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아닌 내 마음 알아야 터득되고 정신계 간파할 수 있어
▲스님: 법당에 들어오면서 보니까 바깥에 서 계시는 분들이 많기에 추워서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추운 바깥에 서 계시는 분들도 고통이지만 법당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러분도 고통스러울 듯싶으니 고통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여튼 여러분이 공부만 열심히 하신다면, 마음공부는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가다가 엎어지면 반드시 그 땅을 딛고 일어나지 다른 곳을 딛고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또한 마음 속에서 모든 천차만별로 나오는 일체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 있어서, 오직 그 마음 속에서 나온다고 할 땐 그 마음 속에서 모든 이름도 나오고 그 마음 속에서 행도 나오고 그 마음 속에서 활용 자격도 또 나온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온 거 거기에서 해결을 하고, 거기에서 판단을 하고, 거기에서 모든 행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럼 이쯤하고 여러분이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먼저 저희들이 공부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시고자 이렇게 질문을 하게 해 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제가 궁금한 점을 몇 가지로 요약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의레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귀의하는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수많은 제불보살 가운데 특히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에 귀의해 온 데는 어떠한 까닭이 있는지요? 그리고 그것은 한마음 공부와 무엇이 다른지요? 좀 자세히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우리가 매사 생활해 나가는 데에 내 한마음에서 여러 가지의 마음도 나오고 여러 가지의 이름도 나옵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라는 이름은 정신세계를 말하고, 관세음은 현상세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일 뿐이지 과거 정신세계나 현실세계가 둘이 아닌 것입니다. 정신과 몸이 어디 둘입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장갑을 낀 손이 어떻게 장갑 낀 것과 둘이겠습니까? 장갑을 끼었으면 말입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마음 속에 아미타불도 들어 있고 관세음보살도 들어 있으니 여러분이 지금 그대로 아미타불의 행과 관세음보살의 행을 하고 계신 겁니다. 둘이 아니게 모두가 하나하나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까닭에 일체가 다 가설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인연줄에 의해서 얽히고설켜서 돌아가는 가설 말입니다.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독불장군이 없다고들 말하죠.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이 있고, 넓은 것이 있으면 좁은 것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아미타나 관세음보살이 바로 여러분 마음 가운데에 실질적으로 들어있는 것이죠. 아미타가 따로 있고 관세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면 됩니다.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바깥으로 찾으며 끄달린다면 그건 공부하나 마나입니다. 그리고 공덕이 하나도 없고 이익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지금 내가 가르치는 도리는 참나를 발견해서 깨달아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나투는 방법까지도 체득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관세음보살 따로 있고 아미타불이 따로 있다고 바깥으로 끄달린다면 안 되겠죠. 여러분은 가정에서 때에 따라 아버지가 되고 남편이 되고, 아들이 되고 형이 되며, 때에 따라서는 사위가 되고 그러는데, 어떤 위치가 되었을 때 관세음이라 하고 어떤 위치가 되었을 때 아미타라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모습일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부처인 것입니다. 내 마음 아닌 내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터득이 되는 것이지 내 마음 아닌 내 마음을 모르고서야 어찌 터득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정신세계를 간파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질문자1: 사람의 육신이 떨어지면 더 이상 공부하기가 어렵고, 대개의 경우는 몸 떨어질 때의 의식수준에 따라 윤회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몸 떨어지고 없는 조상의 천도식이란 무엇이며, 그 천도식에 조상들께서는 어떻게 연결되는지요?
▲스님: 사람이 살면서 악업을 지으면 악업의 보가 생기고 선업을 지으면 선업의 보가 생기는 법. 다시 말해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소리죠. 이렇듯 법이 연결되는 반면에 이 세상에서 몸 떨어지면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살았을 때의 차원대로 죽어서도 일차원이면 일차원대로 있고 이차원이면 이차원대로 있어요.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는 뜻이죠. 그러나 이 세상에 물질로 한 물건이 나온다면 수만 가지로 부딪침이 있기 때문에 그 부딪침에 의해서 굴러가는 수레와 같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지어갈 수 있는 것이죠.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말을 부드럽게 하며, 좋은 일 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선의 보를 받을 것이고, 악하게 남을 증오하고 원망하며 이간질해서 싸움이나 붙이고 사기나 일삼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악의 업보를 받을 것이다 이겁니다. 그러다가 몸 떨어지면 그 상태로 남는 것이죠. 그대로 업보에 의해서 마음 컴퓨터에 스스로 입력이 되었다가 다음에 하나하나 솔솔 나오게 되니 그것이 바로 악업과 선업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그 차원대로 있기 때문에 선업을 지은 사람은 선업으로 진행될 것이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죽어서도 자기 몸뚱이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몸 속에 있던 모습대로 다 나와서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이 가로 걸리게 되는 겁니다. 그림자처럼 악업의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이죠. 그래서 천도가 생긴 것입니다.
