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단상
만남은 설레임으로부터 시작되어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야 제 맛이다. 설레임, 두근거림이 없는 만남이 어디 제대로 된 만남이겠는가. 어릴 적 손꼽아 기다리던, 가슴 깊은 설레임으로 맞이했던 것이 추석이었다. ‘더도 덜도 없이 한가위 같기만 하라’던 말은 그러한 추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내 또래의 육촌형제는 20여명이 있었는데, 추석날 아침 제사가 시작되면 모두들 머리 속엔 제사상 위에 올라온 배를 차지할 생각뿐이었다. 5번 절을 하고 음복을 하는지, 아니면 7번 절을 하고 나서 음복을 하는지에 대하여 큰집으로 가는 동안 서로 다른 학설을 주장하곤 했다. 그리고 큰할아버지께서 ‘이제 음복들 하세요’하고 말씀하시면 모두 단거리 주자가 되어 배를 집기 위해 달려 나가곤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들은 두 신세로 확연히 달라지곤 했다. ‘배를 들고 의기양양해서 걷는 사람’ 그리고 ‘형아 한입만을 외치는 사람’으로. 그렇게 배를 차지하기 위해 뛰어 나가기가 어색할 나이쯤 되면 철이 들었고, 그렇게 철이 들어도 추석을 기다리는 마음엔 여전히 설레임이 있어 좋았다.
‘벌초대행 1기당 ○만원’ ‘제사음식 대행 1상당 ○만원’이란 문구의 플래카드를 이젠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조상의 산소를 찾아 벌초하는 마음, 음식을 장만하며 조상님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 온 가족이 고향에 모여 훈훈한 정을 나누는 모습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처럼 벌초를 대행하고, 차례상을 맞추어 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콘도나 해외에서 차례를 지내는가 하면,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한다.
일부에선 추석이 연휴의 개념으로 변해가고 있다. 올해 추석연휴 시작인 13일과 14일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표는 이미 동이 났다고 한다. 유럽 일본 중국 노선은 최고 113%에 달했다. 이처럼 연휴를 즐기기 위해 차례를 추석 전이나 다음주 일요일에 지내기도 하는데, 그것을 ‘샌드위치 차례’라고 한단다. 이런 추세라면 아마도 ‘제사 대행업체’ ‘성묘 대행업체’도 수년 내에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시대에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시대의 개척자이자, 변화의 흐름에 순응하는 자들이고, 합리적으로 앞서나가는 자들인데. 그러나 그들에겐 잃어버린 것이 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본능 중에 간직하고 있는 회귀본능 말이다. ‘삶의 놀이’는 인연이 모여 있는 모습으로 잠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다시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흙이다. 조상은 사라진 자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삶의 놀이’를 하고 간 자들이며, 또 우리가 다시 가야할 자리이다. ‘고향과 조상을 잃은 자’들이야 말로 어쩌면 돌아갈 곳을 잃은 불쌍한 자들이다.
‘기다림을 즐길 수 있는 자’들이야 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귀경길이 길면 어떠랴! 그 긴 시간을 설레임으로 충만시킬 수 있다면. 그 옛날 마을운동회가 끝나고 밝은 달밤에 마을 뒷산에서 가슴 콩콩거리며 만났던 갑돌이 갑순이도 생각하면서, 참외서리 닭서리하다 붙잡혀 혼이 났던 추억도 되새기면서, 밝은 달 쳐다보고 가다보면 고향에 다다르지 않겠는가.
차창 속에 비친 달이 아름다우면, 문득 ‘나의 진짜 고향은 어디이지?’하고 돌이켜본다면 그건 또 불자(佛子)다운 낭만이 아니겠는가. 우리 불자들만이라도 참 마음의 고향을 설레임으로 그리워하고 있다면, 남들이야 달나라에 가서 제사를 지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