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떠주는 물만 먹으려 하지 말고 내 안의 샘물을 떠 먹을 수 있어야
▲스님: 여러분 모두가 새해를 맞이해서 올해는 한층 더 분발하여 자유스런 계기를 얻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세상 만물이 모두 내 스승 아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느끼겠지만 물가에 가서 흐르는 맑은 물을 볼 때 싱그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죠. 그런데 물은 우리들에게 말없이 물과 같이 살라 하고, 꽃을 보면 꽃도 나같이 살라 하며, 모진 땅의 풀뿌리를 보았을 때도 그 풀이 나를 보고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자기와 같이 살라고 하니, 내 스승 아님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모로 지극하게 믿어야 합니다. 믿는 것도 밖으로 끄달리며 믿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믿으며 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일체 만법이 다 그 속에서 나고 드는 것이니 다시 그 속에 맡겨 놓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야만이 진실하게 구하는 법(法)도 나오고, 깨닫는 도리도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명심해서 들으세요. 어떤 분들은 주인공을 찾다가도 때에 따라 어떠한 경계에 부딪치면 안으로 놓기 이전에 밖으로 끄달립니다. 뿌리에 물을 주어야 줄기와 잎이 잘 자라듯이 부딪치는 일체 경계도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안으로 놓아야 하는데, 말로는 주인공에 놓는다고 하면서도 행은 그렇지 못합니다. 행과 믿음과 구함이 진실해야 하는데 말이죠. 아까 얘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도다.’ 하고 그렇게 모든 걸 둘로 보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고, 나한테서만이 이끌어줌이 나온다고 생각할 때 모든 해결은 그 속에서 하는 겁니다. 나를 깨닫게, 증득하게 해주는 것도 그 속에서만이 깨달음을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진실이 없으면 어디까지나 모두 허상이고 거짓입니다. 곧 죽어도 옳은 것은 안으로 놓고 믿고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한 철 나왔다가 부딪침이 없다면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한 철 날 때 부지런히 노력해서 깨달아야만 다음 생(生)에, 나고 들고 하기 이전에, 생하고 멸하고 하기 이전에 자유스럽게 오고 갈 수 있으며, 내가 직접 주기도 하고 먹기도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며 부처인 것입니다. 부처가 된다면 스스로 법신이 되고, 화신이 되는 것이죠. 천백억화신도 될 수 있구요.
그런데 자기가 자기 주인을 찾는데 집에서 혼자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절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 중에 잘못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교수이면서 자기 가정의 자녀들은 왜 학교에 보내며, 자기가 의사이면서 자기 집 아이의 수술을 왜 다른 의사한테 맡깁니까? 그것이 바로 마음상태 때문입니다. 나와 네가 둘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하면 괜찮건만, 내 자식이라는 착(着)에 의해서 수술을 못하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행하고 부드럽게 말하며, 조건 없이 남을 이익하게 한다면 무조건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그점을 자비라고 합니다.
그럼 이쯤하고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신도님들의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네 가지를 간추려서 부족함을 무릅쓰고 여쭙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다음 생에 새로이 몸을 얻는 윤회의 과정에서 새로 태어날 영혼들은 업식으로 인하여 육신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도리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 생각하면 그 업식이 무슨 까닭으로 소나 돼지 또는 인간의 몸을 구별하지 못하는지 궁금합니다.
▲스님: 여러분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가져다주고 빼앗아 가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이 세상 다 살고 갈 때에는 재물은 대문 안에서만 고하고 바깥으로는 인사 한마디 없으며, 자식이나 부부, 또는 친구들은 동구 밖에서만 작별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니 결국 자기가 살았던 대로 업식만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 독하게 살았으면 독사가 될 것이요, 남이 먹고 살거나 말거나 사기를 쳐서 돼지같이 살았으면 돼지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철칙이 있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에누리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아는 것, 우주 법계에서도 다 알고 있으며 직결돼 있기 때문에 세상과도 가설이 되어 있다고 항상 말했죠. 그러니만큼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에 따라 업식이 자기의 본성을 가리므로 눈을 뜨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며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돼지가 접하는지, 새들이 접하는지, 고양이가 접하는지, 사람이 접하는지 도대체 분간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돼지 소굴에 들어가면 돼지가 될 것이고, 사람 속에 들어갔으면 사람이 될 것이니 자기가 한 대로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은 대로 과보가 주어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받게 마련입니다.