차원에 따라서 강을 건너려 해도 자기 몸이 있는 줄 알고 빠져 죽을까봐 못 건너가며, 체가 없다는 걸 자기 자신이 모르기 때문에 상대도 체가 있는 걸로 알고 한 발짝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죠. 허상이 그냥 그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 나타나는 대로 끄달리고 한 발짝도 못 건너가기 때문에, 아니 설사 건너갔다 하더라도 타 죽을까봐 불바퀴를 못 건너가기 때문에 천도가 생긴 것이며, 눈 뜬 사람이 눈 감은 장님을 이끌어 가는 도리가 있으므로 천도의가 생긴 것입니다.
▲질문자1: 저희가 공부해 가는 도중에 개인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갖가지로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특이한 정신상태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말하자면 공부가 익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아직 덜 익어서 그런 것인지, 그리고 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경험이 자주 없는 경우는 그 무엇으로 자신의 공부가 익어 가는 줄을 확인할 수 있는지요?
▲스님: 그것은 아까도 요약해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관세음보살을 봤다고 해도 놓아야 하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 정신세계의 특이한 경험을 했다 하여도 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내 마음속에서 빚어내는, 즉 말하자면 어떠한 모습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내 몸 속에 잔뜩 들어있는 악업 선업의 의식자체가 모습으로 화해서 나오는 것이니 다시 거 기에다 맡겨 놔야만 공부의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땅에서 엎어지면 엎어질 때마다 땅을 딛고 일어나려고 해야 일어나지지 그렇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것을 일러서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닫지 못한 대로 거기에 맡겨 놔야 하고, 또는 그러한 경계가 다가오면 오는 대로 거기에서 수없이 나오는 것이지 다른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거기에다 다시 되놔야 하는 것입니다. `‘만심이 천심이요, 천심이 일심’이란 얘기가 있듯이 일심에서 만 가지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일심에다 다시 놓고 일심 아닌 일심을 참구해야 합니다.
▲질문자1: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스님께서 법문하시는 중에 통 밖에 나와야 통을 굴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량적으로 그 말씀은 이치에 맞습니다만 실참의 경우에서 어떠한 경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 말씀 중에 통이란 무엇이고 통 밖은 무엇이며, 또 굴린다고 할 때의 굴러지는 대상은 무엇입니까?
▲스님: 통이라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나라고 하면서 내가 하는 것이고,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줬다고 하며 나라는 것을 세우고, 그래서 아집으로 억눌려 있는 사람을 통 속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는 것이죠. 마음은 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우주 바깥에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넓게 지혜롭게 생각한다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벗어나야만이 나를 굴릴 수가 있지 벗어나지 못하고 어떻게 나를 굴릴 수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속에 내 마음이 갇혀있는데 내 마음속에서 내 마음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어는 길도 아니요, 벗어나지 않는 길도 아니니 그럼 진짜 어떻게 하는 게 벗어나는 길인가? 여러분이 그대로 지금 살고 계시고 마음속에서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굴림이며 마음속에서 마음내기 이전 마음을 깨달아야 물리가 터지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마음속의 참 마음을 깨달아야만이 비로소 그 때에 진짜 공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신세계의 나와 물질세계의 나가 둘이 아니게 상응 상조 하면서 작용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중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질문자1: 훌륭하신 말씀, 여러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됐으리라 믿습니다. 스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질문자2: 부처와 보살은 마음을 낸 것과 안 낸 것과의 차이라고 하셨는데, 삼계의 욕계 색계 무색계는 그 마음의 무위법으로 볼 때 어떻게 봐야 되는지 그게 좀 궁금해서 나왔습니다.
▲스님: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따로 이름은 가졌어도 결국은 하나입니다. 생활 속에서도 가정에서 가장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하듯이, 그것은 이름일 뿐이지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을 배우려 하지 마세요. 마음의 뜻을 알아야 그 도리를 알 것입니다.
