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3.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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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이론으로 논하지 말고 직접 쪼개서 먹을 수 있어야
이 몸뚱이 가지고 한 철 사는 동안 온 힘을 다해서 이 도리 배워야

▲사회자: 오늘은 여러분이 그동안 공부하면서 의문났던 점이나 평상시 스님께 여쭙고 싶었던 것을 간략히 질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마음은 본래 청정(淸淨)하다 했는데 왜 부처와 중생으로 벌어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스님: 청정하다는 것은 그냥 깨끗하다고 해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들의 눈물이 강으로 모이고 바다로 모이고, 또 빗물과 핏물, 고름물, 깨끗하고 더러운 물 등 모든 것이 다 한데 합쳐서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는 “내 어찌 청정함을 알았으리까?”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청정한 걸 알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한테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 놓으라고 말을 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맡겨 놓지 않으면 한 곳에서 들고 나는 청정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면 청정함도 모르니까요. 그러므로 모두 공생 공용 공체 공식 하면서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그 이치를 깨닫는 지혜가 바로 청정입니다.
▲질문자1: 청정하다는 것은 물들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스님: 예, 물들지 않고 그대로 같이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질문자1: 스스로 자연 그대로, 본성 그대로 된다는 말씀입니까?
▲스님: 예, 자연 그대로입니다.
▲질문자1: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법성삼보(法性三寶), 자성삼보(自性三寶)에 심청정시불(心淸淨是佛)·심광명시법(心光明是法)·심무애시승(心無碍是僧)이라 했는데, 그 의미를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스님: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불법승 삼보(三寶)를 구절로 한번 읊어 볼까요.

백화꽃은 두루 만발하여
깊은 뿌리, 뿌리 이어가고
푸른 물은 흘러흘러
깊은 속에 용이 들고 나니
유구한 새 물결은 돌고 돌아
그윽하게 법이 되니
일체 마음, 꽃이 피어 붉게 익었으니
산천초목 푸르름은 같이 화합해서
생동력에 춤을 추고 노래하니
역사가 달라질까 하노라.

누구나가 다 이렇게 모든 것을 같이 할 수 있고, 같이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선맥을 이어서 공부하는 지금의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도 뿌리가 있으면 줄기가 있고 잎이 있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한생각을 내서 그대로 걸림없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곧 법이고, 올바른 행을 하면서 실천해 나가는 우리가 바로 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리를 모른다면 부처님의 참다운 뜻을 한 치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법승 삼보라고 이름해 두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이듯, 삼보도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뿌리 한 몸으로서 쉴새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항상 새 물이 들어오므로 고였던 헌 물이 흘러나가듯이, 우리들 마음속에도 계속 새 물이 들어오고 고인 물이 나가고 해야만이 마음의 인등이 켜지는 것이고, 또 그 인등의 밝음으로 앞장서서 모두를 이끌어 나갈 수 있으니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더불어 밝게 살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라는 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깊은 생각 하지 않고, 연구를 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절대로 못하는 공부입니다.
한마디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국토도 바로 내 몸인 것입니다. 내 몸만 내 몸이 아닙니다. 이 땅에 태어났으니 조국이자 내 집이며 내 몸인 것입니다. 그러니 삼보의 뜻을 깊이 생각해서 내 몸인 국토를 잘 지키면서 화합하여 돌아가다 보면 내 몸속의 모든 중생들은 바로 보살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속의 중생들을 제도 못한다면 어떻게 외부의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알라, 나부터 믿어라, 그러면서 다가오는 모든 경계를 나한테 맡겨놔라, 모든 것은 한 군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 한 군데에다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과거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배이고 배인 습이 녹아지고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듯 한생각에 놓을 수 있고, 또 그렇게 놓을 수 있다면 거기서 벗어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과일로 비유한다면, 과일이 크든 작든 맛이 있든 없든 앞에 다가오는 대로 먹어야 되는데, 겉은 파랗고 속은 하얗고 빨갛다고 말로 이론으로 논하지 말고, 아무 말 없이 직접 쪼개서 그냥 먹어 보십시오. 어떠한 것이든 먹어치우십시오. 그러다 보면 하나 먹어 보고 ‘아! 이런 맛이로구나.’ 하고 알게 되고, 또 하나 먹어 보고 ‘아, 이건 이런 맛이 나네.’ 하고 그 맛을 알게 되는 거죠. 아무리 갖가지 종류의 과일을 먹더라도 여러 곳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입 한 곳을 통해 먹어 보고 맛보는 것처럼, 그렇게 실험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대로 여러분이 직접 모든 맛을 보게 되면, 그때는 한마음 속의 무르익은 열매에서 만 가지 맛을 내도 손색이 없습니다.
