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시대에는 각 부파에 따라, 각각 자파의 입장에 따라 의지하는 율전의 차이가 있었듯이, 대승불교에 들어오면 대승불교운동가들의 신념 내지 운동 지역에 따라 의지하는 계율에도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대승불교로 대변되는 많은 대승경전들은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이념을 추구하던 사람들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도 전역에 걸쳐 독자적인 특징을 보이며 발전한다. 공통의 이념이 있다면 6바라밀에 입각한 보살사상이었으며, 계율은 적어도 십선계를 수지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초기대승불교시대의 마감과 중기대승불교시대로의 발전은 계율에도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대승불교운동의 시작은 재가자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어서 대승불교운동에 동참하는 출가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출가자들의 참여는 대승불교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층이 다양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출가자와 재가자가 지키는 계율이 다른 점에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출가를 했다는 것은 250계를 이미 수지했다는 의미이다. 재가자는 250계를 수지하지 않고, 5계나 십선계에 의지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의 이념에 공감하고, 보살사상을 실천하는 일에는 함께하는 출가자가 등장했던 것이다. 출재가 사이에 이념은 하나였지만 사회적 신분이 다르기 때문에 지켜야하는 계율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출가자가 250계를 버린다면 그것은 환속을 의미했다. 그래서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계층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삼취정계(三聚淨戒)는 대승불교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에서 출가자와 재가자 계층을 하나의 이념으로 묶어 주기 위해 등장하는 것으로 본다. 우선 삼취정계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고 다음 이야기를 진행해 보기로 하자. 삼취정계는 세 가지 성격의 계율을 모두 포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섭율의계, 섭선법계, 섭중생계가 그것이다. 여기서 섭율의계는 악을 방지한다는 의미의 지악문이라고도 말한다.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계율뿐만 아니라 십선계, 5계, 10중 48경계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결국 계율이란 사회적인 악을 방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해석한다. 반면 불교교단사의 입장에선 출가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시설된 것으로 말한다. 두 가지 주장이 모두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섭선법계란 다른 말로 수선문이라 표현한다. 선을 닦는 방법이란 의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몸과 입과 마음에 걸쳐 일체의 착함을 실천하게 만드는 계율이다. 섭중생계란 다른 말로 요익중생계라고 부른다.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시설된 계율을 지칭한다. 자비심을 바탕으로 일체의 중생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안락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보살행이 그것이다.
여기서 섭율의계는 소극적으로는 악을 방지하는 지악문이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악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도 하다. 섭선법계는 착함을 실천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섭율의계와 섭선법계를 합쳐서 스스로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의 자리문(自利門)이라 말한다. 섭중생계는 중생을 섭수하기 위해 보살행 내지 자비행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의 이타문(利他門)이라 말한다.
자리와 이타는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이것은 위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표현한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자리이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이타이다. 삼취정계에서 말하자면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섭율의계와 섭선법계를 지켜야 한다. 동시에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굳은 신념과 실천이 필요하다.
삼취정계는 대승보살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계율로 강조되고 있다. 행동거지와 생각을 조심하기 위해 노력하고 경계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을 편안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삼취정계를 순서에 입각하여 설명했지만 그것은 단계적인 것은 아니다. 동시적일 수도 있고, 개별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은 섭중생계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섭하고, 포용한다는 의미에서 섭이란 접두어를 공통으로 사용한 것이다.
계율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5계, 십선계, 250계를 지녀 자신을 청정한 생활로 이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회향이 없다면. 어떻게 회향할 것인가 하는 방법은 제자들 각자가 자신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실천하면 될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