 짓는다든가 손이 있어서 이사를 못 간다든가, 터가 나빠서 집을 못 짓는다든가, 산소 자리가 나빠서 못 쓴다든가 이런 문제가 닥칠 때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꼭 당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법의 능력이, 나와 나 자체가 상봉을 했다면 그땐 선과 교가 둘이 아니에요. 일체 모두가 둘이 아니고 그대로 자유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대로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짓고 싶으면 짓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렇게 자유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한테 화두를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세상이 벌어졌지, 내가 없는데 무슨 종교가 있고 부처가 있고 세상이 있느냐 이거예요. 그러니 나부터 알아라 이거죠. 사대 성인들이 다 ‘너부터 알라’고 그랬어요. 너부터 믿으라고 그랬고요.
예전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했다지 않습니까. 병자도 많은데, 예전에 고치지 못하고 막 쓰러지는 병이 동네에 발생을 하니까 도대체 그냥 앞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거예요. 물러서서 생각을 하니까, 내가 이날까지 이론적으로는 다 배우고 알았는데 실질적으로 닥치니깐 이렇게 어렵더라 하고는, ‘그냥 나 하나 버리면 되지.’ 하면서 그냥 거기에 들어섰어요. 그러니 나 하나가 문제입니다. 나 하나 버리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 살아가는 것도 고정됨이 하나도 없습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그러니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그게 바로 그대로 공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대로 말입니다. 그대로 공했기 때문에 내 몸도 그대로 있지 않고 공해서 돌아가요. 고정되게 그냥 있지 않은 겁니다. 말하는 거나 가고 오는 거나 만나는 거나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어떤 걸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이름을 가졌을 때 내가 그 이름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아들이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언니라는 이름, 오빠라는 이름, 형이라는 이름, 아우라는 이름, 또 장가들고 시집가면 며느리라는 이름, 사위라는 이름, 또는 아내라는 이름, 남편이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 아버지라는 이름 뭐, 천차만별로 이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이름을 따라서 아버지 노릇 할 때에 나라고 할까요, 남편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아들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그러니깐 전부 공했단 말입니다. 나라는 게 없다 이 소리에요. 그래서 그 도리를 알면, 없다 하는 걸 알면 죽는 것이다 이 소리에요. 모두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알고, 그러니깐 모든 것은 고놈이 한다는 것을 알고 또 믿으라는 겁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하죠. ‘모든 일체를 다 거기서 하는 거니까 고놈이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고놈이 있다는 것은 고놈이 증명할 수 있다.’ 이러고 다 놓으라고 하죠. 그래서 나를 내가 발견해서, 과거의 내 조상을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나를 끌고 온 나를, 진화시킨 그 장본인을 말입니다. 그래서 둘이 아니게 부와 자가 상봉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마음 주인공을 믿고 일체를 무조건 거기다 놔야 된다, 맡겨야 된다 하는 겁니다. 무조건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화살을 쏘는데 똑바로 탁 들어가 맞아야 되는데 화살이 이리로 가서 맞고 저리로 가서 맞는다면 어떻게 그게 되나요? 전체 원을 해 놓고선 중심을 그냥 꿰뚫는 건데, 꿰뚫는 공부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뭣고? 이럭하는 놈이 뭘꼬?’ 이런다면 10년 20년이 가도 어려워요. ‘이놈이 모두 집어 먹고 가는 놈이로구나.’ 그러고 내놓는 놈이고 들여놓는 놈이고 ‘들여놓고 내놓는 거를 다 하는 놈이로구나.’ 하고 그대로 그냥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빠르다 이겁니다. 아, 그놈이 하는 건데 왜 인정을 안 하느냔 말이에요. 왜 믿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그리곤 ‘이뭣고?’ 하느냐 이 소리예요. 자기가 그대로 해가면서 지금 들이고 내고 해 가면서 왜 인정을 안 하느냐는 겁니다.
석존이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석존이 깨달은 거지 내가 깨달은 건 아닙니다, 각자. 만약에 나 자신을 모른다면 내 주장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기 때문에 못났든 잘났든 제일 가까운 것이 자기와 자기입니다. 자기를 깨달아야 석존의 마음도 역대 조사들의 마음도 중생들의 마음도 풀 한포기의 마음도 같이, 같이 공존하고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관세음보살 불러도 되나요?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불러도 되는지요?

