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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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으로 지극하게 불을 밝혀야 묵은 빚 갚고 햇빛을 줄 수 있어
일심으로 놓고 간다면 무명이라는 이름도 붙지 않아

백종과 공양미 삼백 석

며칠 전에 절에 가서 하얀 영가 등을 도량에 설치하는 운력을 스님들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곱고 하얀 등을 하나하나 달 때마다 부족한 저를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님들이 너무나 감사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바다에 던졌던 심청이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바쳐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했던 심청이처럼 저희 불자들도 해마다 다가오는 백종을 어떠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지내야 조상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요?

공양미 삼백 석이라 그러는 건요, 과거심과 현재심과 미래심이 한데 합친 일심으로써 공덕이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미래에 올 것이나 지금 현재 모든 마음이 한데 합쳐서 현재의 내 마음으로써 물질과 더불어 같이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여러분이 공덕이 되게 하지 못한다면 삼백 석 아니라 삼천 석이라도 그것은 공덕이 아니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드리기를 우리가 공생하고 있고 공심으로서 공체로서 공용을 하고 있고 공식하고 있다는 말을 가끔 하죠. 그러니깐 그것이 그렇게 우주와 더불어 나와 더불어 일심으로서 같이 할 수 있는 그 능력이 주어져야 그것을 공덕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스님께서 너는 삼백 석을 시주를 해야만이 그것이 공덕이 돼서 너의 아버지 눈을 뜨게 한다고 했던 겁니다. 그러자 그것이 진짜로 공덕이 돼서 우주간 법계에서 서로가 마음이 돌아서 한마음으로서 책정을 했던 거죠.
그러니 모든 하늘의 이치나 일체 신들, 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더불어 무수한 능력이 시주하는 사람에게 일심으로 한꺼번에 한마음으로 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우주가 들렸다는 얘깁니다. 우주가 들리는 공덕을 지었으니 그 어찌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취를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말하듯이 몸이 죽으리만큼 마음이 지극했을 때,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내가 물에 빠져서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서슴지 않겠다는 그 마음이 눈을 뜨게 한 거지, 그 몸이 죽어서 눈을 뜨게 한 건 아닙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마음의 시자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갸륵하고 아름답고 정성이 지극한, 부모를 위한 정성이, 지극한 마음이 자기를 바로 쥐었기 때문에 살린 것입니다.
자식을 기를 때, 여러분이 부모로부터 길러지고 또 길러보시고 또 지금 현재 나서 기르고 이러는 분들도 숱하게 많으시리라고 봅니다. 그러면 뱃속에 넣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사람이라는 게 부모를 생각할 때에 낳아준 것만이 공이 아니라고 하지만 거기도 약간의 문제가 있는 거죠. 길러주는 은혜, 첫째 뱃속에 넣고 만 9개월을 지내는 그 은혜도 수월치 않습니다. 또 낳았을 때에도 낳아서 잘못됐는가 잘됐는가 하고 걱정을 하면서 자기의 성치 않은 몸을 이끌면서도 어린애를 들여다보고, 또 이것이 금방 나서 잘못되지나 않나 또는 병이나 나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몸을 닦아주고 씻어주고 하면서 만지는 그 은혜는 어떡합니까. 여러분이 생각을 깊이 해 보신다면 참으로 은혜라는 것이 생각할수록 한이 없는 겁니다.
또 그뿐입니까. 젖은 기저귀를 빼고 마른 기저귀를 끼워주는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는 길러주지만 아버지는 보수(保守)를 항상 태양과 같이 그렇게 내려다보시니 양면이 다 길러주십니다. 그뿐인가요? 오줌을 싸서 젖으면 그것을 빼서 자기가 뭘 깔고라도 눕고 어린애를 또 자기 마른자리에 있는 요에다가 도로 옮겨 눕힙니다. 그럭하면서 기저귈 빼고 끼고 빼고 끼는 하는 은혜가 아닙니까?
그것도 그렇지마는 또 기르면서 나가 놀 때에 다치지나 않나, 또는 어디 구덩이에 빠지지나 않나, 애들하고 싸우지나 않나, 음식을 먹고 체하지나 않나 등등…. 맛있는 거는 또 먹이고 맛없는 거는 자기가 걷어먹고 이렇게 하는 건 은혜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항상 있는 일입니다. 그 사랑은 말도 못하죠. 어떤 부모든지, 나쁜 부모든 좋은 부모든 자기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아마 한계가 없을 겁니다.
