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계 자기는 정신계 자기를 믿고 오직 거기다가 맡기고 길을 걸어라
이 세상 누구에 의해 움직이나?
문
다른 종교에서는 지구나 모든 만물이 어떤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얘길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억겁의 윤회를 거쳐 가면서 인간이라는 몸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그러면 불교에서는 자연법칙을 그대로 순응하는 겁니까, 아니면 부처님의 힘이나 그 누군가의 힘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나 모든 만물이 움직인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까?
답
뭘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보이지 않는 세계가 50%라면 보이는 세계가 50%예요. 그래서 이런 게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도 그렇지만, 음과 양이 한데 합치고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한 사람이 태어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지는 동시에 어떤 것이 필요하느냐 하면, 자기 영혼이 거기에 계합이 돼야 합니다. 즉 자신말입니다. 자신이 계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역량에 따라서 아이가 출중하냐 안 하냐가 달려 있습니다.
참 묘한 법이죠.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하나만 남고는 나머지는 물로 돌아가 그 물질 자체가 다 없어지고, 한데 합쳐진 그 하나에서 모습을 바꿔서 다시 수억 마리가 되니 말입니다. 두 사람의 정자와 난자 속에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 인간의 몸 하나에 또 수억 마리가 들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대표로 대장을 하나 바깥으로 내보낸 겁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몸뚱이를 하나 내놓고는 그 몸뚱이 속에 내가 수억 마리가 돼 가지고 또 있습니다.
그러면 몸뚱이 속에 있는 내가 옳습니까, 현재에 나와서 사는 내가 옳습니까? 우리가 표면적으로 볼 때 말입니다. 내 속에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그 생명들과 지금 이 육신의 생명이 따로 있습니까? 내 뱃속 오장 육부 속에 있는 생명들이 진짜 생명입니까? 어떤 것이 진짜 내 생명입니까? 그래서 신은 여러분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한마음의 자성신이 수십억도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죠. 어느 나라에 아주 급한 일이 생겼는데 50억의 군사가 나라를 먹어치우려고 쳐들어오고 있었답니다. 이쪽 나라에는 군사가 10억뿐이니 저쪽에 비하면 아주 적은 군졸들이죠. 그러니 질 게 뻔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쪽 나라에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야, 저 50억을 10억이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는가. 같이 대항하자면 40억이 더 많아.’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래서 한생각 하기를 ‘모습 없는 모습이여! 그쪽에 50억이라면 나도 체가 없으니 50억이 될 수 있지 않는가. 모습 없는 내 모습이 그쪽 모습 있는 데로 가서 내가 된다면 50억이 싸움할 일도 없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한생각을 하면서 피리를 부니까 그쪽에서 전부 그 피리 소리를 듣고 ‘야, 우리가 싸움을 해서 뭘 하냐.’ 이런 생각이 그냥 들어간 거예요. 다시 말해서 50억이 전부 피리 부는 사람 한 사람이 돼 버린 거죠. 아시겠어요? 피리 부는 한 사람이 50억이 돼 가지고 뿔뿔이 다 헤어지게 한 거예요. 그러니 싸움을 할 수도 없고, 이기고 지고 할 것도 없는 게 됐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라에 의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를 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이라는 것은 30억 년 전이나 지금 현재 여러분의 자성신이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로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입니다. 차를 끌고 다니는 것을 예를 들어봅시다. 신이 기름이라면, 기름은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도둑질을 하러 가든 말을 안 합니다. 근데 마음내는 그 놀음은 운전수에 달렸어요. 이리로 가든지 저리로 가든지 망해먹든지, 이건 운전수가 끌고 가기에 달렸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사람에게 짐승의 허물을 쓰게 하느냐, 다시 사람의 허물을 쓰게 하느냐. 또는 비상한 인간으로 만들어 놓느냐, 또는 한 나라의 왕이 되게 하느냐. 이런 것도 보이지 않는 데서 다 하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대로 자연 법계에서 벌써 주어져요.