사람마다 누구나가 다 자기 근본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불성입니다. 그래서 한 부처님도 한생각에 문수가 되고 한생각에 보현이 된다 이겁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여러분이, 가정을 가진 분들이 때에 따라서 어떠한 경우가 생길 때 자기 근본에 맡기고 놓으면은 관세음보살로 화해서 응신이 돼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또 좋은 데로 못 가서, 좋은 데로 가고 싶어서 ‘주인공 당신밖에는 좋은 데로 가게 할 수 없어.’ 이렇게 관하신다면 바로 자불이, 자성 부처님이라는 얘기입니다. 자성 부처님이 지장으로 화해서 다 좋은 데로 가게 하시고요.
그래서 우리가 매사 생활하면서 살아나갈 때에 내 마음에서 여러 가지 마음도 나오면서 이름도 여러 가지로 나오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아미타라는 그 이름은 정신세계를 말하고, 관세음이라는 것은 현상세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것은 이름일 뿐이지, 과거 정신세계나 현실세계나 둘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 정신과 몸이 둘입니까, 어디? 옛날에도 얘기했듯이 장갑을 낀 손이 어떻게 장갑하고 둘입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 한마음 속에 아미타도 들어 있고 관세음도 들어 있고 지장도 들어 있고 약사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둘이 아닌 까닭에, 모두가 하나하나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까닭에 일체가 다 가설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인연줄에 의해서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는 이 가설 말입니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독불장군이 없다고 했죠? 큰 게 있으면 작은 게 있고 작은 게 있으면 큰 게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깐 아미타나 관세음보살이나 바로 여러분 한마음 가운데에 실질적으로는 들어 있는 것을 믿고 한군데에 관한다면 모두가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미타가 따로 있고 관세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거를 그렇게 알면 됩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마타를 바깥으로 찾으면서 끄달린다면 그건 공부하나마나입니다. 그리고 공덕이 하나 없고 이익도 하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나를 발견하고, 발견해서 깨달으면 일체가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자유자재로 나투는 방법까지도 깨달아 가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바깥으로 관세음보살이 따로 있다고 찾고 아미타불이 따로 있다고 찾는다면, 여러분은 때에 따라서 집에서 아버지 노릇 하고 남편 노릇 하고, 또는 아들 노릇 하고 형 노릇 하고 사위 노릇 하고 이러는데, 어떤 거 할 때 관세음이라 하고 어떤 거 할 때 아미타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거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 내 마음 아닌 내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터득이 되는 거지, 내 마음 아닌 내 마음을 모르고서야 어찌 터득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정신세계를 간파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보살의 이름이 그렇게 많지만 바로 부처님 한생각에서 나온 방편의 이름입니다. 그러니 일체가 한 군데에서 나고 한 군데에 드는 것을 알고 일체를 오직 그 한 군데에다가 맡겨 놓아야 합니다. 모든 거를요, 일체 작은 거든 큰 거든지 다 말입니다.


왜 사고를 당하는지?

사람이 살면서 왜 사고를 당해야 하는지요? 마음공부 하는 사람이 사주를 논하는 게 아닌 줄 알지만 어느 사람으로 인해 눈을 다쳐서 앞이 안 보인다든가 귀를 다쳐서 들을 수가 없다든가, 또 머리를 다쳐서 정신이 이상해진다거나, 혹은 죽을 운명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사고를 당하여 바보가 되어야 하는지요?