▲질문자2: 49라는 숫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49일 동안을 선정에 계셨고, 또 보통 천도를 할 때 49일을 하시고, 과거에 여인네들이 아이를 낳으면 7일이 다 갈 때까지 출입을 못하게 했었는데, 유위법으로 볼 때는 49라는 숫자에 뭔가 뜻이 있지 않은가 궁금합니다.
▲스님: 49라는 것은 49일을 칭하는 것이 아니라, 3×3은 9를 말하고 40은 동서남북 전체를 한 데 합친 것을 말합니다.
▲질문자2: 그럼 7×7은 49가 아니고 40하고 9하고 합친 겁니까?
▲스님: 뜻으로 볼 때는 전체가 한 데 합쳐서 과거 삼, 현재 삼, 미래 삼 해서 구를 일심으로 돌려 일심조차도 없을 때에 비로소 49라고 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 49일이라 하는 것은 천도식의 문이 열렸다 이 소립니다.
▲질문자2: 예, 감사합니다.
▲질문자3: 제 막내아들이 방에만 들어앉아 한숨을 쉬고 그러는데, 누구한테 들으니 그 아이 할아버지 산소에 상석을 놓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스님께 말씀드려 봅니다.
▲스님: 옛날에도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 저는 나쁜 일도 안 하고 착하게 사는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고가 많습니까? 이 모든 고난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하고 말씀드리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과거를 못 보거든 현실을 보거라. 현실에 다가오는 걸 본다면 과거에 네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느니라. 그리고 네가 현실에 어떻게 하는가를 지켜본다면 미래에 어떻게 올 것인가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누가 갖다 준 것도 아니요, 누가 빼앗아가는 것도 아닌 것이죠. 모두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녹이려면 항상 말씀드리듯이,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거기에 맡겨 놓아야 합니다. 한마음은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악업 선업의 의식들이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 쓰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며, 모든 것을 한 데 합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이익하게 하시고 부드러운 말과 올바른 행을 하며 남에게도 착하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물질적인 보시는 못하나마 마음으로라도 보시를 해야죠.
무엇보다도 마음 보시가 첫째입니다. 그렇지 않고 남을 원망하고 조상을 원망하며 밖으로만 끄달린다면 그 업보는 세세생생에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꼭 한마음 주인공 속에서 나온 것이니 한마음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렇다고 ‘해 주시오’라고 하지는 마세요. ‘해 주시오’ 한다면 둘이 되니까요.
장갑을 낀 손이나 장갑이 똑같이, 손이 움직여야 장갑이 움직이듯 그와 같은 것입니다. 하여튼 모든 과보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내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주고 업보를 녹이며 병고액난을 소멸케 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시고,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맡겨 놓고 돌아가야 합니다.
▲질문자4: 여기 오는 신도들 중에 현대의학으로도 나을 수 없는 병들을 한마음 도리로 낫는다고 하는데 스님께서 낫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주인공이 낫게 해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경기도에 가면 기독교의 할렐루야 기도원이라고 있는데, 경기도에도 있고 광주에도 있으며 그 기도원의 지원이 전국에 있습니다. 그 기도원에 가면 현대의학으로는 낫게 할 수 없는 암이나 백혈병, 또는 다른 기타의 병들을 낫게 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우리 마음에서 찾는 주인공이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낫게 해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맡기면 예수님이 다 알아서 낫게 해준다고 하는데, 스님께서는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항상 그렇게만 한다면 밖의 노예가 되지 않을까요? 낫게 해달라고 항상 빌어야 하니까 말이에요. 그러나 불교는 그렇지 않아요.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서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 세세생생에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체가 없어서 너와 내가 말을 할 때 벌써 전기가 들어오는 것과 같이 전자와 전자가 한 데 합쳐지는 순간이죠.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합쳐지는 순간에 어느 한쪽에서 네가 불을 들어오게 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불을 들어오게 했다고 할 수가 없단 얘기죠. 알아듣겠어요?
불은 양쪽 전자와 전자가 합쳐져야 밝게 들어오는데 어느 쪽에서 했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말을 하는 순간에 마음과 마음은 전기와 같이 불이 들어왔다 이겁니다. 그런데 누가 낫게 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네 마음 내 마음이 둘이 아닌 데서 불이 번쩍 켜진 건데요. 그러니 부처님께서 낫게 해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부처님께서 낫게 해주셨다고 하지 않고 여러분이 할 수 있으니 여러분이 낫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 열매가 열리고 익어서 만 가지 맛을 내게 할 수 있는 여건을 모르기 때문에 각자 자신들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상대도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은 자기가 낫게 한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악업의 보도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요, 선업의 보도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니 무너뜨리는 것도 자기가 하는 것이죠.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지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할 때 때리든지 안 때리든지 욕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부모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합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자비인 겁니다. 거기에 이유가 붙어서 사랑을 한다 안 한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유가 붙으면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업보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걸 강조하고 있고 병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요. 여러분 자체가 없는데 병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없다는 그 자체는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이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말입니다.