만 가지 맛을 낼 줄 안다면, 즉 ‘둘이 아닌 까닭에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이로되,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있노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뭐가 있느냐? 무르익은 열매는 만 가지 맛을 내니 접시에 담아야 할 것은 접시에 담아주고, 컵에 담아야 할 것은 컵에 담아줄 수 있는 그러한 중용이, 말 한 마디를 해도 그대로 법이 되고, 생각을 한 번 내도 법으로써 모든 중생을 이끌어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인등을 밝게 켜 들고 앞장서서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변해가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욱 깊이 이 뜻을 감지해서, 뒤에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리드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음을 자각하고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질문자1: 좋은 말씀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스님: 질문하실 분은 또 하십시오.
▲질문자2: 관하는 것에 대해서 여쭤보겠습니다. 일체를 관해야 한다고 하는데, 일체가 무엇이며 무엇을 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 일체라는 것은, 요즈음 대부분 보면 일체가 화두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서 화두를 받아 가지고 그것이 끊어질까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일체라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와서 지금까지 찰나찰나 화해가면서 모든 상대와 더불어 둘 아니게 돌아가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우주도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일체 같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체를 놓고 관하라는 것이지, 내가 나더러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공이 나를 수억겁 광년 거쳐 오면서 형성시켜 왔고, 진화시켜 왔고 또 여기까지 운전해 왔습니다. 그러니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그렇고, 생각 하나 하는 것도 그렇고, 행동 하나 하게 하는 것도 그렇고 이끌어 가는 것이 다 주인공이니까 그 속에서 나온 것 그 속에 닥쳐오는 대로 되놓고 지켜보는 것이 바로 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맡겨 놓는다면 앉으나 서나 그 곳이 바로 도량이요, 자기 있는 곳에 바로 자아부처(自性佛)는 있는 것입니다. 자아부처부터 알아야 우리 마음속의 모든 생명들이 화합해 주기 때문에 바로 보살로 화해서 남의 국토도 내 국토와 둘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태초요, 이 세상에 나온 것이 화두입니다. 그런데 그 화두마저도 공했다 했거늘,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라 했거늘, 남에게서 화두까지 받아가지고 ‘이 뭣고’ 하고 들고만 있으니, 직접 먹어 보지 못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공부해도 허사입니다. 오늘날에는 걸맞는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자에는 그것이 씨가 먹혔지만 요즘 사람들은 머리에 알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요. 과학·천문학·지리학·의학 등 고도의 학문을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공부하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좌선을 하되 안으로 관하면 같이 돌아가지만 밖으로 끄달린다면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하게 됩니다. 지금 시공을 초월해서 모든 소용돌이가 이렇게 돌아가는데, 즉 지구가 돌아가고 혹성이 돌아가고 우주가 돌아가고,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이 돌고 돌아 고정됨이 없는데, 그 도리를 모르고 아무리 하루 8시간 앉아 좌선한다 해도 이 뜻을 바로 알고 단 5분 앉아 있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옛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눈을 뜨되 위로 올려다보지도 아래로 내려다보지도 말고, 코끝을 내려다보며 정연하게 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바라보라.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되 중심을 잡고 중도에서 똑바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그런지 남의 말만 듣고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석존이 이 자리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 형상을 믿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 속에 향상 한자리하고 있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는 내 마음부터 꿰뚫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는 존재를 버리고 아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체를 들이고 내는 그 한 곳에다 일체를 맡겨 놓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직껏 살아오면서 어느 것 하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있었습니까? 