그래서 자기가 모르고 지은 죄는 모르고 받게 마련이고 알고 지은 죄는 알고 받게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사람이 와서 날더러 묻기를, 아마 주역을 많이 공부한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는 말이, 주역으로 보니까 자기가 올해는 꼭 물귀신한테 잡혀 죽을 수인데 그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물귀신한테 말려서 당신이 죽게 되는 것도 당신의 마음이 물귀신한테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물귀신한테 말려 죽는 거다. 그러나 내가 물귀신한테 말려 죽는다는 것에 걸리지 않는다면 물귀신이 따로 없다.”고 하니까 날더러 외려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니까, 자기가 올해 물귀신한테 꼭 말려 죽을 거를 피하려고 물에를 안 갔는데 어느 날 아는 사람의 집에 초청을 받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집을 갔는데 계단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손님이 온다고 깨끗하게 아마 물로 다 쓸고 닦아낸 모양인데 그만 미끄러워 가지고선 계단으로 올라가다간 그냥 뒹굴어졌던 모양입니다. 그 물에 미끄러져 가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미끄러져 가지고 사오 년을 허리를 쓰지 못했다면서 이래도 날더러 믿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 말끝에 그랬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지혜가 없이 허공에 바늘구멍도 안 들어가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말리지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하는 소리가, 또 한마디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철모르는 네 살 박이 아이들끼리 놀다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네 살 박이 애는 죄지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거에 활을 잘못 쏘아서 남의 머리에 활이 들어가서 죽게 만들었는데 과거에 그렇게 했었던 것이 현실에 다시금 나와 가지고 탄생을 해서 어린애끼리 또 만나게 되었어요. 그랬는데 그 어린애가 모르고선 불집게로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냥 정수리가 찔려서 또 죽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쪽 죽은 사람은 과거에 활로 쏘아서 죽인 사람이고, 저쪽에는 모르고 또 연탄집게로 찔러서 죽였단 말입니다. 이것이 우연이냐 이겁니다.” 이게 우연이 아니거든요.
그 애들은 이생에 나와서 지은 죄도 없는데, 그거 걸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죽었느냐는 얘깁니다. 그것은, 과거를 못 보면 현실을 보랬다고, 모르고 지은 죄이기 때문에 모르고 그렇게 주고 받고 한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보이지 않으니까 내가 마음을 이렇게 써도 뭐 괜찮겠지.’ 하지만 인과의 도리에서는 어림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엔 어떻게 됐던지 간에, 미래는 어떻게 되든지 간에 ‘아이고, 오늘 내가 잘 살고 잘 저거 하면 되지.’ 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분수를 지키면서 내일을 생각하지도 말고 과거를 생각하지도 말고 오늘 현실에 내가 꾸준히, 많이 한다 적게 한다, 잘한다 잘 못한다를 떠나서 오늘 현실에 다가오는 대로 돌려놓고 간절하게 관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깐 자기도 그런 줄 모르고 행했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렇게 됐더라 하는 것도 그냥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고 과거로부터 스쳐 간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을 잘 커버해서 주인공에다 ‘이것이 모르고 그랬든 알고 그랬든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그러고 진실로 맡겨 놓으면 그쪽도 밝아지고 이쪽도 밝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지극하게 하다보면 스스로 맑아지고 하나하나 해결이 됩니다. 그러니깐 바깥으로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못쓰게 된 쇠들을 다시 용광로에 넣어서 녹이면 다 같이 녹아버린다 이런 게 있죠. 또 자석덩어리를 누구나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어떠한 거든지 거기다가 붙이면, 못 쪼가리든지 뭐든지 간에 거기 붙이면 그냥 한 자석덩어리가 돼버리는 거죠. 내가 잘못하고 네가 잘못하고가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안심하고 모든 거를, 나쁜 거든 좋은 거든 주인공에 맡기고 살라고 하는 겁니다. 잘 한 것도 주인공, 못한 것도 주인공! 다 그냥 주인공에다 맡겨버리면 나는 훨훨 털고 그냥 날아다니죠. 왜 괜히 짊어지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했다고 원망하거나 미워할 것이 아니라 주인공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믿고 맡기면서 좀더 편안히 사시기 바랍니다.


이성을 대하는 마음자세

신문을 통해서 공부해 나가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계실 때, 어느 제자가 어느 날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하였답니다. “부처님! 여자를 대해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바라보지 말아라.” 또 질문하기를 “마주 보아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하시기를 “말하지 말아라.” 그러니 제자가 “말해야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지막으로 대답하시기를 “제자야! 네 마음을 다스려라.”라는 대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만, 이것이 일반 신도들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부여돼야 하는지 궁금해서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여쭈어 봅니다.