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아이고, 사람 살기 귀찮아서 어떡하나.’ 하고 말입니다. 죄가 있다 없다, 유전이 있다 업보가 있다, 내가 얼마나 죄를 많이 졌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나, 내 팔자가 어떤가, 운명이 어떤가 이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왜냐? 자성신은 생각 내는 생산처란 말입니다. 체가 없는데다가 체가 없는 걸 놓을 때에 모든 것이 다 녹아져 버려요. 예를 들어서 자석에다가 자석을 붙이면 다 한 자석이 되듯이 그냥 없어져 버려요. 그러면 없어져 버리는 동시에, 즉 체가 없는 것이, 체가 없는 생각을 잘하면 다 녹아 버리는 동시에 생각을 좋게 자기 분수에 맞게 잘 내면 생산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삼천 년 전의 신이 따로 있고 지금 현재의 자기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 저 높은 어디에 신이 계신다고 한다면 자기 신은 능력이 없고 부처님 신만 능력이 있는 줄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한생각을 하는 데에 따라서, 기름은 본래 주어져 있는 거니까 여러분이 차를 잘만 끌고 다닌다면, 한생각 잘 해서 잘 끌고 갈 수만 있다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사고 나지 않고 돈 벌 수 있는 거죠.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한생각을 하고 낼 수 있는 그 자성신에 의해서 우주 공간 안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체가 다 될 수가 있고, 천차만별의 신이 내 신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랬답니다. 뇌물을 가지고 가서 바치니까 “야, 이거 못 받겠다. 난 이런 거 안 받는다. 내가 해 줄 수 있으면 그냥 해 줄지언정 이건 받지 않겠다.” 하길래 “아무도 없는데 뭘 그러냐?”고 하니까 “너하고 나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 네가 없고 나만 있어서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 우주 전체에서 알고 있는 것인데 어찌 없다고 하겠느냐. 내 마음에서 아는 것을 전체가 알고 있거늘 어찌 그렇게 치사하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줄 테니까 짐 무겁게 해주지 말고 이거 가지고 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살지 마세요. 여러분이 생각 하나로 인해서 그냥 짐을 잔뜩 무겁게 짊어지고 살기도 하고, 또 한생각을 잘해서 괴롭지 않고 아주 편하고 가볍게 살 수도 있으니까요. 알고 보면 괴로운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법문을 통해서 주인공에 관하는 방법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생각의 흐름과 감정의 흐름을 잘 지켜보는 것을 관하는 거라고 생각하여, 생각의 흐름이나 감정의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게 관하는 것인지요? 틀리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게 관하는 것인지 가르침 주시길 바랍니다.
누구든지 앉아서 관하든지 서서 관하든지 누워서 관하든지 일하면서 관하든지 바로 들어간다면 참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관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서, “지금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한마음 주인공밖에 없어” 그렇게 믿고 그 자리에 맡겨 놓는 것이 관이에요. 관해 본다, 관해 듣는다, 또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말하고 있다, 움죽거리고 있다 이런 걸 이름 해서 관세음라고 이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관세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각자 나를 먼저 발견해야 하니까, 나부터 알아야 하니까, 진리 속에서 참구해서 알아야 하니까 내가 있는 것을, 즉 말하자면 내 집에 전화부터 놔야 남의 집에 전화도 할 수 있고, 또 내가 남의 전화도 받을 수 있듯이, 나부터 먼저 믿고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있다는 것을, 과거 살던 내 근본 불성 자체가 있다는 것을 주인공, 너만이 알게 할 수 있다.’ 하는 게 참구하는 거고 관하는 거예요.
그렇게만 알고 진실히 공부해 나가다보면 그 다음에는 일하면서도 관하게 되는 거죠. 사람이 살아나가면서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애로가 닥치는데, 누가 아프다든가 뭐 별의별 게 다 닥치죠. 그런데 그렇게 닥치더라도 ‘거기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하고 거기 맡기고, ‘거기서만이 이끌어줄 수 있고 화목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서 나올 수 있다.’ 하고 모든 걸 하나로 둥글려서 놓고 가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또 우주만물 천체가 내 도량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되니 비로소 관한다는 말조차도 붙지 않는 자기 근본자리를 발현하게 되는 겁니다.