상점에 놓여 있는 모든 물건들을 보십시오. 배는 배대로 놓여 있고, 사과는 사과대로 놓여 있지 않습니까? 일체 만물이 다 그러합니다. 금은 금방으로 갈 것이고 넝마는 넝마대로 모일 것입니다. 그건 누가 모여라 모이지 말라 하기 이전에 차원에 따라 그렇게 모이게끔 되어 있죠. 그러니만큼 자동적으로 업식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면서 그렇게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건 다른 누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죠. 부잣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이요, 가난한 집에 태어나는 것도 자기 업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공부하는 스님들에게는 선업도 놓고 악업도 놓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선업을 지을 때는 악업도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면을 다 놓으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 어찌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는데요. 마음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문자1: 평소에 자신을 되돌아보면, 마음이란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생멸하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이며, 불생불멸하는 한마음과는 어떻게 다른지요.
▲스님: 쉽게 말해서 생멸과 불생불멸이 다르다고 할 때,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없어질 리 없습니다. 나무를 베어 없앴다고 해도 나무 그 자체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했을 뿐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개별적으로 생각할 때는 생멸이지만 포괄적으로 볼 때는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부숴지고 변하고 하면서도 진리는 끝이 없고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깨달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그 언어에도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1: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 자신도 삼보에 귀의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입니다만 아직도 캄캄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초발심의 경지를 어찌 바른 깨달음이라 할 수 있는지요?
▲스님: 삼천 년 전이나 삼천 년 후나, 오늘인 것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붙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히 믿고 놓는 작업을 할 때, 그리고 구하고 물러서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자기 아닌 자기를 만나는 소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한생각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한 것과 같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과 말이 진실하지 못하고 밖으로 끄달리기 때문에 초발심에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죠. 10년이 지났든, 20년이 지났든, 하루가 지났든, 1초가 지났든 간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초발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한 찰나이니까요.
그러니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동시에 뜻과 더불어 같이 진실하게 물러서지 않고 믿고 놓을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10년이 지나갔다 해도 깨달음에 있어서는 1초와 맞먹습니다. 그러니 초발심이죠.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자기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행과 말과 뜻이 함께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죠.
컵 하나가 만들어지는 데에도 재료가 한 가지라도 빠지면 안되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의 재료가 결부가 되기 때문에 컵이라는 이름으로 물건이 생산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지수화풍이 한데 합해져서 컵 하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수화풍을 알지 못한다면, 흙과 물을 개어서 바람에 말리고 불에 굽는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렇게 인연에 따라 결부되어 작용을 하기 때문에 컵 하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컵 하나도 그냥 무심하게 볼 게 아니라, 우주의 개공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컵으로 나와서 만이 아니라, 마실 것을 담아 먹을 수 없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빛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안에 우주개공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1: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모든 걸 놓아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간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자신이 어느 새 편안한 경계를 구하고, 그 상태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고 놓는 마음 가운데 편안한 경계를 좋아하는 마음이 깃든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요.
▲스님: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내 마음이 편안하면 내 몸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편안해지기 때문이죠. 모두 한데 뭉쳐서 주인공에 놓을 수 있고 물러서지 않는 진실된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바로 한마음으로 돌아가니 편안함이 오고 끄달리지 않는 법입니다.