게다가 자식이 자라가지고 성장해서 공부를 하는 데도 공부를 어쩌면 잘해서 우리 아들이 잘될까? 어디를 나가면 혹시 나쁜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나 않나, 누구한테 매나 맞지 않나, 또는 나쁘게 돌아가지나 않나, 공부나 잘하고 있나, 지금 공부를 한다고 하고 있나, 또 딴 데로 가고 있나, 병이 나면 어쩌나…. 항상 먹는 거든지 입는 거든지 모든 게 어머니의 정성이고 아버지의 정성이라.
이렇게 은혜를 받고 성장해 가지고 사회에 나갔던들 출장을 가면 출장을 가는 대로 잘못되지나 않나, 또 나가서 피곤하지나 않나, 훌훌 털고 돌아올 때는 얼굴을 쳐다보고 어머니가 눈치를 보면서 피곤해서 병이나 나지 않나, 또 회사에서 어떻게 뭐가 좀 잘못되지나 않았나, 장사를 하는 자식이라면 또 오늘 뭐나 좀 어떻게 팔았나, 그게 안돼서 상심이나 하지 않나 하고 걱정하면서, 땀을 흘리면 땀을 흘리는 대로 몸이 너무 쇠약해서 그러지나 않나 하는 생각에 눈치를 항상 보면서 한시도 놀 사이가 없이 걱정을 해주시는 부모들의 그 마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래서 자식이 나이가 먹어서 그 자식을 낳아도 어린애로 보이는 겁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귀중한 사랑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칠석의 만남이 있어서, 만날 수 없었던 걸 만나서 사랑하면서 또 애를 낳아서 기르는데 그렇게 돌아갔단 말입니다. 근데 그 자식들이 어떡해야 되겠습니까?
자식들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목련존자는어머니가 마구니 소굴에 있는데 그걸 건지려고 하다가 자기 힘으로는 문이 안 열리니까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리니 “네 힘이 부족하다. 그러니까 더 길러서 문을 열도록 해라.” 이렇게 해서 마음의 힘을 길러 지옥문을 열어서 어머니를 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모를 건질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성심으로 지극하게 했던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모로부터 햇빛을 받아가지고 자기가 자랐는데 어떻게 갚아야 묵은 빚을 갚느냐는 얘깁니다. 그럼 자기가 묵은 빚을 갚을 때는 벌써 햇빛을 주고 있을 때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죠? 묵은 빚을 갚을 때는 벌써 햇빛을 자기가 주는 땝니다, 거푸 말하지만. 자기가 묵은 빚을 갚지 못하면 햇빛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자기 한 것만큼이니까.
여러분이 한생각에 착한 마음을 쓰고, 착하다고 해서 무능하게 하란 말은 아닙니다. 눈을 새파랗게 뜨되 겸손하게 뜨고, 항상 겸손하게 뜨되 착한 마음으로 한생각 돌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이요, 바로 부모를 섬길 수 있는, 묵은 빚을 갚을 수 있는 마음이고 묵은 빚을 갚을 수 있는 사람은 햇빛도 잘 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햇빛을 주는 마당에서 이자의 이자가 불어서 거기서 바로 묵은 빚을 또 갚게끔 만들어주는 자식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백종이라고 하는 날을 역력히 생각해 보면서, 내가 항상 이런 말씀을 드리죠. 부모의 눈치를 봐서 속이 상해 한다면 듣기 싫은 말씀을, 좋은 말이라도 자꾸 하면은 신경이 쓰이니깐 말을 하지 말고, 또 말을 해서 남이 좋은 말이라면, 거짓말도 좋게 할 수 있는 거짓말이라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또 부부지간에도 언제나 좋은 말을 해주면서 나쁜 것은 안으로 굴려라, 업보나 인과응보나 죄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내가 만약에 놓을 수 있다면, 만약에 응달지고 꾸물꾸물하고 날이 궂은 거를 업보라고 한다면 그 업보는 금방 없어지고 볕이 납니다.
그런데 왜 업보가 있다고 해서 죄업을 사해 달라고 하면서 잠재의식 속에 그 습을 항상 두고 있습니까? 이것은 여러분이 생각해서 업보를 지어놓고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을 수 없고 바로 그 업보를 그럼 내놔 봐라, 죄업을 사해 달라고 하는 그 마음을 내놔 봐라 한다면 내놓지 못합니다. 그러니 한생각을 잘해서 한발 뛰어넘는 것을 잘 뛰어넘는다면, 우리는 앞도 끊어졌고 뒤도 끊어졌고 오늘의 ‘나’라는 존재도 공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여여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자체가 그대로 무심·유심 세계가 둘 아니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듯 정신과 물질 몸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고 있으니 항상 하얀 백종이죠. 그러니 해마다 하는 거라고 백종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시고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불을 밝히십시오.

