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탈출구
선재는 요즘 뉴스 보는 일이 겁이 난다. 하루에 한 번 꼴로 자살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살한 사람의 수가 1만3천55명이란다. 하루에 평균 36명 꼴이다. 사업 실패, 성적 비관 등에서부터 카드 빚에 이르기까지 사연도 다양하다. 급기야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재벌 총수마저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 일부가 열반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여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었다. <율장>에 따르면 ‘미가란디까’라는 승려가 발우와 가사를 받는 조건으로 60명이나 되는 승려의 목숨을 끊어주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부처님의 엄중한 경계의 말씀은 이러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그 승려들을 위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법에 알맞은 것이 아니고 사문에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도 정당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행해서는 안된다. 비구들이여, 이 계율을 공포한다. 승려가 고의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자살을 도와 줄 사람을 구하거나 하면 함께 살 수 없다.”
자살 역시 살생계에 속하는 ‘바라이죄’라는 말씀이다. 불교에서는 갈애(渴愛)가 모든 형태의 괴로움과 존재의 윤회를 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갈애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는 것과 같은 격렬한 탐욕을 일컫는 말이다. 갈애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욕애(欲愛), 유애(有愛), 비유애(非有愛)가 그것이다. 이 중 세 번째인 비유애가 바로 죽고 싶은 욕망을 가리킨다. 죽음의 욕망 역시 격렬하다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훌륭한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어쩔 수 없는 딱한 처지가 있다고 해도 자살은 그저 번뇌일 뿐이고 계율을 어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을 영원히 끊어버려야만 비로소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 금생의 고통을 잠시나마 면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자살을 택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최원섭(성철선사상연구원 연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