보는 것을 고정되게 보았습니까? 듣는 것을 고정되게 들었습니까? 그렇다고 먹는 것을 고정되게 한 가지만 계속 먹고 살았습니까? 아니면 말하는 것을 고정되게 말하면서 살았습니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또 사람을 만나는데 있어서도 장소나 만나는 사람에 따라 말과 생각과 행동이 순간순간 변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꼭 꼬집어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는 부처가 없으므로 부처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는 일체를 관하라고 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관하는지조차도 모른다면, 어떻게 참나를 발견하며, 상황에 따라 하나하나 풀려 나오는 습을 녹일 수 있으며, 생동력 있게 모든 생물들, 즉 사생과 더불어 우주와 더불어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내 몸뚱이 집과 대천세계의 집이 둘 아닌 도리를 어떻게 체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자기를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이끌고 다니는 자기를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는 모든 일체를 거기에서 해나가니 거기에다 믿고 맡겨 놓으라는 겁니다. 셋째는 거기만이 모든 걸 원만하게 할 수 있으니 다가오는 대로 아프면 의사가 되어 주시고 약사보살이 돼주실 것이고, 가난하면 관세음이 돼주실 것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부처님의 한마음 안에서, 내 몸 안의 모든 중생들이 화해서 천백억 화신으로 나투니 털구멍을 통해 바깥으로 나고 들면서 생사에 뛰어들어 다른 모든 중생들을 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서 생사에 뛰어들듯이 그렇게 보살의 마음이 되어 고통받는 중생들을 살리기 위해 뛰어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마음을 낼 때에 이 몸은 무명으로부터 애착심이 생겨서 병이 나는 겁니다. 문수보살과 유마힐 거사 사이에 있었던 얘기가 있지요. 문수보살이 “무슨 인연으로 병이 생겼으며 어떻게 해야 병이 낫겠습니까?” 하고 유마힐 거사에게 물으니 유마힐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중생을 위해 생사에 뛰어들었으니 보살이 어찌 아프지 않으리까. 중생들의 병이 없어지면 보살 또한 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 밑에 서려 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문수보살이 물었던 말도, 유마힐 거사의 대답도 백지에 그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백지를 볼 수 있다면 무심과 유심이 둘 아닌 도리를 그대로 깨달을 수 있고, 세세생생 보살로서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부터 발견하고 체험을 통해 당당한 주장자가 섰을 때, 내 몸 안의 모든 중생들이 전부 보살로 화하고 마음 하나에서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보살들이 나투게 되니 그 얼마나 무량수와 같은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들이 수없이 많다 해도 불성은 하나입니다. 양쪽 손에 돌을 들고 ‘탁!’ 쳤을 때 불이 일어났다가 그냥 없어지긴 했으나 그게 한데 합쳐서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만 명이라 할지라도 한 명이요, 억만 명이라 할지라도 한 명이요, 그 하나도 이름해서 하나지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그 하나입니다.
그래서 관하라는 겁니다. 한 군데서 들고 나는 것이니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바깥으로만 끄달리고 방황하기 때문에 요새는 이렇게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용광로에 사용할 수 없는 헌쇠들을 넣어 녹인다면 갖가지의 도구로 다시 재생되어 나오는데도 그것조차도 믿지 못하니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인 자기를 믿지 못하는 탓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주인공 용광로에 모두 넣어라. 그러면 용도에 따라 바뀌어서 다시 나올 것이다.”라고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빠르디 빠른 지금 세상에 앞장설 수 있는 인등이며, 마음의 향기로운 향이며, 밥 한 그릇 놓고 모두를 먹이고도 한 그릇이 되남을 수 있는 그런 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위세계와 유위세계를 같이 계합해서 부처님의 마음과 중생의 마음이 따로 없이 중용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참선한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달라요. 하루 종일 움직였기 때문에 마음이 끊어졌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으면 난 그때 빙긋이 웃음이 나옵니다. 