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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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생명의 여백(餘白) 논리
경전, 언어 아닌 진리 표현의 논리

생물은 감각기관을 지니고 대상을 인식하여 반응하고 행동하게 된다. 자신이 인식하여 파악하지 않은 상황이나 상대에 대해서는 일단 자기 보호를 위해 두려움을 지니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매우 조심한다. 호랑이도 처음 보는 작은 동물에 대해서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장면을 TV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생명체의 이러한 인식과정은 사물을 원인과 결과로서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완성함으로서 그 틀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여 편안함을 얻게 된다. 이러한 하나의 관점을 그 시대의 패러다임(paradigm)이라 부른다.
지금의 현대 사회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소위 합리적 이성(理性)이라는 것을 큰 틀(paradigm)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인 논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이 세상은 명쾌하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사 쓰여진 성경이나 자비심으로 이 세상에 나타난 부처님의 말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경전에 얼마나 많은 비논리적인 역설(逆說)의 말씀이나 표현이 있는가. 성경에도 그토록 사랑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 ‘나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 불화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말도 있고 불경에도 ‘모든 중생을 제도하지만 제도된 중생은 하나도 없다’는 등, 일반적인 논리로 보았을 때 말도 안되는 황당한 소리를 알쏭달쏭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갈팡질팡한 소리나 하는 미치광이인가? 그것은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사실·언어의 논리가 아닌 진리의 논리(이면·여백의 논리)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엄밀하게 말해서 경전의 이야기는 전혀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논리체계가 다른 것이다.
알고 보면 우리가 얼핏 보기에 매우 모순 되는 경전의 여러 표현과 모든 이야기는 놀랍게도 단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이면(裏面)의 논리를 알아차릴 때 길고 긴 팔만사천 법문과 구약과 신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그 역설과 모순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정밀하게 단 한 가지만을 가리키기 위해 그토록 논리적으로 쓰여져 있다는 것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이냐고? 떨어지는 햇살을 잡아라!)
그렇기에 옛 선사는 ‘모르고 말하면 옳은 것도 그릇된 것이요, 알고 말하면 그릇된 것도 옳은 것이다’라고 짤막하고도 간결하게 말씀하셨다.
생물의 감각기관을 통해 바라보는 사물은 지식(知識)으로 알게 되지만, 육근(六根)에 머무르지 않는 존재의 참 모습은 여백(餘白)을 아는 지혜(智慧)로만 알 수 있다. 지식은 전해 줄 수 있지만 지혜는 전해 줄 수도 없다. 스스로 얻으려 하지 않고는 부처도 어찌 해 줄 수 없고 예수도 오직 문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니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다 같이 육근을 지닌 생물이면서도 인간의 몸을 받아 길들여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 어찌 한 시각이라도 방일할 수 있으랴. 다만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여백의 세계에서는 아는 만큼 안보이게 되기에.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3-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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