없는 것을 새롭게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여러분이 모르고 또 못 믿으니까 관하라고 하는 거고, 믿으라고 하는 거고, 일체를 맡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로 믿고 물러서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거기다 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맡겨 놓아야 나의 근본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정혜쌍수에 대해서
문
정혜쌍수(定慧雙修)라 하여 선정과 지혜가 같이 가야 하고, 자비와 지혜라는 바퀴가 같이 굴러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왜 같이 가야 하며, 같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
예전에 어느 큰스님께서 눈 뜨고 푹 자야 된다고 하셨듯이, 여러분이 눈을 뜨고 푹 자지 않으면 선정에 들 수가 없고 지혜도 커지지 않습니다. 무의 세계를 통과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하는 것은 근본 자동기에 의해서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내 마음에 의해서 스위치만 눌렀다 하면은 그냥 자동기로 돌아가는 겁니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물질과 더불어 이 세상의 진리가 전부 그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이고 내는 그 용(用), 그 자체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선정이라 하면은 우리 몸이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이 몸을 다스린다 이 소립니다. 이것을 둘로 한데 합쳐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균등을 잡아서 같이 해나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가 선이다 악이다 하는 걸 떠나고 선정과 지혜를 균등을 잡아서 한데 놓는다면, 끄달리지 않는 법이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공했다는 이치를 여러분은 잘 아셔야 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화두인데도 불구하고 공한 데다가 물질적인 그 자체를 덧붙여, 바로 보지 못하게 마음으로써 가려놓는 그런 덧붙이기 덧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공부하는 것은, 곧바로 들어가는, 이 세상의 진리의 균형이 평등한 구녘을 바로 찌른단 얘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난 것이 화두이자 공했습니다. 그래서 공한 그 자체에서 나오는 만법은 공한 데로 들고 공한 데서 난다, 이것이 바로 선정이며 지혜입니다.
지혜가 활용이라면 선정은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근본과 활용이 둘이 아니거든요. 그러한 데서 그대로 활용을 하되 그 활용은 누가 하는 건가 하는 겁니다. 내가 공해서 세울 것이 없다면서 무엇을 활용을 한다 하는가. 이것이 바로 함이 없는 무행, 무심으로써 돌아가는 자연 법칙입니다. 이것을 쌍으로, 즉 말하자면 선정과 지혜를 쌍으로 한꺼번에 넣고 굴리는 거다 이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위법에서 무위법을 배우고 무위법에서 유위법을 배우려고 한다면 시간이 오래 걸려요. 내가 나를 찾는데 무지하게 오래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내 마음의 실적을 깊이 생각하면서, 오로지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대로 모든 것을 주인공에 일임하라고 하고 거기에서 일체 만물이 들고 난다는 걸 바로 알고 관하라고 하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한 가정에 살면서 한 가지 일을 보면서도, 때로는 부부지간의 생각이 다르고 자식들하고도 각각 다른 생각을 하거든요. 왜 그렇게 각각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항상 당신과 나라고 둘로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겁니다. 한 나무에 달린 콩이 콩깍지도 똑같은 콩깍지요 콩도 똑같은 콩인데 그걸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낳아 놨어도,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도 자기는 껍데기로서 자기를 낳아 놓고 죽지 않은, 즉 말하자면 내놔도 줄지 않고 들여놔도 줄지 않고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는 얘기예요. 모두가 자기 모습이며 한뿌리 주인공의 가장구와 이파리입니다.