입시를 앞둔 수험생들에게

얼마 전부터 내년에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될 학생들을 위해서 마음을 내는 입시발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 정성을 들이고 지극하게 마음을 내는 것을 스님들로부터 배워서 알고는 있지만, 정작 입시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주고 예민해진 심경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합격으로 이끌 수 있는지요?


그러고 보니 얼마 안 있으면 학생들 시험 볼 때가 되었군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내 한생각이라고 할 때 전체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한마음 할 때도 ‘한’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기 주인공을 믿고 자기 주인공에다 맡기라고 하십시오. ‘네 심부름을 하려면 네가 합격을 해야 될 거 아니냐.’ 하고 거기 맡기라고 하십시오. 왜냐하면 자기의 영원한 뿌리는, 마음의 씨는 보이지도 않고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마는 저런 나무도 뿌리가 있기 때문에 나무가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똑같다는 것을 일러 주십시오.
알고 이해가 가야 자기를 진짜로 믿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영원한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영원한 친구고 또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나무와 그 뿌리가, 뿌리를 뗄래야 뗄 수 없고 가지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의 근본 뿌리 자체가 바로 주인공이니까요. 생명의 근본과 마음 내는 거와 육신이 움죽거리는 삼합이 한데 합쳐서 이 세상을 살아나가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바로 주인공이라고 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때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더라.’ 이러고 ‘주인공! 되게 해 주시오. 주인공! 합격되게 해 주시오.’ 하고 이렇게 하는 것도 기복입니다. 이렇게 해도 될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하면 된다더라’ 하고 겉으로 해 가지고는 도저히 해낼 수가 없습니다. ‘너만이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지요. 그리고 그렇게 뗄래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진짜로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를 지금 누가 끌고 다니는데요? 자기 운전수가 없으면 차는 그만입니다. 한 부분만 고장이 나도, 파워를 일으켜도 자기 육신은 쓰러져요. 그런데 자기라고 그렇게 내세울 게 뭐 있어요? 아니, 간장 공장만 파업을 일으켜도 그냥 쓰러지는 사람들이 자기라고 그럴 게 뭐 있느냐는 겁니다. 간장 공장만 그런 게 아니라 에너지 피 공장에서도 고장이 나면 백혈병이라 그럽디다. 그러니까 모든 병 자체가 바로 업식 속에서 파업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업식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자기 뿌리에서 흡수해서 가지로 올려 보내는 거와 같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그 영원한 자기의 뿌리인 주인공에서만이 할 수 있는 거죠. 병고도 그렇고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이 재료니까, 시험 합격 하는 것도 반드시 거기에 놓고 ‘너만이
합격하게 할 수가 있다. 합격하게 할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네 심부름 하게 하려면 합격되게 해!’ 하고 진실히 그렇게 믿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됩니다. ‘사람’ 이러는 거는 ‘부처님’ 이러는 거와 같아서, 전체 한데 합쳐진 것이 ‘사람’입니다. 개별적으로 하나가 있는 게 사람이 아니고 한데 모여서 형성된 형체를 바로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라 가정에서 침체해서 돌아가는 거라든가,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거라든가,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이 마음을 먼저 잡아야지 육체가 잡아지는 법입니다. 자식들이 어떠한 문제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부모자식지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내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달이 돼서 같이 의합해서 돌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화목해지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몸을 잡는 법이니까요. 자기한테 가설이 돼 있으니 자기 스위치를 올릴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우리가 살림을 해 나가면서 도를 구합시다.
도를 구하는 건 여러분의 마음으로 그렇게 실천을 해 나가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켠다고 해서, 거기다 놓는다고 하면서 말을 막 하고 악을 쓰고 신경질을 막 부리고 속을 북북 긁어 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관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자식들이 나가서 자고 들어온다거나 공부를 안 한다거나 딴 짓을 마구 한다거나 이런다고 “너 이놈의 새끼, 뭐 어쩌고 어쩌고….” 하고 도로 뛰쳐나가게 하는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면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다는 건, ‘이거는 모든 게 내 탓이로다. 상대방의 탓이 아니라 내가 낳고, 내가 인연을 맺었고, 또 부모로부터 내가 나와서 이렇게 형성이 되었으니까,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나하고 부딪침이 있고 나하고 인연이 된 거지 내가 없는데 어찌 인연이 됐겠나. 그러니 모든 게 내 탓이로다.’ 그러고선 ‘모두 저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 하고 올라오는 어떤 생각도 돌려서 다시 자기한테 다 내려놓고, 부드러운 말을 해 주고 부드러운 행을 해 주면서, 미워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행한다면, 그쪽까지도 불이 들어옴으로써 나한테 조건 없이 사랑을 할 수 있는 화합심이 생기고, 자식들도 그 마음이 바뀌어서 아주 출중한 효자 효녀들이 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겁니다.