그것은 아직 자라지 못한 아이들한테 계율을 설하는 것과 같은 얘깁니다. 아직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도 무조건 이럭하지 말아라, 이럭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나 같습니다. 그건 왜냐? 아직 어린애한테 그것을, 만약에 여자다 남자다 하는 것을 가르치게 되면 아니 되고 또 그건 부정한 일이니까 자라지도 않은 애들한테 그렇게 할 수는 없거든요. 자라고 난 뒤에는 저절로 또 대답이 달라지겠죠.
그런데 우리가 선에는, 이게 지금 마음공부예요. 여자 남자가 따로 없다, 동·서가 따로 없다, 과거와 현실도 따로 없다. 또 높고 낮음이 따로 없다, 길고 짧음이 따로 없고 가난하고 부자고 따로 없이 공부하는 겁니다, 이게. 그래서 참선이라고 한 거예요. 그리고 무심도리를 공부하라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욕정이라든가, 또는 다르게 일어나는 어떠한 문제를, 자기가 안팎을 잘 헤아려 봤을 때에 이게 나한테 옳지 않다 하는 것을 알면 다스려서 거기다 맡겨 놓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바람직하다 이겁니다.
모두 봐서 이것이 잘된 거다 하면은 그대로 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잘못된 거다 하면은 거기다 맡겨 놓고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게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선 놓을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러면 금새 바꿔지게 돼요. 이것이 거짓말인 줄 알지 말고 진실로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보도록 하세요.
부처님께서 그렇게 대답을 하신 것은 아직 어른이 되기 전에 그런 대답을 하셨을 거고, 또 제자의 근기에 따라 단계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른이 다 되었으면 대답할 것도 안 할 것도 없는 거죠, 뭐. 그때 가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 할 게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건 그 자체가 일어난 주처, 자기 주인공에 돌려놓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관하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공부하는 생명들에 대해서

스님 말씀이나 다른 경전들을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들도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과 다른 생물이 다른 이유는 과거에 쌓아온 업과 습의 차이와 그 두께가 다르기 때문이며, 그 본래 성품에는 차이가 없으므로 인간이 습과 업을 녹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생물들도 그 모습 그대로 역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다른 생물이 인간의 몸을 받기 위해서 그 생물의 몸을 버리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지요.

아주 간단하게 여러분 몸속에 있는 그 생명들을 한번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일체 만물에 대한, 일체 만생에 대한 문제를 다 얘기하자면 아주 거추장스럽고 복잡하니까 자기 속에 있는 그 생명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지금 이 몸에 들은 모든 생명 의식들은 나쁘고 좋은 걸 몰라요. 사람처럼 이렇게 잘못되게 내가 하면 안 된다 이런 걸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예요. 그런 거와 같이 모든 게 인간이 돼야만이 부처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소립니다. 마음 하나 바꿔놓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 100%지만, 또 백지장 하나 사이의 마음가짐을 두고 인간이 중생이다 부처다 이러는데, 인간이 되기 이전에 짐승이다 이런다면 어떻게 부처 될 수 있겠어요, 단번에? 그러니까 연쇄적으로 자꾸자꾸 올라오면서, 또 인간이 잘못했을 때는 저 아래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짐승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자꾸자꾸 돌아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인간이 됐다고 해서 인간만이 지속적인, 끝간 데 없는 진리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마음에 따라서 인간이 짐승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뭐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나오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가지고 나왔다 하면 인간이 되기가 어렵다, 우리는 부처 되기 어렵고 짐승들은 인간 되기 어렵고 그런 거죠. 또 미생물에서는 미생물에서 나는 짐승이나 육지에 다니는 짐승 되기가 어렵다 이거죠. 이렇게 그 습이 자꾸, 뱀 소굴을 봐도 뱀으로 살던 습이 많기 때문에 그 모습을 털어내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겁니다. 쥐도 그렇고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참답게 살아나가는 습을 길러야 하고 선덕을 쌓아야지, 악덕을 일삼으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가지고는 오히려 짐승의 모습을 타고나게끔 자기가 자처한다 이 소리예요. 이 모습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틀림없이 이렇게만 하면 된다 이거예요. ‘남한테 이익하게 생각을 해줘라. 이익하게 행동해라. 이익하게 말해라. 또 없는 것을 좋은 일 한다고 꾸면서까지 주는 거는 그것은 미덕이 아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자기 환경에 따라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지혜를 가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부처 되기가 어려운 것은, 마음 한번 제대로 못 굴리기 때문이다 이거예요. 바깥으로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면서, 안으로는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한다고 믿고 맡기는 것조차도 거기다가 맡겨 놓고, 영원한 친구, 친구라고 해도 되죠. ‘영원한 친구야! 네가 이날까지 나를 이끌어 왔고 지금도 이끌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안되는 것도 너한테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 아니냐. 너밖에 없어. 네가 나를 이끌어 가고, 가정을 화목하게 하고, 네가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모든 걸 거기다가 맡겨 놓는 그 작업을 하면서 한꺼풀 벗어날 수 있도록 공부하세요.
보이는 모습이 촌챙이나 짐승이라고 해서 그것들만 동물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습을 받아 가지고 나왔으면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외려 동물보다 더 못하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거침없이 행동해도 되는지?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행동을 할 적에 거침없이 행동을 해야 된다고 저는 그렇게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 거침없는 행동이 잘못하다보면 어떨 때는 막행막식이 되어서 업을 짓게 되는데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러니깐 생각을 다스리라는 말이 생겼잖소. 자기가 봐서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이든지 남들이 봤을 때 그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일이든지 간에 ‘야, 잘못된 생각이 왜 떠오르게 하느냐. 이 잘못된 생각을 굴려서 다시 그렇지 않게 하는 것도 당신만이 할 수 있어!’ 그러곤 딱 돌려놓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다스리는 작업이에요.
어떤 생각이 올라오든지 모든 것을 그렇게 다스려서 돌려놓고, 남한테 이익하게 하고 나한테도 이익하게 하고, 부모한테도 이익이 되게 할 수 있는 그런 작용이 되게 하라는 얘기입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무엇이 잘하는 일인지 무엇이 잘못하는 일인지 다 알 수 있으니까 잘못돼 돌아가는 거는 자꾸 다스려서 맡겨 놓고 잘되게끔 생각을 해서 올바르게 활용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선이 되는 겁니다. 그야말로 참선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공덕을 쌓는 거구요.
거침없이 행동을 한다고 하면서 상대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거나, 또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거침없는 행동을 한다거나, 자기 자신에게 누가 되게 하고 스승님에게 누가 되게 하면서 거침없는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어디에고 걸림이 없이 행동을 하는 것은 어른이 돼서 늙고, 늙어서 다시 세 살이 되고, 또 세 살이 돼가지고 다시 한 살이 돼야 거침이 없이 행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단전호흡 도장을 하고 있는데

