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샴쌍둥이에 대한 이야기가 일희일비(一喜一悲)하며 뉴스를 타고 있다. 일란성 쌍생아로 태어나는 과정 중에 완전한 분리가 되지 않아 일어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러한 형태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서도 발견된다.
생물계는 수학이나 물리적 반응과 같이 명확하게 정오(正誤)나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다. 생물에서 최종 결과물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에 걸쳐서 치밀한 반응이 실수 없이 이루어 져야 하기에 중간에 잘못될 확률이 비교적 높다. 또한 몸 안의 항체(抗體) 형성 과정에서 관찰되듯이 그 과정이 오히려 정확하지 않고 유동성(flexibility)이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생물 반응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이 나타날 수 있는, 여유를 지닌 유동성이란 것은 결과적으로 생물체의 다양성을 이루는데 기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생명체가 다양한 항체를 형성해 수많은 외래 침입자에 대하여 특이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우리 주위에는 많은 분들이 일반적이지 못한 모양으로 태어나게 되는 경우가 보이고, 샴쌍생아의 경우도 이러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특히 이는 생명의 발현이란 개체성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임에 반해 그러한 개체성이 완전하지 못한 채 태어났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끌게 된다.
과거로부터 이들을 한사람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둘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이번 이란 샴쌍둥이의 경우 그들은 스스로 각각의 독립된 개체이기를 원했다. 또 과거 영국의 경우에서는 한쪽을 살리기 위한 분리 수술을 거부하고 이미 숨진 다른 한쪽을 따라 남은 한쪽이 숨을 거둔 예도 있다. 물론 이란의 샴쌍생아의 경우 수술 중 숨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모습을 통해 샴쌍둥이가 한 사람이냐 두 사람이냐, 혹은 수술을 해야 하느냐 안해야 되느냐 등의 논란은 그다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모양새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당당하게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주인 됨을 의미한다. 이란의 샴쌍둥이의 경우에서처럼 외형적인 모습이 어떠하건 생사를 눈앞에 두고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그들의 모습에 경건함마저 느끼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것에 집착 말고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기를 말씀하신다. 이번의 이란 샴쌍둥이야말로 그들이 받은 형상을 통해 스스로 주인 됨을 금생에 공부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이 과정에서 의학이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그들의 선택을 도울 수 있는 수단으로서 활용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다시 한번 모든 상황의 주인은 사람이며, 과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