이 우주 전체는 하나로 평등하게 돌아가지만 용도에 따라서 달리 쓰이게 됩니다. 그러니 둘도 보지 말고 주인공에 모두 일임해서 놓았을 때, 그리고 때에 따라 다가오는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고,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겁내지 말고 죽고 사는 것에도 착(着)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얘기했던 바와 같이 진실하게 믿고 진실하게 놓고 진실하게 행하며 부드럽게 뜻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가 된다면 깨달음의 소식도 얻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반면 편안함도 여러 가지겠지만 그냥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살겠지.’ 하는 마음으로 놓는 것과, 진심으로 믿고 놓았을 때의 편안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일체가 내 스승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그렇게 감응이 된다면 내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게 되는데, 그랬을 때 한마음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묘용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대로 거기에 믿고 맡겨야지 믿지 않고, 또 믿는다 해도 설 믿는다면 공부는 엄청나게 늦어지게 됩니다. 잘되는 것과 잘 되지 않는 것을 다 놓아야 합니다. 잘 될 때는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잘 안될 때는 안된다고 불안해 하고 언짢게 생각하는데, 그러나 안되는 것도 법이요 되는 것도 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회사를 경영하려고 한다면 지위를 높여줄 사람은 높여주고, 낮은 지위가 맞는 사람은 낮춰야 회사가 잘 돌아갈 거 아닙니까. 그런 작업을 제대로 못한대서야 어떻게 회사를 제대로 경영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법에도 악과 선을 다 놓고 배워야 합니다.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느 신도가 승진을 시켜달라고 정성을 지극하게 들였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지극하게 정성을 들였는데 그만 승진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그 자리로 승진이 되어서 월남에 가게 되었는데 월남에 가서 그만 전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고 난 뒤에 그 신도가 승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신도는 지극히 정성을 들였는데 승진이 되지 않았으니 믿음이 산산조각이 났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믿어서는 안됩니다. 거기에도 뜻이 있겠지 하고 한생각 돌려 믿고 놓아야 합니다.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의 대권을 얻었다면 불리하면 내려놓을 수도 있고, 이익이 된다면 올려놓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해롭거나 이익이 되거나 간에 올려놓기만 한다면 그건 망하고 마는 겁니다. 전쟁에 나가서 싸울 때도 후퇴할 때는 후퇴하고 전진할 때는 전진해야 되듯이, 그런 능수능란한 지혜가 없다면 어떻게 지휘를 맡아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겁니다. 부처님께서 자유자재한다는 뜻은 중생들의 아픔을 똑같이 느끼면서 이익되게 이끌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부정적이고 남용하는 사람은 자기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 봐야 그 때 비로소 아는 것이죠. 그러니 내려놓을 줄도 알고 올려놓을 줄도 알아야 자유자재의 대권을 가졌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2: 저는 손자가 아파서 왔습니다. 16개월째가 되는데 아이 엄마는 직장에 다니고 해서 제가 키웁니다. 처음에는 아주 건강했는데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해도 병명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병원에 갔더니 암 종류라고 합니다. 말 못하는 어린애에게 이런 병이 올 수 있나 싶고, 그렇게 아파서 진통이 와도 말을 못하니 너무 딱하고 불쌍합니다. 아이 엄마는 학교 선생인데 일직이라 못 오고 제가 스님께 살려주십사 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스님: 내가 의사는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 업식으로 말미암아 생겼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것을 녹이는 방법은 바로 한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니, 한마음 속에서만이 그 업식을 녹이고 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모든 식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그렇게 하시도록 하세요.
▲질문자3: 저는 스님 법문에서 주인공에 맡기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주인공은 내 몸 속에 있는 것인지, 우주 허공법계에 가득 찬 것인지,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주인공은 어떻게 다른지 이런 점들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염불이나 기도를 꼭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여쭤보는 겁니다.
▲스님: 수행의 문은 많이 있습니다. 염불을 해서 들어가는 문이 있고, 경을 읽어 가는 문이 있고, 선을 해서 들어가는 문이 있듯이 이 문 저 문 여러 가지의 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 밖에 나가면 모두 다른 문이 아닙니다. 주인공! 즉 마음 자체는 내놓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없습니다. 허공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겁니다. 지금 처사님이 말을 하는 것도 주인공이 없으면 말을 못할 겁니다. 그것으로 입증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를 다스리며 이끌고 다니는 참자기를 믿으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자성(自性)입니다. 자성불이 공해서 돌아가니 주인공이에요. 고정됨이 하나도 없이 돌아가니까요. 그렇게 붙잡을 것이 없으면서 여전히 말을 하게 하고 이 생각 나게 하고 저 생각 나게 하고, 이것 보게 하고 저것 보게 하고, 이것 듣게 하고 저것 듣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입증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자3: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거룩하신 법신불이시여!’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주인공이시여, 어떻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그와 같은 방법은 밖으로 향하기 때문에 기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항상 해주십시오 한다면 노예생활에 불과합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나를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시며 죄를 사해주시오.’ 하고 아무리 해도, 자기가 해 놓은 일을 우주법계에서 알고 있는 이상 죄는 사해지지 않을 뿐더러 그렇게 밖으로 빈다면 공덕은 하나도 없으며, 어느 것 하나도 실행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 그 땅을 짚고 일어나는 법이지 다른 곳을 짚고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거기서 해결을 하게 해야지요. 다른 곳에서 해결을 해주고 빼앗아 가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끌고 다니는 참자기부터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왔는지 알면 어디로 갈 건지도 알 것이고, 어디로 갈 건지 아는 사람은 현실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것입니다.