일체가 한 곳에서 나고 든다고 했거늘 어찌 걱정할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 하루 종일 움죽거리게 한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따로 뭐가 또 있습니까? 저녁에 시간이 나면 한 시간이나 삼십 분 정도 앉아서 몰입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잊어버렸느니 끊어졌느니 하고 좁은 소견들을 내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시간과 공간이 초월됐는데, 둥근 톱니바퀴가 아래 위가 맞물려 돌아가는데 거기 끊어짐이 붙을 자리 어디 있고, 어어짐이 붙을 자리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끊어지고 잊어버렸다는 생각 내기 이전에 그 생각이 순간 날 때에 톱니는 24시간이라는 것도 없이 그대로 돌아갔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하루 종일 일을 했어도 누가 일을 하게 만들었느냐는 겁니다. 바로 내가 한 것입니다. 누구 딴 사람이 시킨 게 아니라 바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가 하고 내가 그 일을 했던 것입니다. 소도 언덕이 있으니까 비비듯,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부처가 있고 모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는데 이 세상에 뭐가 있을까요? 내가 나를 시자 부리듯 부렸지 누가 부렸습니까? 나라는 그 놈이 시킨 거죠. 그 놈이 시킨 거고 그 놈이 하는 거니까, 그 놈의 집이니까, 난 그 놈의 시자니까 어쩔 수가 없이 모든 것을 놓고 맡기고 그냥 순응해서 따라갈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두 진리에 순응하라. 그리고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어야 한다.’ 맥박이 뛰듯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데 거기에 순응하지 않고 항상 ‘이 뭣고?’ 하며 바깥으로 생각하고, 이게 잘못됐느니 저게 잘못됐느니,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하고 따지다가는 몸뚱이 떨어지면 그 또한 떨어지는데 그때는 어떻게 할거냐 이 겁니다. 지금의 의식을 가지고 몸뚱이 떨어지면 그 의식 그대로 눈 멀고 귀 멀어서 아무 데나 들어가서 아무 모습이나 가지고 이 세상에 다시 나오니 그 모습 벗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내 말이 틀리면 모두 항의하세요.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또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석존과 유마힐 거사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것은, 입산한 스님이든 아니든 마음이 있는 모든 것은 다 불성이 있고 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 부처님과 유마힐 거사는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니기에 모습은 방편으로써 부처는 부처대로 유마힐은 유마힐대로 그 역을 맡아 가지고 나온 거지요.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뿌리는 같은 뿌리이나 모습이 각각이기 때문에, 스님이 아닌 경우에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중생들은 거둘지언정 또 말없이 거둘지언정, 보이는 곳에서 이끌어 갈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기에 방편으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입니다. 안과 밖을 다 이끌어 주려고 말입니다. 그것 또한 우리가 대장부로서 해야 할 일입니다.
무명에 가리워져 화하는 도리를 모르고 자기라는 집착으로 중용을 모르면 모든 것이 붙어 돌아가게 됩니다. 붙어 돌아가는 동시에 그걸 자꾸 떼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는 것은 칼로 물 베기라 어디 그게 끊어지는 것인가요. 진리에 순응하면서 틈을 주지 않아야 하는데, 폭포수가 흘러서 바다로 돌아가는데 그 흐르는 물에 틈이 없듯이 진리에 순응하는 우리의 마음에도 틈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즉 관하는 걸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귓전으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한시도 게을리 하지 말고 일체를 맡겨 놓고 관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신통이 재료로 갖추어져 있으므로 내가 마음대로 굴레에서 벗어나서 굴릴 수 있는데도 모든 번거로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는 것, 가고 오는 것, 남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남의 과거를 전부 아는 것, 모두 도가 아니라 했습니다. 심안으로 본다 해도 도가 아니라 했으니 거기에서마저도 벗어나야 다섯 가지 재료를 마음대로 굴리면서, 중생들을 안아주어도 바퀴만 굴려 나간다면 그냥 건져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걸 받아들여도 두드러지지 않고 모든 걸 내놔도 줄지 않는 반면에, 모든 중생들의 그릇을 알고 용도대로 안아주며 응해 주시고,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주기도 하고 뺏기도 하는 거지요.