그렇게만 알고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스스로 지혜와 자비가 커지게 되고, 모든 고가 다 스스로 녹게 됩니다. 그리고 홀연히 내가 그 세세한, 즉 말하자면 망상의 습도 홀연히 어느 사이에 다 끊어져서 내가 이 세상에 근본적으로, 편안하고 좋고 자유스럽게 됐을 때 비로소 화신불이라고 해도 되는 거죠. 그래서 화신불이라는 그 자체가 우리가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모든 일에 지혜를 넓히고, 그렇게 지혜가 스스로 넓혀지니까 세존의 자리를 갖추게 된다는 얘기예요. 각을 이루어서 자기가 부처를 이룬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 참선 지도를 옛날과 같이 그대로 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옛날과 지금이 뜻과 법이 다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대에 따라 어떠한 방편을 쓰느냐에 따라 문제가 있는 거고, 또 한 가지는 물깊이를 알고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라야만이 그 물속의 이치를 전달을 해도 함이 없이 할 줄 알고 서로가 마음이, 즉 말하자면 자가발전소의 에너지는 왔다갔다 오고 감이 없이 자동적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내 근본에서 내 몸을 스스로 끌고 다니기 때문에 그렇게 구차하게 애쓸 필요가 없어요. 살려고 애써도 살아지지 않는 거고 죽으려고 애써도 죽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런 힘이 있다면 자기 주처에서 끌고 다닌다는 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선정과 지혜 양면을, 모든 걸 한데 합쳐서 쌍으로 뭉쳐 돌아갈 때에 그때 홀연히 과거 업식으로 인해 가지고 나온 종문서를 몽탕 태워버리는 거예요. 닿기만 하면 타버리니까 세상에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도다!’ 할 수 밖엔 없는 거죠.
그러니 부처님께서는 한마디로 규정을 지어 말씀하셨지 않으셨습니까? 한 점의 마음에 있는 거다. 정과 혜가 둘이 아니게 균형을 잡아가면서 모든 것에 끄달리지 않는다면, 생활에서 끄달리지 않는 정과 마음에서 끄달리지 않는 혜가 균형을 잡고서 돌아간다면 이것은 천체물리학으로서 배울 수 있는, 이것이 말로 하니깐 그렇지 세상에는 더 볼 수 없는 공부인 것이죠.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고 남 달린 코 달렸고 남 달린 눈 달렸고 남 달린 귀 달렸고, 오관을 통해서 엽렵하고 똑똑하게 모두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다!’ 하는 그러한 각오가 뚜렷하게 섰다면 여자든 남자든 마음은 둘이 아니니까, 그런 마음으로 한 칼을 뽑았다면 그냥 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칼을 뺐다가도 무서워서 달아난다면 오히려 자기 뒷잔등이에 칼이 꽂히게 되는 거죠.
누구나가 이 세상에 나왔다면 그만큼 벌써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공부할 수 있는 권리! 권리증은 벌써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응애’ 할 때 이미 가지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 공부하는 이치가 무엇인가? 학술적으로 아무리 배웠다 할지라도 일거일동이 참선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에 맞춰서 눈 한 번 깜빡거리는 것도 참선이다 이겁니다.
그럼으로써 ‘일체를 놓고 쉬어라. 맡기고 물러서지 마라.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해라. 너의 몸뚱이는 네 주인의 시자밖에 되지 않는데 시자는 주인에 의해서 움죽거릴 뿐이니까 쉬어라.’ 하는 거죠.
무기공에 빠진 것 같은데…
문
주인공에 관하는 수행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이 나오는 족족 ‘주인공이 하는 거니까 이건 의미가 없어.’ 라고 하면 그런 생각이나 감정들이 금방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러면 생각이나 감정이 없이 무생물처럼 멍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기공에 빠지는 것도 같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맞게 가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
그 자리에 놓아버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바로 자기이고,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도 자기입니다. 그래서 그 한 구녘은 대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문제의 원인을 만들고 내가 해결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벌써 부처 될 수 있다는 인가를 받고 나왔단 말이죠. 그러니 자기를 의심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래서 문이 하도 많으니깐 무문(無門)이라고 했겠지마는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내가 문입니다. 내가 나왔으니 내가 나온 자리로 다시 들어가야죠. 그래, 거기서 살림살이를 전부하는 건데 어디서 한다고 딴 데서 자꾸 남의 이름을 부르느냐는 겁니다.