스님, 저는 지방에서 단전호흡 도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공부를 하다가 보니까 몸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둘 아니게 다룰 수 있어야만이 완전한 공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지도하면서도, 그것들을 실제로 체험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얘기한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또 양심의 가책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 고민이 되는 것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그 도장을 계속 운영을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그것이 고민이 됩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그렇게라도 회원들을 이끌어 가면서 그대로 다시 가르치세요. 마음 깨우침은 일체 만법을 다 카버하고 증득하고 물리가 터져야 하는 공부입니다. 그런데 이 몸 하나 어떻게 하자고 하다보면 잘못되는 수가 또 많이 있습니다.
단전호흡을 해서 나쁜 기를 바깥으로 모아서 나쁜 거를 빼지 않는다면 그거는 병이 되고 마는 겁니다. 잘못되면 기가 머리 꼭대기로 올라가서 병신이 될 수도 있는 그런 한계점이 오기도 하구요. 그런 사람 많이 봤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니 되니까 앞으로도 남을 이익하게 이끌어 가야죠. 그렇지 않고 단순히 기의 흐름만을 쫓아간다면 외려 해를 주기 똑 참한 일이에요. 다른 것도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단전호흡 시킨다고 몸을 붙들어 앉혀놓고 그렇게 한다면 그건 안 되지요. 그러니 그 도장에서는 마음도리로서 잘 가르쳐서, 모두들 마음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서 잘 가르치면 문제가 생기지 않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해요. 남을 이끌어 준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고 열심히 하면서, 선원에 나와서 공부할 시간이 없으면 책도 있고 또 신문에 나가는 법문도 있으니까 진실로 끝간 데 없는 진리에 관한 건이 그대로 살아있도록 그대로 반영을 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공부의 맛을 보고 체험을 하다 보면 도장에 와서 수련하는 사람들도 한순간에 감응이 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사람도 잘못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받아들이는 데 따라서 생수가 될 수도 있고 썩은 물이 될 수도 있어요. 전에도 얘기했지만 지금 이 모습들을 가지고 얼마나 살겠습니까? 백 년을 살겠습니까, 천 년을 살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이론으로 알려고 하고, 머리론만 알고 지식적으로만 알려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모두 다들 잘 안다고들 하지만 실천하기는 칠십 팔십이 돼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모두 열심히들 해서, 칠십이다 팔십이다, 스무살이다 열 몇 살이다 하는 거를 떠나서 우리는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체험을 해보고 느껴봐야 맛을 알게 됩니다.


