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충사(表忠寺), 출가본사이다 보니 많은 애정과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처음으로 ‘중노릇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없이 솔선수범으로 보여주신 해산(海山)스님이 계셨던 곳. 1976년 사미계를 받고 산중의 어른이신 스님께 출가시켜 주신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문안인사 드리러 매일 내원암으로 올라가곤 했다. 열 세살 어린 나이에 눈을 맞으며 올라다니던 그 길은 왜 그리 바람도 많이 불고 추웠던지….
그렇게 봄이 지나고 그해 여름, 어린 사미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있었다. 그땐 요즘처럼 연수원이다, 콘도 같은 것들이 없었을 때라 방학을 맞이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은 사찰로 수련대회를 참 많이들 왔다. 큰 가람이다 보니 많은 인원을 수용할수 있는 표충사는 수련대회에 좋은 장소여서 학생들은 쌀 몇 되를 들고 와서는 절에서 머무는 비용을 대신하곤 했다. 또 몇몇 단체들은 해산스님이 계신 내원암에서 수련대회를 열곤 했다. 매미 울음소리로 귀가 멍멍할 정도로 무더운 여름날, 청년들은 법당에서 참선을 하였고 해산스님께선 밀짚모자 눌러 쓰고 평상시대로 호미 하나 들고 도량안 화단의 풀을 맸다. 시원한 그늘이 그리워지는 오후였는데 세수 80이 가까운 노스님이 직접 풀을 매는 모습을 보자 학생들과 청년들은 법당에 계속 앉아 있기가 미안해서인지 하나 둘씩 일어나 울력에 동참하였다.
노스님께선, 청년들이 며칠 절에 머무는 수련대회를 통해서 자기가 불교를 잘 아는 것 같은 아상을 가질까 경계하셨는지 같이 풀을 매는 동안 시골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옛날 얘기 해주듯 편안하게 법문을 해주셨다. 노동의 소중함을 책을 통해서만 알았던 젊은이들은, 큰 스님이 법상(法床)에서만 법문하시는 줄 알았다가 몸으로 땀 흘리는 것도 수행의 한 부분임을 직접 일깨워 준 노스님의 법문과 소탈한 모습에 감복한 나머지 수련대회가 끝나는 날까지 새벽과 저녁엔 열심히 정진하고 오전과 오후는 열심히 땀흘리는 울력을 했다. 스님께서는 젊은이들에게 “신심있는 신도의 시주는 뜨거운 쇳물을 마시는 듯 해야 하며 이렇게 땀으로 소화시키는 것이다. 너희들이 먹는 밥은 부모님들이 열심히 일해서 먹여주는 것이니 피눈물로 알아 게으르지말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어린 나이에 무조건 우러러 보기만 하고 막연한 두려움만 있었던 나에게 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은 큰 충격이었고 나도 나중에 저렇게 살고 싶다는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만가지 말보다 직접 체험해서 몸으로 감동한 이들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흔들리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실한 불자들로 남아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법상에서 주장자 대신 능동(能動)으로 많은 이들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이끌었던 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살았던 인연에 지금도 표충사를 떠올릴 때마다 감동하면서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정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젊은 시절 해산스님은, 당시 전국 선원에서 열 손가락안에 들 정도로 그 정진력을 인정받은 수행자였다. 연로해서도 뼈와 가죽만 남아있을 정도로 야윈 모습이었지만 수좌들에게는 등골에 식은 땀이 나도록 힘차게 경책하셨다. 그럼에도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제방 선원에서 운수 납자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먹지 않는다’는 법문이 말로만 하는 공염불이 아니라 그 연세에도 해야만 하는 수행자의 하루 일과임을 항상 실천으로 보여주신 스님은 모든 수행자의 귀감이 되셨던 것이다.
해산스님께선 79년 열반에 드셨다. 먼 발치에서 입적하셨단 소식을 접하고는 마치 부모님을 잃은듯 목이 메여 왔으나 스님께서 말학(末學)후배에게 남기신 호미정진의 정신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도시 포교당에서 포교를 정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가끔 피곤하고 힘들때 노구를 이끄시고 호미를 놓지 않으셨던 스님을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 저 밑에서부터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고 힘이 난다. 젊었을 때 열심히 정진해야 나이들어서도 허리가 곧아서 그 정진력으로 좌탈입망 할수 있고, 수좌는 좌복위에서 목숨을 마쳐야 한다는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현원(玄元)스님은 부산 生으로 표충사에서 득도했다. 통도사 강원을 수료했으며 1987년까지 13안거를 성만했다. 87년부터 95년까지 8년간 토굴에서 수행했으며 현재 분당 연화사 주지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