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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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사지
백제 무왕 천도의 꿈 서린곳

여름 날 비 오는 들녘에서 듣는 부음(訃音)은 쓸쓸하다. 빗물 머금은 채 글썽이는 풀벌레들의 초혼(招魂)은 더없이 비감(悲感)하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소발자국을 찍으며, 녹슨 철조망을 헤집고 남북을 부지런히 오가던 ‘민족 기업인’ 한 사람이 돌연 우주 속으로 사라졌다. 무엇이 그를 역사의 캄캄한 벼랑으로 뛰어 내리게 했는가. 누가 그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 떨어트렸는가. 찢겨도 푸름을 잃지 않는 청청한 소나무. 그 상처에 대고 네 탓 내 탓 입방아를 찢는 세태야말로 해충처럼 무익한 것이다. 소나무는 딱따구리를 기르지만 그 딱따구리 때문에 결국은 죽는다고 했던가. 동해 그 먼 길을 노잣돈 아낌없이 오갔다면 그는 이미 장사꾼이 아닌 ‘급고독장자’ 일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깨달았다면 그는 이미 범부가 아닌 ‘통일보살’ 이었을 것이다.

만경창파(萬頃蒼波). 횡으로 종으로 줄맞춘 벼 포기들이 넘실대는 김만평야는 다가설수록 아득하다. 나라 안팎의 어지러움만 아니라면 저 들판 한 켠에 허수아비가 되어 한 세상 허허롭게 머물다 간들 무슨 허물이 될까 싶다. 흰 옷 입은 해오라기들 벼 포기들 사이로 해 종일 미꾸라지를 집어 올리는 이곳이야말로 반도의 문전옥답이 아니었겠는가. 남으로는 만경강. 서북으로는 금강이 굽이치는 익산 땅은 수로교통의 요충지요, 군사적 요새였다. 여기에 풍부한 수량(水量)을 더하여 농업생산력까지 구비하였으므로 익산은 고대 왕조들이 입맛을 당기기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호에서 한나절 넘게 미륵사지와 마룡지를 둘러보고도 좀처럼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용화산 그리메가 아직 미륵사지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까닭만은 아니다. 쌍릉의 봉분에 내린 잔디가 그 잔뿌리를 들썩이는 까닭만도 아니다. 촌색시처럼 얼굴을 붉힌 봉선화가 눈길을 주는 궁평 마을 담장 밑을 그냥 지나친다면 찬바람이 들어도 첫사랑처럼 익산의 미련은 떨치지 못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배롱나무 아롱아롱 붉은 꽃빛 수를 놓는 듬직한 오층탑 발 디딘 왕궁리 언덕은 혼자 가슴에 간직하기 버거운 풍경이다. 여기에 궁궐을 짓고 사원을 건축하지 않으면 못배겼을 백제 무왕(600~641)의 충격이 이와 같았을 것이고, 때 되어 무심한 방초로 솟아나는 갈무리된 제국 건설의 비원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일대는 고대 궁궐 터 뿐만 아니라, 제석사지(사적 제 405호), 고도리 석불입상(보물 제46호), 왕궁리 오층석탑(국보 289호), 사자사지, 오금사지 등 백제 시대의 크고 작은 폐사지들이 널려 있다.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은 이곳을 중심으로 익산 천도를 꿈꾸며 새로운 왕도 건설을 기획했었다. 그리하여 그는 용화산 아래 민족 총화로 미륵사를 창건한데 이어, 제석천의 힘으로 외침을 벗어나기 위해 왕궁 부근에 내불당 성격인 제석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왕궁리사지 탐험은 삼례·전주 방향의 1번 국도를 따라 도로변에 있는 왕궁리 사적들을 살피고, 제석사지와 고도리 석불입상을 차례로 순례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나, 제석사지의 매력을 떨치지 못하는 조바심은 곧장 궁평마을 농로를 달려 제석사지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궁평마을에서 제석사지를 찾기 위해서는 수미산 허리를 헛돌 듯 ‘제석들’ 이곳저곳을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 제석사지는 현재 홍씨 집성촌인 왕궁리 247번지 일대에 걸쳐 있다. 마을 전체가 사지인 셈이다. 어디가 금당지이고 강당지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익산시에서는 1998년 5월 이곳 일대를 사지로 지정, 발굴작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마을전체가 사지이기 때문에 겨우 기와 터 정도만 괭이질을 했을 뿐이다.