고가 붙을 사이가 없는 이유

병고나 업보에 의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여쭈면 스님께서는 고가 붙을 사이가 없기에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분명히 고통이 있고 병고가 있는데 고가 붙을 사이가 없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고(苦)·집(集)·멸(滅)·도(道)’ 사제법을 말하는데, 우리가 고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고라고 하니까 고인 것이지, 고가 있다면 어떤 것이 고인지 내놔 보십시오. 집착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집착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남을 한 번 때렸으면 너도 한 번 맞는다.’ 이것을 바로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한 번 때렸으면 한 번 맞는다’ 할 때, ‘아하! 때린 것도 나고, 내가 때렸기 때문에 바로 내가 맞은 것이다.’ 이럴 때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한 번 때려 보고 한 번 맞아 보니까,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되고 자기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수행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는 업보가 붙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있는 사생의 문제가,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문제가 인연 따라서 모인 겁니다. 내가 만약에 깡통의 마음을 썼다면 깡통의 마음 차원을 가진 것끼리 인연이 됐을 거고, 내가 금의 차원이라면 금끼리 모여서 이 몸이 됐을 거고, 천차만별로 돼 있는 마음의 차원에 따라서 인연을 지어서 이렇게 모인 겁니다. 여러분! 무쇠 쪼가리를 주워다가 금방에 갖다 놓지는 않으시겠죠? 금을 무쇠전에 갖다 놓지는 않으실 테고 말입니다. 보석을 넝마전에 갖다 놓지 않고 넝마를 보석전에 갖다 놓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각자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 끼리끼리들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이 몸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져서, 수십억 마리가 들끓다가 하나의 지도자만 남기고서는 다 없어지고 바로 대장으로 뽑힌 그 물질 하나에 동일하게 같이해 줍니다. 그러면 임신이 되는데, 그 어린애가 자라는 대로 피를 따라서,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그 사람의 차원대로 같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라는 대로 사생은 또 들어가는데 인연 따라서 차원대로 가서 같이 생기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인과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업보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걸 구태여 업보다, 인과다, 고다, 이런 이름을 붙이지 말라 이런 소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런 인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식이 태어나면 태어나는 대로 끼리끼리 모이는 겁니다. 내가 금이라면 바로 금의 인연으로 모일 것이고, 또 무쇠라면 무쇠의 인연을 가지고 자식이 태어나거든요. 본인이 무쇠기 때문에 무쇠의 인연이 오는 거죠. 금이라면 금이 올 테구요. 그래서 무쇠나 깡통이 서로 부딪치면 시끄러운 소리가 나듯이, 한집안 가족이 서로 괴로움을 주고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또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그렇고 벌레들도 그렇고, 화생이든지 습생이든지 태생이든지, 모든 게 다들 쫓고 쫓으며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피를 흘리며 서로가 부딪치고 우는 이러한 것이 아마 진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더하고 덜함도 없는 겁니다. 벌레의 세계는 벌레의 세계대로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고 그렇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고요. 우리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각박하고 조금도 여유가 없는 인생살이 같습니다. 