왜 놓는 과정이 필요하나요?

스님의 자비심에 귀의해서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 이렇게 질문을 올립니다. 다른 게 아니라 공부를 하는 게 너무너무 힘이 듭니다. 너무 힘든다는 생각이 올라오니까 먹기도 싫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부처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가 나를 만들었는데 제가 왜 법의 고통을 받아야 되고 왜 끄달려야 합니까? 난 그 자체에 대해서 내 주인공한테 못마땅해서 놓기가 싫어요. 왜 놓는 과정이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아니, 그렇게 놓는 것과 받는 거를 둘로 보니까 그렇게 복잡하고 어지러운 것 아닙니까. 본래는 놓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건데 그렇게 생각으로 공부를 하려니 머리가 아프고 밥맛이 없을 수밖에요. 그런데 그 자리는 놓기 싫고 놓기 좋고 하는 말이 붙지 않는 자리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매 순간순간 일체를 그 자리에 놓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입니다만, 여러분이 걸음을 걸을 때 한 발짝 걸었으면 그냥 또 한 발짝 떼어놓을 뿐이지, 아니 뒷발자국을 생각하면서 걷습니까? 아니면 뒷발자국을 가지고 다닙니까? 그냥 한 발 한 발 걸어갈 뿐인데 거기에 무슨 놓고 말고가 있습니까? 그렇게 살고 있는데도 자꾸 생각에 걸려 넘어지고 말에 걸려 넘어지고, 보이는 데 걸려 넘어지고 들리는 데 걸려 넘어져서 아프다고 하니까 일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자유롭게 사시라고 놓고 가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원래 우리는 놓고 살고 있다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놓는 놈과 받는 놈이 어디 둘이던가요?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자면 바깥의 일이 있고 안의 일이 있으니까 바깥 경계와 내면 세계가 있어요. 그러면 이것이 둘이 아니면서도 둘로 불리우지 않나요, 네? 그러니까 그걸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어찌 숨을 쉬는 것만 쉬는 거고 내쉬는 건 내쉬는 게 아닌가요? 숨을 들이쉬는 거와 내쉬는 것이 둘이 아닌 까닭에 둘인 거에요. 그게 호흡하고 작용을 해야만이 생명을 유지하니깐 말입니다.
그러니까 숨을 들이쉴 때도 잘 들이쉬어야 사레가 걸리지 않고 편안하고, 숨을 내쉴 때도 잘 내쉬어야 목에 걸리지 않고 잘 내쉴 수 있는 것처럼 올라오는 생각도 잘 다스려서 놓아야 머리가 아프지 않고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도 공부하기가 어려워서야 어찌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얘기입니다만, 어렵긴 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못 먹겠다, 뭐 먹히지 않는다 이러는데, 들이쉬고 내쉬는 그 자체 양면의 작용함을 하나로 안다면 먹히고 안 먹히고가 모두 한군데서 나온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잘 먹히는 것도 안 먹히는 것도 다 마음의 작용, 양면의 작용이에요. 그런데 몸이 없으면은 공부를 못한다 이겁니다, 부딪침이 없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끼니 때는 먹어야지 무슨 소립니까.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시자를 그렇게 함부로 먹이질 않고 굶겨서야 되겠어요?
그러니까 늘 얘기하듯이 그 어떤 생각이 올라오든지 그 생각이 어디서 올라온지만 안다면 다시 그 자리에 맡길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고, 앞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끄달리지 마세요. 그리고 시간이 날때마다 선원에 와서 법회에도 참석하고 또 스님들 만나서 공부하는 얘기를 듣고 그러면서 편안하게 공부하도록 하세요. 자유롭자고 공부하는 건데 그렇게 법의 고덩어리를 하나 더 덧붙여서야 어찌 공부인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200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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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