그러니 ‘법신불이시여, 나를 이렇게 해주시고 저렇게 해주시오.’ 한다면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이지요. 이익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해 주십시오 하면서 밖으로 구하는 게 아닙니다.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쫓고 쫓기면서 진화시켜온 그 장본인이 바로 자기이며,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니 모든 것에 얼마나 경험이 많겠습니까. 그러니 안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일체 만법을 응용하는 것도 거기에 있고, 말하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듣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고, 생사도 거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육신을 가지고 심부름하는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으며, 나에게 돈이 있다면 나는 관리인일 뿐이지 내 것이 아니고 주인 것이니 주인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거기에서만이 할 수 있다는 걸 진심으로 믿어야 합니다. `‘할 수 있다’이지 `‘해주시오’가 아닙니다. `‘해주시오’는 벌써 둘로 보고 비는 게 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고 바로 믿고 들어간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한 행이며 실천하는 것이며, 즉각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질문자3: 스님, 잘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스님: 이거를 (컵을 가리키시며) 보고서, 만약에 여기 있다는 소리를 듣고 물이 있는 걸 봤어도, 집어먹을 수 없고 집어줄 수 없다면, 보고 듣고 한 것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질문자4: 스님, 감사합니다. 지난번에 사돈하고 같이 왔던 사람입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아파 못 견디다가 스님 뵙고부터 지금까지 일 개월 동안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진통제 두 대 맞고 약 먹던 것도 다 끊어 버렸는데, 5일 전부터 다시 아프다고 해서 염치없이 또 괴롭혀드립니다.
▲스님: 그래서 언제나 남이 주는 것은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남이 물 한 바가지 줬으면 그 물을 먹는 동안에 또 물을 퍼야 할 텐데 남이 주었다 해서 그것만 먹고 자기가 푸지 않으면 곧 바가지가 텅텅 비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떠다 놓은 물을 먹는 것과 내 깊은 골짜기에서 나오는 샘물을 떠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가 물을 떠먹을 수 있으면 항상 당당하고, 믿음직하고, 든든한 겁니다. 누구에게나 항상 떠서 먹을 수 있는 샘물이 있으니까 진심으로 믿는다면 목마를 때마다 언제든지 떠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남이 떠다준 물은 한 번 먹고 나면 없어지고 떠주면 또 없어지고 하니 달랑거려서 못 견디는 겁니다. 달랑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다른 문제가 또 오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남이 떠서 주는 물만 먹으려고 하지 말고 오늘부터는 `주인공은 개별적인 나의 주인만이 아니라, 일체제불의 마음과 스님의 마음이 포괄적으로 내 마음속에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주인공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지극하게 맡기십시오.
▲질문자4: 신기하게도 그렇게 아파 못 견뎠는데 아프지 않은 사람같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본인도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스님의 가피라고 생각합니다.
▲스님: 그러니 바가지에 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시라는 겁니다. 바가지에 물을 주는 것만 뚝딱 마셔버리고 마니 그렇지요.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꺼내려고 할 때는 사탕과 장난감을 주고 나오게 해야 한다고 하신 예화도 있습니다. 그 뜻을 잘 아셔야 합니다. 마음공부 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으름이 없이 해야 그 살림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자5: 저는 건강하게 살았는데 작년부터 디스크도 오고 해서 스님을 뵙고 싶어 이렇게 왔습니다. 친견하고 나면 제가 정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왔습니다.