그걸 비유하면 비행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갈 때 보이지도 않는데 거기 먼지 앉을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렇다는 걸 몰라서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사니까 그렇지, 이거 하나도 (법상을 가리키시며) 그렇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질문자5: 스님께서는 생활 속에서 마음 법을 공부하라고 하시는데 얼마 전에 제 동생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 동생이 회사에서 작업을 하는데 기계가 자주 고장이 난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 기계를 사용하면 고장이 나지 않는데 다시 동생이 사용하면 얼마 안가서 또 고장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던 바와 같이, “모든 것을 둘로 보지 말고 하나로 보아라. 그러면 네가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그 기계가 작업을 한 것이다. 항상 기계에게 고마움을 갖고 작업을 해라. 네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기계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 아니냐. 그러니 항상 네 자신이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계가 했다고 생각해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기계와 나와도 똑같이 한마음으로 일체가 되는 것입니까?
▲스님: 그렇죠. 어느 것 하나도 이심전심으로 말 안 듣고 말 안 하는 게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상징으로 모시고 있다 해도 이 자리에 앉았을 땐 부처님으로 모두 한 데 합쳐지고 때에 따라선 나한테로 합쳐집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아버지한테 가면 아버지로 하나가 되고, 아들한테 오면 아들로 하나가 되는데 이러한 도리는 무슨 까닭인고?’ 하고 물었다고 하듯이, 내 마음을 전부 기계로 합쳐주면 나도 기계가 될 것이고, 기계를 내 마음으로 한데 합쳐 둘이 아니라고 볼 때는 둘이 아닌 까닭에 무난히 작업이 잘 될 것입니다. 이리 가도 하나요, 저리 가도 하나이니까요. 이 도리를 알게 되면 이리 가도 나요, 저리 가도 나이니 내가 없다라는 얘기가 나오죠.
▲질문자5: 저는 사람들을 치료하면서 사는데 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그 마음으로 손님들을 치료할 때 제가 한다는 생각 없이 환자들을 치료합니다. 그런데 손님들이 어디 아프다고 얘기하기 전에 제 자신이 먼저 그 아픔을 느낍니다. 또 손님들이 근심 걱정을 가지고 있을 때는 제 자신도 모르게 손님들의 근심 걱정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도 그와 똑같은 원리에 속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스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남의 아픈 것을 나한테 넣되 넣는다는 생각도 없이 ‘그것도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니 한마음 속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지.’ 하고 뜻으로 생각을 하는 것이지 말로 하라는 것이 아니죠.
▲질문자5: 이건 제 가정의 문제입니다만, 어머니와 저는 항상 마찰이 많습니다. 모든 것은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어머님에게 제 자신은 할 만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제 자신이 낮아서 그런지 몰라도 어머니의 정신 상태나 행동이 하나도 진전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건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스님: 그건 전자와 전자가 똑같듯이 어머니의 마음과 처사님의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처사님 마음에 어머니라는 가설이 되어 있고 자식이라는 가설이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면 어머니의 마음도 스스로 밝아지고 모든 문제가 원만해질 겁니다.
▲질문자5: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방 앞에서 질문드렸던 법우가 기독교와의 문제를 이야기 했었는데, 요즘 보면 세상에서 금년 10월 예수가 공중에 재림해서 우리 영혼들을 끌어올린다는 식의 휴거와 종말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스님께서 가지고 계신 고견을 조금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그것은 사람의 마음으로 짓기에 달린 거예요. 종말이 따로 없어요. 마음의 심판이죠. 사람들이 마음을 착실하고 진실하게 쓴다면 모든 것이 원만히 돌아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종말이 올 것이고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가정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세계도 마찬가지로 산 사람들이 마음을 잘 씀으로 오고 가는 것이지 종말이 온다 안 온다 그런 것이 없어요. 여러분 마음먹기에 달린 겁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할 거 없어요. 그렇다면 됐소?