그냥 내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해서 몰락 놔 버려라, 내 주인공에 감사해라. 그리고 그러함을 진실로 믿어라 이럽니다. 모든 것은 내 주인공에서 하는 것이니까, 일거일동 움죽거리게 하는 것조차도, 어떤 환상이 보여도 거기다 일임해서 놔 버리다 보면 진짜 내 스스로서 환희롭게 발현이 돼서 다 알게 되는 이치가 있으니 거기에서 의정도 나오고 그러는 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든 일체가 그 자리에서 들고 난다는 것을 알고 몰록 내려놓으면 무기공에 빠질래야 빠질 것도 없습니다. 무기공이 뭐 어디 따로 있나요. 마음이 잘못되면 무기공이지. 예를 들어서 사람이라는 게 그대로 여여하지 못하면 무기공이죠. 그렇지만 다 놔버리라고 하니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게 놓는 게 아니거든요. 본래 공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거일동, 일어서고 똥 누고 밥 먹고 이러는 게 전부 공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함이 없이 한 거니까 하긴 했어도 여여하게 했다는 말이죠.
그래서 공(空)이다 하는 것은 유(有)로 살리기 위한 공이지 없을 공이 아니죠. 우리가 지금 살리고자 하는 공부를 하는 거지, 땅에 묻혀버리자 하는 공부를 하는 게 아니거든요. 흙이 덮어져서 안 보여도 다행히 싹은 우뚝하게 섰더라. 솟아서 그 싹이 다인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라 전자의 내가 바로 여기 이 자리에 있더라 하는 거죠. 그러니 어찌 과거가 따로 있고 미래가 따로 있고 오늘이 따로 있겠습니까. 어떤 때는 가만히 돌아가는 걸 보면 꼭두각시놀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배우들이 배역을 맡아서 쇼하는 것 같고,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죠, 뭐.
그러니까 그냥 맹목적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은 무기공에 빠진다 이 소리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움죽거리고 사는 생활이 그대로 살아있는 선, 참선인 줄 모르고 아주 생활까지도 버리고 어느 하나를 고집하면서 그냥 앉아있으려고만 하니 그게 무기공에 빠진 사람들이다 이런 말이죠. 그러니 생활하면서,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그대로가 좌선이며, 또한 마음으로 모든 걸 맡기고 사니까 언제든 편안한 것이 좌선이죠. 그러니 뛰고 앉고 서고 자고 하는 게 전부 참선이니까 둘로 보지 마시고 어떤 생각이 올라오든 나온 그 자리에 돌려놓고 지켜보면서 지극하게 관하시기 바랍니다.
이중적 성향에서 벗어나려면…
문
감각적인 욕망이 많습니다. 그 욕망에 대해 자책을 하면서도 그 욕망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러한 욕망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욕망에 이끌려 생활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느낌이 좋을 때는 감각 속에서 살고자 하고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스런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인공을 찾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중적 성향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답
나는 이중적인 성향이 없다고 봐요. 왜냐면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주인이 있으니까 육신이 생산돼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또 나왔으니까 모두 들이고 내는 거, 요만한 거 하나도 그냥이 없어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움죽거린다는 거예요.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말을 하고 움죽거리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각각 떨어져 있나요, 전부 하나이지.
어디에서 누가 악을 쓰고 싸우는 소리가 들리면 눈도 가고 귀도 가죠? 귀가 가면 판단도 내리죠? 이렇게 다 같이 호응이 돼서 돌아가지 그냥 돌아가는 게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해서 그거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거기서 나온 거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 되놔라, 이거죠. 거기다가 되맡기고, 안되는 것도 거기니까 되는 것도 거기다, 안되는 것이 있다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을 거다. 그러니깐 거기서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는 거를 생각하고 거기다 맡겨 놓고, 이것이 발전이 되면은, 정신계의 발전이 되면 그때는 모두와 더불어 벗어나게 됩니다.