▲스님: 이제껏 얘기한 그대로 실천에 옮겨 보세요. 자기가 자기 시자를 심부름시키려면 건강하게 만들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만 믿고 맡기면서 관한다면 틀림없을 겁니다.
▲질문자6: `평등도 평등이요, 불평등 또한 평등이라, 꽉 찬 평등 속에 평등 찾을 길 없어라. 가을 추수 끝난 후 흰 쌀밥 지어 먹으니, 봄 나비 훨훨 날아 그 장단에 춤을 추네. 한말씀 일러주십시오.
▲스님: (컵을 들어올리심) 이걸로 대답이야.
▲질문자6: 방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이미 맛을 본 것 같습니다.
▲스님: 그렇게 말로 한다면 맛을 못 본 것이지. 그렇게 말이 많으면 말로 깨트리는 게 되질 않는가?
▲질문자7: 저는 평생 세속의 학문과 지식을 탐구해 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량심과 분별심을 버리고 주인공에 맡겨야 된다고 하십니다. 평소에 그렇게 학문과 지식의 세계를 탐구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사량심과 분별심을 기르는 작업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간다면 한마음 법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요.
▲스님: 세상살이 만사가 학생 마음에 가설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어떠한 공부를 한들 부처님 법 아님이 없는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예를 들어 인간도 뿌리가 있어야 몸이 있고 몸이 있어야 행이 있듯이, 모든 건 주인공 뿌리가 있기 때문에 일체를 하는 것이니 해도 함이 없이 하라 이 소리입니다.
학생의 송장덩어리가 보는 게 아니거든요. 눈으로 보게 하고, 귀로 듣게 하고, 손을 움죽거리게 하고, 몸을 움죽거리게 하는 등 전체를 움죽거리게 하니 전체를 보게 되는 거 아닙니까? 이건 망상이고 저건 망상이 아니라고 나누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디 하나나 있습니까? 그러니 아까도 얘기했던 바와 같이 `‘일체 만물만생이 다 나같이 살라 한다’ 했으니 하나도 버릴 게 없다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 앞에 주어지는 대로 충실하고 진실하게 하는 것이 부처님 법이며 그대로 여여함이에요. 그러니 그 책을 누가 보고 생각을 하는 놈이 어딨는지 그것만 알면 됩니다.
▲질문자8: 견성은 누가 하는 겁니까?
▲스님: 지금 말하는 건 누가 하는 겁니까?
▲질문자8: ‘말을 누가 하는가?’ 골똘히 생각해 봤었는데 결국은 생각으로 알아냈다고 생각한 게 또 생각이고, 또 그 생각으로 말씀드리니까 우리는 보통 의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의식 위에 또 생각이 있고 그 생각으로….
▲스님: 그렇게 따지고 들면 진정으로 죽지 못해요. 그렇게 따지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 세상에 들어가서 죽은 세상의 일을 전부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영리해서 어떻게 죽겠어요.
자비라는 것이 어떻게 생긴 줄 압니까? 악이든 선이든, 잘못된 거든 잘된 거든 불문에 붙이고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자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에 거기 이익을 바랍니까? 그래서 조건 없는 사랑, 그것이 바로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한다면 그것은 사량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이지 마음으로 샘물이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푹 쉬어야 되겠는데요. 아는 것이든 모르는 것이든 일체를 놓는 것이 쉬는 겁니다. 좀 바보가 되어 보세요. 바보가 되란다고 해서 일도 안 하고 그냥 우두커니 있지는 말고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영리하게 머리가 돌아가는 것도 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생각마저도 다시 그 자리에 되돌려 놓고 열심히 관하세요.
▲질문자9: 깨달음을 얻는 데는 스승이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일반 시중 서점에 가면 자칭 깨달았다고 하면서 책을 많이 펴내고 사람들도 모집하던데 그 사람들이 진짜 깨달았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믿고 따라가야 될는지요.
