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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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계와 출가계
우리들이 신행하고 있는 불교는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불교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세월동안 시공을 달리하며 발전해온 점도 하나의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대소승 경전들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불교신도들이 불교학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장구한 세월에 걸쳐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면서 성립된 대소승의 경전을 하나의 시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자 역시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 종파 나름대로 교판론의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각 종파 나름의 주의와 주장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사상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지만, 각 종파에 맞는 신앙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순서 없이 뒤섞여 들어온 대소승 경전을 일관되게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웠으며, 그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교판론인 것이다.
계율 역시 마찬가지다. 우선 재가자들은 모두 3귀계와 5계를 수지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유사불교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불교신도는 될 수 없다. 출가자 역시 4바라이법을 중심으로 250계가 시설되어 있다. 4바라이법은 간음, 살생, 도둑질, 거짓말의 네 가지를 금지하는 것이다. 율장에 의하면 4바라이법을 어긴 승려는 교단에서 추방된다. 그들이 다시 교단에 들어올 수 있는 길도 없다. 이것은 4바라이법이 얼마나 중시되고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교단 추방 보다 무거운 벌은 없기 때문이다. 4바라이법 이외의 사항은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것으로 용서가 되었다. 만일 어느 승려가 대중들에게 참회했음에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4바라이법의 특징은 무엇인가? 출가자는 여하튼 음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과거 부처님 당시에 결혼한 뒤 출가한 사문들이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이전의 아내와 동침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음행해선 안 된다고 설파한다. 또 어떤 출가자는 원숭이와 성교를 한다. 그는 사람과 음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계율을 파괴한 것이 아니라 항변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수간도 음행으로 간주한다.
재가자들이 지키는 5계와 출가자들이 지켜야 하는 4바라이법은 형태상 동일하다. 5계 중에서 술을 마시지 않는 것만 4바라이법에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재가자는 세속 생활을 하므로 부부간의 음행은 허용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부 이외의 음행을 금지한다는 의미에서 삿된 음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것이다. 그렇지만 출가자는 어떠한 상항이나 이유로도 음행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재가자와 출가자의 차이인 것이다. 또한 거짓말을 해선 안 되는 조항도 출가자와 재가자의 차이가 없다. 다만 깨닫지 않았으면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에 속하는데 재가자 보다는 주로 출가자에 해당된다는 점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출가자들이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았다고 과장한 경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앞으로 깨닫게 될 것이라 허풍치는 것은 거짓말에 속하지 않는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한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별은 성교의 유무와 깨달음에 대한 거짓말에 달려 있다. 특히 성행위 문제로 아무리 학식이 높고, 인품이 고매해도 결혼한 사람은 결코 출가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불교 현실에서 수많은 재가교단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만일 그들이 출가자로서의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계율에 대한 문제부터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사람은 포교사, 전법사란 칭호는 어울릴지 몰라도 승려란 호칭은 맞지 않는다. 불교운동가로서 시대 상황에 맞는 불교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일이다. 폄하될 일은 더욱 아니다. 그렇지만 계율의 문제가 등장하면 상황은 달라지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이념에 따르면 출가와 재가를 구별하는 것이 하나의 집착으로 치부될 수 있다. 그런 외형상의 문제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궁행하며 살고 있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보살이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승려냐 아니냐의 문제는 아니다. 대승불교의 이념에선 출·재가를 하나의 사회적 역할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치의 우열을 부여하진 않는다. 그래서 함께 대승불교란 새로운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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