또 인생살이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번 대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넝마라고 해서 넝마대로 고정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인과다 업보다 그런 말을 붙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넝마라고 해서 계속 넝마로 그냥 있지 않고 재생하는 대로 딴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오고, 역시 무쇠도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죠. 만약에 아궁이 뚜껑이 됐다면 아궁이 뚜껑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딴 걸로 모습을 해 가지고 또다시 나옵니다, 재생이 돼서 말입니다. 인간도 역시 요 모습으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갑니다. 이 이치를 우리가 진리라고 하는 거죠.
그렇다면 업보가 없다는 생각과 있다는 생각 중에 어떤 것이 틀리고 어떤 것이 맞을까요? 우리가 ‘업보가 없다’ 해도 틀리고 ‘있다’ 해도 틀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인데 마음 내는 거는 천차만별입니다. 만약에 천차만별로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고가 있고 고정됨이 있겠지마는, 우리가 천차만별로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고도 인과도 업보도 거기 붙을 자리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면서 고정관념도 없고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거, 만나는 거, 오고 가는 거, 먹는 거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그거를 공(空)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세울 게 없는 것이 바로 진리며, 부처요 법신(法身) 화신(化身)이며, 이런 것이 종합돼서 삼위일체로 회전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살림살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카세트에 과거에 수억겁을 거치는 동안 모습을 바꿔 가면서 화해서 살던 얽히고설킨 그 습이 모두 감겨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현재 짊어지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각본대로 카세트에서 솔솔 풀려서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팔자 운명이라고 아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팔자 운명이 아니라 자기가 한 대로 나오는 그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느끼고 알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 나의 근본 주처인 참나가 현재 나를 다지고 다져서 가르치고 이끌어 오는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자리에는 업보도 붙지 않고 아무것도 붙지 않습니다. 내가 공해서 건덕지가 없는데, 모두가 공해서 건덕지가 없는데 그 공한 자리에 붙을 게 뭐가 있습니까? 붙을 건덕지가 어딨으며 기댈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의심나걸랑 마음을 내놔 보십시오. 마음이 있다면 내놔 보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지 마음자리에는 붙고 떼고 할 게 없습니다.
그러니 카세트에서 각본대로 나오는 그 자체에다 다시 새로운 것을 녹음시킨다면, 수억겁 동안 감겨 있던 입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 바꾸어 넣는다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채우면 없어지고 없어지면 채워지는 그런 빈 그릇이 될 것입니다. 채워졌다 해도 틀리고 또 비웠다 해도 틀리니, 채워지면서 비워지고 비워지면서 채워지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우리가 여여하게 지금 놓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각본대로 나오는 그 모든 것을 카세트에다 되놓는다면 여러분이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쌓아 온 습을 다 놓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든 소 잡는 백정 노릇을 했든 무엇을 했든지 어떠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놓고 돌아간다면 그 업보는 지옥고라도 다 무너집니다.

마음 아닌 마음과 길 아닌 길

『한마음요전』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 올립니다. “마음 아닌 마음으로 길 없는 길을 걸으면 우리는 한마음일 것이며 그 한마음 속에서 결국 모든 존재는 위대한 불도에 들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마음 아닌 마음과 길 아닌 길은 무엇을 뜻하는지요? 그 도리를 깨치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나요?