▲스님: 하하하. (대중 웃음) 순간에 한마음이 된 거죠. 웃음이라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사람이든 저런 사람이든 사람들은 수없이 경험하면서 진화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릇되고 올바르고는 자신들이 더 잘 알아요. 그리고 모든 것이 나로부터입니다. 그래서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죠. 내가 저걸 따라야 할까 따르지 않아야 할까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린 것이지, 어느 것이 옳은 행이며, 어느 것이 옳은 뜻이냐는 각자 자신이 판단해서 따르라는 것이지 아무나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9: 그런데 어떤 사람이 쓴 책을 보아도 다 맞는 말 같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스님: 맞는 말이든지 안 맞는 말이든지 무조건 다 맡겨 놓고 나부터 찾으세요. 나부터 믿고 나부터 알아야 합니다. 누구 말을 믿기 이전에 내가 어디서 왔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질문자9: 스승이 있으면 더 빨리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스님: 이 컵 하나 나오는 데도 만든 사람을 빼놓고 네 가지가 한 데 합쳐져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독불장군이 있답니까? 처사님도 지금 살아나가는 데 상대와 더불어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지 어디 혼자 살아가는 겁니까? 혼자 산다면 옷도 입지 말아야 하고, 먹지도 말아야죠. 전부 더불어 사는 겁니다. 그러니 아는 것도 전부 맡겨 놓으세요.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뿌리가 있기 때문에 가지가 있고 잎이 있듯이, 뿌리에 자꾸 물을 줘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뿌리를 믿고 거기에 맡기면 물 주는 거와 같으니 그렇게 열심히 해보세요.
▲질문자10: 항상 한마음의 도리에 의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지금 이렇게 나온 것도 스님께서 늘 가르쳐주신 주인공의 작용에 의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제가 교직에 있기 때문에 늘 한마음 도리에 의해서 생활하고 경험해 가면서 즐겁고 환희에 찬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때때로 이 한마음 도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경험을 해도 거기에서 얻어진 바가, 뭐라고는 표현할 수 없지만, 내가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물론 소중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떤 조그만 싹트임을 해보고 싶다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나름대로 조금씩 학생들에게 연관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구정녕하게 스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죽음도 삶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가고 있습니다만 제가 학생들에게 혹시 조그만 잘못이라도 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드는데, 더 열심히 전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아직 내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를 알 때까지 자제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스님께 질문을 드립니다.
▲스님: 부자가 다 된 연후에 부모님께 효도하려고 한다면 효도 못합니다. 벌어가면서 있든 없든 그저 남한테 이익 되게 하고, 있는 그대로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저 조그만 것이라도 전해 주세요. 조그만 것에서부터 커지는 것이지 갑자기 커져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시는 게 잘하는 겁니다. 그것도 다 어디서 하는 겁니까? 거기서 하는 것이죠.
▲질문자11: 저는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지금 스님을 뵙고 싶은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여기 오는 도중에 눈을 감고 있는데 가슴에서 불이 켜졌어요. 그 불이 한참 동안 켜져 있었는데 이상해서 눈을 뜨고 있으니 또 거울이 비치는 겁니다. 내 목까지 찼다가 그 다음에는 둥근 거울이 되어서 산소가 보이는데 제가 지금 느끼는 것은 저기 부처님 계시는 저 그림이었어요. 그래서 그 느낀 점을 스님께 전해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나왔습니다.
▲스님: 보이는 것도 주인공이 화해서 자기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렇게 화해서 나오는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몰록 주인공에 되놓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보여서 좋다고 밖으로 끄달리면 안됩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지은 업식의 환상이니까 다시 놓아야죠. 어떤 것이든 무르익혀야 맛이 나지 무르익히지 않는다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되맡겨 놓으시되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보여주셨으니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 뜻을 가지고 놓으세요. 그런 것이 보였다고 해서 좋아하거나 그러진 마시구요.
▲질문자12: 스님, 저는 이제까지 바보로 살았습니다. 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경도 못 읽어보았습니다. 그래도 부처님 진리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스님: 알고 보면 높은 산만 높은 것이 아닙니다. 얕은 산이 있기 때문에 높이 보이는 산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고 보면 모두가 평등한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끝으로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동천에 청새는 서천을 대하고
서천에 쪽새는 청새를 대하니
만공에 피리 소리 온 누리를 뒤덮는데
앞 뒤 중간도 없는 것
한 땅 딛은 한발도 없어라.
탕! (법상을 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