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만복사지
남원은 옛 사람들의 생사를 초월한 사랑과 절개가 갈무리된 곳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며 그 사연과 상처를 소설로, 판소리로 넋두리하던 곳이다. 박석고개, 오리정, 광한루, 눈물방죽… 옛 정인(情人)들의 발자국마다 배롱나무 꽃잎같은 사연이 묻어나고, 덕유산, 기린봉 눈 길 닿는 곳엔 석류나무와 감나무의 터질 듯 망울진 열매들이 청실홍실 푸른 하늘을 수놓고 있다. 사랑도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남원 땅 요천 뚝에 몰래 핀 접시꽃 같은 사랑 하나 불태워야 할 것이다.
비구름이 잠시 지리산 중턱에서 머뭇대는 사이, 8월의 끝자락을 에둘러 남원 땅에 다가선다. 남원 길은 초행이라도 낯설지 않다. 몸 보다 마음이 앞서 다녀간 듯 광한루 돌 주초, 물 때 앉은 오작교 돌이끼조차도 체온이 느껴진다. 남원에 오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 듯 하늘은 자꾸 글썽여도 마음은 맑아진다. 목 잠긴 쓰르라미 울음 귀에 거슬려도 물잠자리 가는 허리 눈길을 붙잡는다.
스님 수백명 거처한 거찰
춘향의 사연 일색인 남원의 밑그림은 기린봉 끝자락 만복사지(사적 제349호)에서 시작된다. 세월의 징검다리인양 주초만 점점히 놓인 만복사지는 동편제 열두마당 부채살을 펼쳐놓은 듯 아련하다. <춘향전>이 여성의 정조를 노래한 것이라면 만복사를 무대로 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만복사저포기>는 남성의 정조를 다룬 명혼소설이다. 춘향이 남원의 여주인공이라면 남원의 또 다른 남 주인공은 <만복사저포기>의 ‘양생’이어야 합당할 것이다.
만복사지는 덕유산 자락인 기린봉 기슭 나지막한 산자락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잔잔히 흐르는 요천의 여울을 거느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절터이다. 고려 문종(1046~1083) 때 창건된 사찰로 한 때 수백의 스님들이 거처하던 거찰이었다. 그러나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당시 왜구에 의해 소실되어 복원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만복사지는 남원 시내에서 24번 국도를 따라 순창으로 가는 왕정동 도로변에 위치한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만복사지는 창건 후 수차례에 걸쳐 중창된 것으로 보여 진다. 목탑지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각각 금당지가 있는 1탑 3금당식의 가람배치로 고려시대 사찰 가운데 유일하게 절의 구조와 양식을 알아볼 수 있는 유구가 남아 있어 고려시대 가람연구의 대표적 사료가 되고 있다.
마을과 도로로 포위된 절터에 이르면 제일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하는 것은 길 옆 철책에 갇힌 석인상이다. 한국인의 미소라고까지 격찬을 받기도 한 석인상의 미간은 더는 매연에 견디기가 고통스러운지 일그러진 표정이다. 196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전신이 3.75m에 달하는 이 석인상은 몸통의 대부분은 땅 속에 묻혀 생매장 당한 채 무슨 인고의 긴 수행을 감내하는 듯 하다. 이 석인상은 절터에 남아있는 다른 석인상과 함께 당간지주와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인상 아래쪽으로 내려서서 절터에 들어서면 소박하고 거대한 당간지주가 만복사의 사세가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제32호인 이 당간지주는 높이 3m의 장방형 돌기둥으로 조각과 장식이 전혀 없으며 창건당시의 것으로 여겨진다. 당간지주 뒤쪽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추정되는 중문터가 남아 있고, 중문터 뒤로는 동쪽 5층 전각인 목탑 터가 발견된다. 이 목탑 터 왼쪽에는 석대좌(보물 제31호)가 있는데, 이 석대좌 위의 불상은 35척의 청동불상이었다고 전해진다. 발굴 복원 작업으로 제법 잘 정리되고 관리되는 듯 한 만복사지는 또한 보물 제30호인 오층석탑이 동금당터 뒷쪽에 자리 잡고 있다.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를 올린 이 석탑은 1층 몸돌이 다른 층에 비해 유달리 높은 것이 특징이다.
만복사지 뒷켠에는 1979년 새로 지은 보호각 한 채가 서 있는데, 이 전각 안에 높이 2m의 석불입상(보물 제43호)이 모셔져 있다. 자연석 화강암을 그대로 이용하여 불상과 광배를 함께 만들었는데 오랫동안 무릎까지 파묻혔던 흔적이 보인다. 광배 뒷면에는 크게 음각된 약사여래의 입상이 원만한 코, 살짝 머금은 미소 등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매미’, ‘중상골’ 등 여러 지명이 있어 전성기의 사찰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의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하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썩은 밥매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만복사에 기거하는 승려의 수가 엄청났음을 말해준다. 또한 저물 무렵 하루의 시주를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얼마나 장관인지 이를 ‘남원팔경’의 하나로 꼽았는데, 이제 그 세월이 무상하여 귀승(歸僧)의 행렬 대신 꼬리를 문 차량들로 그림이 바뀌었다.
생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매월당이 세상을 방랑하다가 유랑생활을 접고 스님이 되어 만복사에 들어 호롱불 심지를 돋운 것은 <금오신화>를 저술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는 중국의 전등신화를 모방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작중의 인물 설정이나 장소가 모두 우리 국토이기에 시공을 초월하여 친근감을 불러일으킨다. <금오신화>에는 모두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특히 남원 고을을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는 탁월한 문장과 흥미로운 사건 전개로 하여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사람들에게까지 고전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수차례에 걸친 발굴과 복원 끝에, 철책과 보호각으로 반듯하게 정리된 만복사지에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티끌들이 있다. 중심부에 놓인 등개석 설명과 보호각 안의 석불입상 배면의 약사여래에 관한 설명을 엉뚱하게 부재, 좌상이라고 잘못 표기한 것이다. 문화재의 복원과 관리를 형식에만 치우치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바른 예우가 아님을 되짚어 보게 하는 부분이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사진=고영배 기자
다음은 남원시 주천 용담사지편
만복사지터 가는길
남원은 88고속도로가 시의 중심을 지나고 있어 전남북과 경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전라선의 모든 열차도 남원역을 거쳐 간다.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만복사지는 남원에서 순창방면 24번국도 방향으로 철교 밑 옥정교를 지나면 길가 도로변에 위치한다. 서울에서는 경부선을 타고 천안 논산간 고속도로를 이용, 전주방향에서 1시간가량 달리면 춘향터널을 거쳐 남원시내로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