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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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선계
불교에서 말하는 선악의 기준은 무엇인가? 육조 혜능스님은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않아야 도를 깨우칠 수 있다”고 말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혼란에 빠뜨리기도 했다. 도에 선악이 없다면 구태여 인간이 선을 지향하며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교에는 선악의 기준이 없다고 말해야 하는가?
불교윤리에서 말하는 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속적인 선이다. 두 번째는 절대적인 선이다. 이것은 절대선이라 말하기도 한다. 세속적인 선은 일상 윤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성격의 것이다. 그러나 절대선은 그 성격이 다르다. 선과 악을 초월한 개념이다. 세속적인 도덕률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넘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인간의 의식 속에 있지만 인간들의 고정 관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을 불교적인 전문 용어로는 해탈이라 말한다. 혹은 열반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무엇이나 인식의 전환이라는 깨우침을 통해 사물의 한계를 통찰할 때만이 열반의 체득은 가능하다. 불교윤리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에 있기에 세속적인 선악의 개념과 구분한다.
불교에선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속적인 윤리는 지역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이것은 인간들의 의식이 바뀌면 자연스럽게 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윤리도덕의 기준도 무상한 것이기에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며, 현재 우리들이 절대적 윤리판단의 준거로 생각하는 것들도 항상 바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재 나의 판단 기준과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고 하여 배척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며, 나의 판단만이 절대적이라 고집해서도 안 된다.
현실성을 감안하여 부처님께서는 열 가지의 기준을 제시하게 된다. 그것은 언어와 행동, 그리고 우리들의 의식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입, 몸, 마음의 세 가지 행위라는 의미의 3업이라 표현한다. 여기서 언어와 행동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어떠한 행위를 막론하고 행위의 이면에는 각 개인의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의지는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여 그를 해치고자 할 때, 그것이 욕설이나 주먹질 등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상태로 그칠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각 개인의 의지가 무엇 보다 중요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의지가 어떠하냐에 따라 용서할 수도 있지만 반면에 폭력이나 전쟁도 가능하다. 겉으로 전개되는 모든 행위의 이면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의지의 여하에 따라 행위의 형태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부처님은 각 개인의 의지에 주목하게 된다.
열 가지 기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언어에는 거짓말, 꾸밈말, 이간질, 아첨이 있다. 신체적인 행동에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혹은 음행)이 있다. 의지에는 성냄(분노), 탐욕, 어리석움이 있다. 이러한 열 가지를 항목 중의 어느 하나인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악한 행위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열 가지 착하지 않은 행위라는 의미에서 십불선업(十不善業)이라 말한다. 반대로 거짓말 하지 않고, 꾸밈말 하지 않으며, 이간질 하지 않고, 아첨하지 않는 것, 나아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 하지 않으며, 삿된 음행을 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탐욕하지 않으며, 지혜로운 것을 열 가지 착한 행위라는 뜻에서 십선업(十善業)이라 말한다. 결국 선과 악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으되 우리들의 의지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로 판가름하게 된다.
열 가지 선악의 기준이란 매우 현실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함께 살아가는 주변인들에게 심리적, 육체적, 정신적 해악을 끼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의지인데 그것은 모두 각 개인 자신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성냄, 욕심, 어리석음에 떨어지는 것은 모두 개인적인 판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절제와 선정과 지혜에 의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끊임없는 자기 수행이 결국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그 정화된 마음이 자신의 행위로 표출이 되며, 그 행위가 사회성을 지니면서 사회의 변화에 어떠한 형태로든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열 가지 선악의 기준은 항상 변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절대적 기준은 될 수 없다. 궁극적인 선이란 우리들의 심성을 도야해서 그 결과 얻어지는 열반뿐이다. 개인적 열반을 통해 사회적 해탈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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