주어도 자비요, 빼앗아도 자비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자기 정신으로 살지 않는 정신병을 앓는 사람에게서는 주장자를 빼앗아야 합니다. 그래야 잠이 드니까 말입니다. 또 불종(佛種)을 심어서 날듯 말듯 하는데 만약에 길러 주지 못하면 안되니까 그걸 길러 주기 위해서는 주장자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너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주장자를 너에게 줄 것이로되 너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내가 빼앗아 올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의 뜻이 참 깊습니다. 주장자는 세워졌으나 용도에 따라 굴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스님께서 주장자를 준다면 활연히 개오(開悟)가 된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네가 주장자가 있다면 내가 네게 주장자를 줄 것이로되’한 것은, 말하자면 ‘네 물이 얕아 작은 고기밖에 놀 수 없으니, 깊은 물에 큰 배를 띄울 수 있고 큰 고기가 놀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내가 너에게 주겠노라.’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그런 뜻이 서려 있는 것은 모르고 그 말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습관은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문·연각 2승(二乘)들은 자기 불종을 개발해서 배출시킬 줄 모르고 자기만 혼자 편안하게 아방궁처럼 들어앉아서 더불어 키우지 않으니 불종자를 아주 삶아 먹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넓게 생각해서 밖으로 끄달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나온 곳에 되놓고 지켜본다면 거기에서 바로 체험이 되면서 그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과실을 먹고 돌아가는 거지요.
▲질문자2: 감사합니다.
스님: 한마디 물은 것에 대해 이렇게 길게 대답을 한 것은 다른 분들에게도 설법을 겸하기 위한 것입니다. (질문자를 향해) 다리가 아프겠네요. 미안해요. 또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아주 모두들 도인들이 되셔서 아무 말이 없나 봅니다.
▲질문자3: 저는 이번에 불교에 처음으로 입문하게 되는 대학 신입생입니다. 종교, 특히 불교에서는 물질세계보다는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은 정신세계가 아닌 물질세계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물질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이라는 학문이 무의미한 것이 됩니까?
▲스님: 아니죠. 정신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 있는 거죠. 정신이 없다면 물질이 나올 수가 없고, 물질이 없다면 정신도 없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둘이 아닌 까닭에 연구를 할 수도 있는 거예요.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한 쪽을 버리고 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문학의 경우 천체망원경으로 본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한계가 없는 도리를 알아야 한 찰나에 천체, 우주를 탐험하고도 남음이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내가 읊은 시 아닌 시의 뜻이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꽃은 붉게 익었으니 산천초목도 푸르러서 한마음으로 춤추고 노래하니 역사도 달라질 거라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뜻이 깔려 있어요.
우리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하지만 여러분한테는 자연적으로 모든 자료가 다 갖추어져 있다는 거를 알아야 하는 거죠. 오신통이라는 자료 말입니다. 지수화풍이 허무하다고 하지만 지수화풍을 바탕으로 자력·전력·통신력 또는 광력의 재료가 충만하게 있기 때문에 그런 오신통도 나올 수 있는 거죠. 각종 연구도 할 수 있고, 천체물리학도 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생활할 수도 있는 거죠. 우리 마음의 도리를 바로 알면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이치를 알게 되죠. 요즘 나온 불교 방송국도 과학의 생활화라고 볼 수 있죠.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방송국 얘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하죠. 불교방송국이 개국되어 방송이 나오고 있는데, 종전과는 달리 찬불가 한 곡을 짓는다 하더라도 단순한 노랫말이 아니라 진실하게 노래 한마디 부를 때 우주법계가 쩡하고 함께 돌아갈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꾸준한 작업을 통해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전파될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냥 ‘꽃이 피었네. 꽃이 피었네’ 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었네.
꽃이 피었네.
내 마음에 꽃이 피었네.
두루두루 꽃이 피었네.
붉게 익는다면,
삼라만상 우주법계
그리고 우리 생활면에 모두 선도자가 돼서
우리는 뿌리를 이어가고 중용을 이어가면서
앞으로 세세생생 거룩한 길 걸으리.

이러한 노랫말을 지어야 어린이가 부른다 할지라도 세계의 모든 마음을 함께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그런 법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세세생생에, 이 한 몸뚱이 가지고 한 철 사는 것, 이 몸뚱이 있을 때에 온 힘을 다해서 이 도리를 배워라 이거예요. 이 몸뚱이 떨어진다면 지금 물질적으로 살던 의식이 남아서 어디로 들어갈지 모르는 거예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니까 어디에고 막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소에게나 돼지에게나, 뭐 아무 데나 들어가서 그 모습을 가지고 나올 때 다시 사람이 되기란 극히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열심히들 해요. 알았죠? 납득이 안 가요? 그리고 처음 온 어린 학생들은 잘 들으세요.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예요. 내가 없다면 부처님 법도, 가톨릭 법도, 기독교 법도 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타의에서만 꼭 끄달리며 찾으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할까요? 기복으로 가서는 절대 나를 발견할 수 없고 나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명심해야 합니다.