사람들이 ‘마음, 마음’ 하는데 마음이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이 너무 여러 가지로 많기 때문에 마음이 아니라고 그러죠. 그래서 마음 아닌 마음을 진짜로 써야 된다, 마음 아닌 마음을 항상 둘 아니게 써야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우주 바깥을 벗어나든지 안에 있든지 지구 바깥을 벗어나든지, 세상 천지만물 자체가 생긴 것이 내가 났기 때문에, 내가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근본입니다. 천지의 근본이나 또는 태양의 근본이나, 인간의 근본이나 인간의 삶의 근본이 바로 내 한마음, 체도 없고 보일래야 보일 수도 없고 내놓으면 쥘 수도 없는, 빛깔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러한 영묘한 내 영원한 불심 자체를 표현해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이고, 또 그 자체의 근본 축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근본에 모든 게 들어 있고 그 근본에서 모든 게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 내는 거는 천차만별로 마음을 낼 수 있죠. 24시간을 통해서 별의별 생각 다 합니다. 좋다는 생각, 밉다는 생각, 증오하는 생각, 사랑하는 생각, 온통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카락 수효만큼도 더 할 때가 있습니다. 머리카락 수효를 셀 수가 없듯이, 모래알을 셀 수가 없듯이 세상은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생각도, 생각을 했어도 없고 그러련만, 여러분은 생각을 해 놓고 그걸 착을 두곤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끄달리죠. 생각 한번 잘하면 그게 바로 생산을 해내는 건데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인공을 믿고 모든 걸,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놓고 안되는 거는 주인공밖에 해결 못한다 하고 믿고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다면 양면이 다 거름이 돼서 그냥 넣기만 하면 없어지고 넣기만 하면 없어지고 그러죠. 수가 없이 넣어도 넣은 사이가 없고 꺼내도 꺼낸 사이가 없이 여여하게 이 세상을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단 말입니다. 내 몸 태어나기 이전 영원한, 그 콩씨를 알게 된다 이겁니다.
내 마음을 잘 쓰면 한마음이 되어서, 체가 없는 마음이 오고 감이 없이 한마음이 돼 줘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해 줄 수 있지만 내 마음을 잘못 쓰면 잘못 쓴 대로 배척을 당해서 보이지 않는 데서 한마음이 되어 주질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전부 마음에 의해서 육신이 움죽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들이 한마음이 됨으로써 육신은 거기에 호응을 해 주는데 마음이 그렇지 않으면 육체도 호응을 안 해 줘요. 그러니 무의 세계에서, 즉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지 않으면, 보아 주지 않으면 보이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리고 세상법이 따로 있고 천국이 따로 있고, 지금 현상세계가 따로 있고 이런 게 아닙니다. 순간순간 이렇게 돌아갑니다. 한 찰나에 돌아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지만, ‘마음 하나지만’ 하는 건 축과 같다 이겁니다.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든 연자가 돌아가든 뭐가 돌아가든 축은 움죽거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안의 여러분 축을 믿으세요. 축을 믿는다면 그 축에 의해서, 그걸 ‘심봉’이라고도 합니다만, 프로펠러가 돌아갑니다. 세상법이 다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주전체가 돌아가듯이 몸도 내 축에 의해서, 힘에 의해서, 즉 말하자면은 마음을 만 가지로 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보이는 거, 색상으로만 물질로만 치달아 올라가고 있습니다. 좋은 걸 보면 금방 좋다고 웃고 즐기는데, 그게 없어졌을 때는 금방 울 것을 무얼 그리 좋다고 웃느냐는 겁니다. 금방 또 울 것을 뭘 그리 좋다고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아도 좋다고 할 게 없고 언짢아도 언짢다고 할 게 없다는 얘깁니다. 그 반면에 모든 것이 내 잠재의식 속에 하나의 테이프 속에서 모든 소리가 나오는 거니까 거기다가 내가 지금 현상계에서 살아나가는 그 자체를,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고 돌아간다면 과거의 인과응보나 유전성이나 모든 악보(惡報) 같은 문제들이 얽히고설킨 게 다 무너지고 없어진다는 얘깁니다.
어저께 한 일을 생각을 계속하고, 어저께 한 것을 집착을 하고 욕심을 내고 그런다면, 분간을 못하고 분수를 지키지 못한 채 건너뛰게 되니깐 물에 풍덩 빠지면 울고불고 야단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이자 불교요, 불교이자 생활입니다. 그 도리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느라고 49년을 설하신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여직껏 그 이치를, 길 없는 길을 우리가 발 없는 발로 광대무변하게 우주 천하 어디에고 아니 닿는 데가 없이 닿을 수 있는 그런 참 자유인이 되라고 가르치셨는데, 오늘날까지 기복으로 헤매고 돈다면 이건 안 될 말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의 능력을 길러서 내가 없는 허공길을 마음 아닌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걸을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처님과 나의 주인공