제석사지의 창건에 관해서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그 기록이 나타나 있다. 창건연대는 밝힐 수 없으나, 벼락으로 소실되었다가 중창되었으며, 어느 시기에 다시 폐사되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여남은 노송들이 허리를 비트는 솔숲이 칠층목탑이 있던 탑지이다. 들녘 한 가운데 자리한 솔숲이라 벼락을 자주 맞는 탓인지 부러진 소나무 가지들이 지금도 빨갛게 말라있다. 탑지에는 전설 같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토루(土壘) 중앙에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있는 심초석이 뒹글고 있다. 탑지 아래로는 슬그머니 들어찬 무덤 한기가 터가 센 탓인지 봉분의 잔디가 엉성하여 이끼 앉은 묘비명조차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담장과 담장 사이로 늙은 감나무가 가지를 펴고, 주민들은 제대로 된 보상도 없이 삶의 터전을 잃지 않을까 외지인들의 기웃거림을 경계하는 눈치이다.
제석천은 수미산 꼭대기 희견성(喜見城)에 사는 도리천의 왕이다. 그 이름이 Sakka이므로 석(釋)이라 음역하였고, 신들의 임금이므로 제(帝)라 하였으며, 그 본체가 신(神)이므로, 천(天)이라 하였다. 제석천은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며, 불법과 불법에 귀의한 사람을 보호하고, 아수라의 군대와 싸운다. 백제의 무왕은 제석천의 힘으로 왕실을 보호하고, 국가의 번영과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석사를 세웠으나, 하늘은 뇌우를 내려 제국의 꿈조차 제행무상임을 일깨우려 하였다.
왕궁리역사유적전시관 공사가 한창인 오층석탑 주변엔 원형이 훼손된 토성이 길게 호를 두르고 있다. 이른바 이것이 전라북도기념물 제1호인 왕궁리토성이며, 이 토성 외에도 왕궁리를 중심축으로 반경 4~5 ㎞ 안에는 미륵산성, 익산토성 등 백제시대의 여러 성곽이 밀집되어 있다. 1989년부터 시행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학술조사에 의해 왕궁리오층석탑을 중심으로 그 북편에 금당, 강당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출토된 명문에 의해 대관사(大官寺), 관궁사(官宮寺) 등 왕실의 원찰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왕궁리 사지 답사에서 마지막으로 눈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고도리 석불입상이다. 고도리석불 입상은 1번 국도 왼쪽 논 가운데 서 있는데, 높이 4.2m의 똑 같은 석불입상 2기가 옥룡천을 사이로 200m가량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둘은 각각 남자와 여자인데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칠석날 견우와 직녀를 상징하는듯한 소박하기만한 백제인의 인심을 엿볼 수 있다. 삼계를 초월한 부처조차 인간의 마을에 불러 들여, 왕궁의 이정표이거나 수호신으로 삼은 ‘익산문화’의 진면목이 아닐 수 없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남원 만복사지
사진=고영배 기자

왕궁리사지터 가는길
익산 왕궁리 사지는 금마네거리에서 전주·삼례 방향의 1번국도를 따라 1.5㎞ 정도 가면 된다. 오층석탑이 있는 기양리 일대는 현재도 궁궐터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제석사지는 오층석탑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2㎞ 정도 떨어진 궁평마을에 있으며, 홍씨 집성촌인 이 마을 전체가 폐사지이다.
200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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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