그건 무슨 연고냐? 말없는 데서, 즉 무심으로서 모든 사람들한테 마음이 오고가는 게 있기 때문에, 인연의 끈과 끈이 다 직결로 연결이 돼있어서 가설이 돼있기 때문에 어디서 오든지 어떤 게 오든지 서로 녹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좀 있어야 모든 거를 놓을 수도 있는 거다 이 소리죠. 능력이 없으면 놓을 수가 없거든요. 발발발발 떨면서 당장 이게 없는데 이걸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이게 당장 안되는데 이걸 어떡하면 좋을까 하고 벌벌 떠니까 더 안되는 거예요. 사량으로만 야단법석을 하니 그런 겁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벌써 작용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되는데, 만들어주진 않고 자기가 그냥 발산을 하니까 그 말한 발산은 풍지박산이 돼서 없어지고, 귀신 방귀 뀌면 없어지듯이 없어지고 말아버리는 거죠, 뭐. 그러니까 모든 고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소리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면 돌에 세워놔도 산다고 그랬어요. 바가지 한쪽이 없어도, 이건 바가지로 비유하는 겁니다. 쌀을 일어야 하는데 바가지가 없어서 어디 가서 얻어다가 이 쌀을 일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에 벌써 바가지는 들어오고 있어요.
이렇게 광대무변한 묘법인데도 여러분이 정신세계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믿지 않고, 또 거기다 맡겨놓을 줄 모르고 이렇게 생활을 하니까 뭐, 가는 길 50% 밖에는 모르는 거죠. 오는 길 50%하고 맞물려서 같이 작용을 해야 될 텐데 그렇질 못하니깐 그렇게 생각으로 끄달려서 괴로운 거 아니겠습니까. 좀 안 믿어지고 또 모르겠더라도 자기를 끌고 다닌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올라오더라도 자기 주인공에다 돌려서 맡겨 놓고 모든 것은 거기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되는 것도 거기 안되는 것도 거기니까 일체를 내려놓고 좀 편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지
문
IMF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와 생활고가 심해지면서 취업난과 카드 빚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과연 마음공부 즉, 둘이 아닌 하나 됨으로써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답
여러분이 지금 볼일이 있어 부산으로 간다고 합시다. 또 광주로 가고 대구로 간다고 합시다. 그런데 서울에서 부산이나 광주, 대구로 온 것만 생각하거든요. 오는 것만 알고 되돌아가는 것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있고 오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두 개가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해야 할 텐데 양면이 작용을 못하는 까닭에, 즉 말하자면 물질계와 정신계가 한데 합쳐져서 작용을 해야 보이지 않는 50%에서 보이는 데로 나오게끔 돼있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그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헤어나지 못하니 어지럽고, 물질세계에서 여직껏 살아나온 관습과 인과, 업보, 유전성 이런 걸로 꽉 뭉쳐서 돌아가니까 부작용이 나고 모든 게 이루어지는 데 접근이 되지 않고, 또 그러니 공덕이 하나도 없는 거죠. 전체가 같이 돌아가서 이루어질 수 있는 공덕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개별적인 하나의 생각으로서 사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한마음 주인공은 포괄적인 하나이지 개별적인 하나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은 체가 없어서, 즉 말하자면 영혼은 체가 없어서 마음도 마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죠. 마음은 체가 없어서 수만 개를 이룰 수도 있고 하나로 만들 수도 있고 하나마저도 없앨 수도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작용의 문제가, 정신계의 발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정신계를, 즉 말하자면 자기가 정신계의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현실 물질계에서 50%만 살려니까 가는 길만 알지 오는 길은 모른다 이 소리예요. 그러니까 그러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밖엔 없고 거죽의 모든 관습에 의해서만이 생각을 하게 돼서, 정말 진실하게 뿌리에서부터 가장구, 이파리까지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겁니다. 뿌리가 깊이 묻어져야 가장구가 나고 이파리가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텐데 그렇지 못한 까닭이다 이거에요, 모든 게. 그러니까 누구든지 마음공부를 해야 됩니다.
이게 뭐 이러고저러고 말로 얘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마음 깊은 속에서 스스로 자기 과거에 살던 자기 영혼의 근본이 발현이 되면 현실의 나와 둘이 아니게 작용을 할 때에 에너지 광(光)이 생긴단 얘기죠. 그래서 지수화풍 자체가 대두가 돼서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모든 사람들에게 재료로 주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한테 본래 주어져 있기 때문에 다섯 가지 오신통이 굴려지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은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거, 보는 게 없이 보는 거, 듣는 게 없이 듣는 거, 또는 남의 속을 아는 게 없이 아는 거, 과거를 아는 게 없이 전체 아는 거, 그거를 오신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누진으로 하여금 굴린다 이 소리죠.