부처님의 주인공이나 저의 주인공이 마찬가지라 그러시는데, 부처님의 주인공은 무명을 일으키지 않는데 저의 주인공은 왜 무명을 일으킵니까?

무명이 달리 무명인가요? 그 도리를 모르니까 무명이지요. 무명도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무명이 붙지 않는 것도 내 마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죠? 잠재의식 깊은 속에 만약에 녹음테이프가 하나 있다면, ‘일심(一心)이라면’ 하는 소립니다. 공한 일심이라면, 자기 주인공 자체가 테이프라면 말입니다. 녹음이 된 데다가 다시 녹음을 하고 또 녹음이 된 데다 다시 녹음을 하고 자꾸자꾸 가면은 앞서의 녹음한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그런다면 그것은 무명이 붙지 않는 것입니다. 그대로 놓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대로 놓고 가는 건데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명이라는 것도 이름을 붙여서 무명이지, 무명이 없으면 부처를 이루지 못해요. 망상이 없으면 부처도 이루지 못합니다. 분별이 없는데 어떻게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그럼 목석이고 송장이지! 또 생명 근원, 뿌리만 있다면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예요.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면 위로는 부처님을 섬기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라는 걸로만 듣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는 뜻을 그렇게 넓게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렸습니다. 우리 몸 하나를 놓고 축소해서 작게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위로는 참자기 자체, 참자기를 존중하면서 아래로는 자기 몸뚱이를 올바르게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아야 남도 올바르게 이끌어주지 않겠습니까? 내 행동이 발라야 남들도 스스로 “저 사람 정말 배울만 해! 말과 뜻과 행이 올바르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정말 본받을 만한 사람이야!” 이렇게 말씀들 하시죠.
그런데 그것이 제대로 안될 때, 하나라도 어긋날 때 그것은 업보가 되고 유전이 되고 바로 무명이라고 이름 해서 붙일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무명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고 부처라고 붙일 것도 없는 겁니다. 반드시 우리가 살고 돌아가려니까, 돈이라고 이름을 지어 놨고 또는 우리가 물건에 이름을 붙여 놓고, 이름을 불러야 되겠으니까 그런 거죠. 어린애를 낳아도 이름을 붙여서 아무개라 해야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이름을 붙여놓은 것뿐이지 이름이 사실은 그 사람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이름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그 이름을 대동소이하게 쓰고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공했다는 얘깁니다. 그거고 저거고 다 한마음에서 나오는 거니까, 나쁜 마음이 나오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거, 좋은 마음이 나오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마음이 나오면 좋은 행위를 할 것이고 나쁜 마음이 나오면 나쁘게 행을 할 것이니까 모든 것은 자기 참주인공에 모든 거를 맡겨 놓고, 믿고 물러서지 않고 거기다 관하면서 그저 모르면 모르는 대로 놓고 알면 아는 대로 거기다가 관해서 놓았을 때, 비로소 참 생명수의 맛을 홀연히 알 수 있는 그런 여건이 생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정에 풍파가 이렇게 많고 병이 많아서 죽겠는데, 급해서 죽겠는데 무슨 그렇게 주인공을 찾고 주인공에 전부 맡겨 버리라고 그러나? 아니, 난 지금 당장 급한데!” 이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뿌리가 싱싱하면 가지도 싱싱할 것이고 썩지 않을 것입니다. 이파리도 싱싱할 것입니다. 이파리 썩고 가지가 썩고 그런다고 해서 애를 쓰지 마시고 뿌리만 싱싱하다면 가지나 이파리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싱싱하게 아주 푸르를 것입니다.
2003-08-13
 
 
   
   
20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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