나한테 재료를 다 두고도 먹고 싶은 대로 다 해 먹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람, 즉 말하자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인간으로 왔던 길에 그냥 갈 수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네?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놓아라. 즉 공부하는 것도 그 속에서 하게 하는 거니까 놓고, 노래하는 것도 놓고, 모든 내 행동 하나하나 하는 거, 효도하고 충성하는 것도 다 내 주인공 안에 있으니 거기다 맡겨 놓으면 돼요.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내 주인공에 다 맡겨 놓고 ‘당신밖에 할 수 없어.’ 하고선 뛰어라 이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대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 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지 진실로 믿고 놓는다면 녹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남이 만든 상표는 잘 믿어도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자신은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종교라는 이름조차도 상표입니다. 위대한 것을 보면 굽실굽실 절을 하고, 거지를 보면 외면하며 고개를 높이 쳐드는 습관도 좀 놓아버려야 합니다. 모든 아픔을 내 몸 아픔과 같이 생각하고, 나 역시 수억겁 광년을 미생물로부터 거쳐 오면서 쫓기고 쫓기며 얼마나 울고 얼마나 아팠었던가. 그리고 여기까지 진화시키느라고 내가 나를 얼마나 아프게 했던가. 그러니 그때의 내 모습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져야 우리는 보다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겁니다.
또 질문하실 분 없습니까? 우리가 질문을 하게 되면 이런 게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여러분과 나는 도반인 것입니다. 서로 공부한 것을 토론하고, 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질문함으로써 우리는 서로 지혜가 넓어질 수도 있고, 바로 통달할 수도 있고, 좀더 넓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때요?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 침묵) 도인이 된 것 다 알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도인이라 할지라도 들고 나지 않는다면 도인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안이하게 그냥 있으면 안 됩니다. 알면 아는 대로 실천궁행하면서 해나갈 수 있는 그 넓은 마음을 그대로 넓게 가지고 넓게 보고 넓게 행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죠.
우리는 한 철 와서 한 철 살다가 가는 인생입니다. 지금 이 몸뚱이 가지고는 한 찰나로 살아요. 그런데 한 찰나의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족하지 뭘 그리 더 바라겠습니까? 집이 크고 좋으면 뭘 하고, 좋은 보석이 있으면 뭘 합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죽고 사는 것도 그렇고, 보석이 산더미같이 있다 하더라도 왜 그런지 담담해요. ‘저런 걸 가지고 울고불고 하는구나. 한 철 다 살지도 못하고 가을이면 낙엽 떨어지듯 바람에 날려서 사대가 다 흩어질 것을 왜들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울 때가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 한 그릇에 숟가락 열 개를 꽂아 놓고 먹는다 하더라도 껄껄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면, 밥이 생각 할 때 ‘요걸 가지고도 너희가 넓고 기분좋게 생각하며 참다운 지혜로써 나가니 내가 더 와야지.’ 하고선 그냥 밥이 술술 들어오게 됩니다. 하하하.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천리를 보고, 가만히 앉아서 자력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없는 사람 것을 끌어오면 안 됩니다. 넉넉히 있는 사람의 것을 스스로 오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료가 다른 혹성에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추운 데 사는 생명체들도 있고, 더운 데 사는 생명체들도 있고, 뜨거운 데도 사는 생명체들이 있습니다. 생명체 없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그러니까 모두 눈에 보여야만 있는 줄 아는 그런 마음을 버리고, 좀더 넓게 써서 모두가 두루 살고 있다는 점을 아셔야 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도 중생들이 꽉 찼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럼 이것으로써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회자 : 질문은 세 사람이 하셨지만 듣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 마음 깊이 새기고 더욱 열심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200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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