그래서 한마음 주인공 자리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거기서만이 이끌어갈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가지라고 하는 거는…. 모든 것이 그 숙명통 컴퓨터, 즉 말하자면, 여러분이 알아듣기 쉬우라고 컴퓨터라고 비유를 하는 겁니다. 과거에 살던 대로 입력이 된 것이 용도에 따라 솔솔 나오는데 어디 가서 그것을 해결한 건가 이거죠. 살던 고대로 입력이 돼가지고 현실에 자꾸 그게 나오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는 거를 되돌려서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면은 앞서에 입력했던 게 없어질 거 아니냐 이겁니다. 새로 입력을 하면 앞서 입력되었던 건 지워지고 다시 새롭게 입력이 될 거니까 그렇게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자고 하는 거죠.
없어지고 또 없어지게끔 이렇게 하자 이겁니다. 그렇게 물러서지 않고 열심히 하다보면 내 주인공자리의 맛을 볼 수 있으니 그때는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이, 설사 지금 당장 먹을거리가 없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여하게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됩니다.
내 안에 무궁무진한 보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모두 꺼내 쓸 생각을 못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니 고생을 하는 거죠. 그래서 진실히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 걱정이 없게 됩니다.
주인공 발견하려면…
문
주인공에 일체를 맡기며 생활하다보니까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인공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평상시 마음이 편할 때 주인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종종 ‘주인공은 누구인가?’라거나 ‘주인공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화두를 염합니다만, 스님께서는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화두이니, 화두를 따로 드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 혼란스럽습니다. 마음이 편할 때 주인공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과, 화두를 드는 것이 바른 수행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
화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화두입니다. 늘 하는 얘기입니다만, 내 앞에 수박이 놓여있는데 쪼개서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요 놈이 뭘꼬?’ 하고 평생을 굴리고 굴려봐야 그 맛은 못 볼 겁니다. 수박을 놓고 ‘이게 뭘꼬?’ 하고 있어 봤자 그 맛을 알 수가 없으니 무조건 쪼개서 맛을 보고 그걸 넘어서야 된다 이 소리입니다.
무조건 마음의 칼로 쪼개서 맛을 봐라 하듯이, 주인공에 모든 것은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다 하고 아예 무조건 들어가는 거죠, 그냥 수박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수박을 놓고 이 뭣고 하기 이전에 그냥 수박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무조건. 이해가 갑니까?
수박을 내 몸이라고 합시다. 수박을 놓고 요놈이 뭘꼬 하고 생각하는 것도 물론 관이라고 할 수 있고 참구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런데 지금 세상은 훌떡 넘어서야 할 세상이라 이겁니다. 그렇게 빨라요. 우물쭈물 하다가는 자전거에 치인다는 노래 아시죠? 그렇듯이 우물쭈물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가오는 대로 그냥 잘라서 먹고 넘어가라 이거예요.
부처님이 앞에 있어도 그냥 먹고 넘어가라 이 소리죠. 일체 만법을 다 거기다가 맡겨 놓고 넘어가는데, 고놈만은 왜 놓지 못하고 고놈이 뭘꼬 하느냐 이 소리입니다. 고놈이 뭘꼬 하기 이전에 그냥 고놈도 꿀떡 집어삼키고 넘어서라 이 소리예요. 그럼 맛을 알게 될 겁니다, 고놈 맛을.
고놈이 뭘꼬 하고 아무리 그래 봤자야 그냥 울타리 밑에서 맴도는 거와 같으니까 그냥 꿀떡 집어삼켜서 먹고 넘어서서 길을 걸어라, 자기를 꼭 붙잡고 물질계의 자기는 정신계의 자기를 믿고 오직 거기다 맡기고 길을 걸어라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