▲질문자6: 아미타불!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일체 계급과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삼 아승지겁을 닦지도 않고 단 한 번 뛰어 여래의 지혜에 오른다는 그 말이 무슨 말이며, 그 소식은 어떤 소식인가. 이것이 오랜 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서 스님께 여쭈려고 멀리 산속에서 내려왔습니다.
▲스님: 바다에 온갖 물이 다 모였어도 물 자체가 젖지 않는다는 그런 뜻이죠. 온갖 물이 다 모여서 흘러 돌아도 그 물 자체는 젖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까닭을 아시오? 읊어야 될 일이지만 말로 그냥 했어요. 말을 해도 말함이 없어야, 모두들 죽비를 치고, 주먹을 쥐고 법상을 치고 하지만 쳐도 침이 아니요, 치지 않아도 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 까닭이 젖지 않는 까닭이오.
▲질문자6: 항상 그 말씀에 대해서 짐작으로는 ‘그럴 것이다’ 하고 그에 대한 막연한 어떤 확신은 있어 왔습니다만, 그야말로 한점 먼지도 없는 그러한 허공과 같은 탁 트인 것이 항상 막혀왔습니다.
▲스님: 대나무 방귀씨를 참구한다면 될 수 있을 텐데요. 그리고 방귀씨를 찾았다 해도 대나무 방귀털을 먹여서 길러야 할 테니 방귀씨를 찾고 나서부터가 진짜 공부죠. 더 먹여도 안 되고 덜 먹여도 안 되니까 말이에요. 그러니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공을 진실하게 믿고 일체 모든 것을 거기에 놓는다면 돌아가지 않을까요? 남이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일체 모든 부처님들이나 선지식들이 이끌어 주고 깨우쳐 준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에요. 자기 마음 가운데 마음이 또 있는데 그 마음과 마음 아닌 마음이 서로 상봉을 해야만 족하다고 할 수 있죠. 진짜 이끌어 갈 수 있는 거죠. 결국 말하자면 자기 조상입니다. 자기 조상부터 발견해야 남의 조상도 내 조상 아님이 없다는 도리를 알게 되고 내 몸 속의 악업 선업의 중생들에게 다 항복받을 것이며, 모두가 보살로 화할 것이다 이겁니다. 그 중생들은 잘하고 못하고를 느끼지 못해요. 사람이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고, 좋은 것을 알고 나쁜 것을 알며 나쁜 길로도 갈 수 있고 바른 길로도 갈 수 있는 여건이 생기고 99% 부처가 된 것이죠.
그런데 한생각을 잘못해서 세세생생에 끄달린다면 그건 말도 안되는 것이죠. 보통 비구스님네들은 비구니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 하는데 비구다 비구니다 구분하기 이전에, 풀 한 포기도 나 아님이 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겁니다. 사생이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데 모습은 다르고 차원은 다를지언정 어찌 살림살이가 똑같지 않겠습니까? 하찮은 벌레 하나도 나 아님이 없고 내 몸 아님이 없는데, 하물며 비구니라고 저버린다면 자기들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모든 만물이 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키워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산하대지를 기르는 어머니요, 우주의 태양은 아버지가 되는데 어찌 아버지가 따로 있고 어머니가 따로 있겠습니까? 무조건적인 자비, 그것만이 제 나무에서 실과가 익으면 만 가지 맛이 나고, 만 가지 맛이 나면 씨앗이 여물어서 되심으면 되먹일 수 있다고 끝간 데 없이 말씀을 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거를 지금 관념 속에서, 관념과 습에 젖어서 이렇게 해야만 된다는 거, 청규는 이런데 이렇게 해야만 된다는 거, 이런 것에 빠진다면 안 되죠. 그런 걸 그렇게 하지 말라고, 계율을 지키지 말라는 게 아닙니다. 남의 말을 들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남의 이름을 찾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남이 나를 갖다줘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 갖다주는 것도 없고 갖다주지 않는 것도 없는 그 자체에 인연줄이라는 게 얽혀서, 얽히고 얽혀 있는 것에서 일어나지 못하지 말고, 인연줄에 얽힌 것을 화끈히 한순간에 벗어던지고 일어서라 이런 거지요. 그러려면 먼저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누가 마음을 내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가 생기면 말을 하게 되고 용도가 생기면 행하게 되며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죠. 자기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려야 해요. 속에 있는 중생들은 모르니까요.
때에 따라서는 이것도 나오고 저것도 나오며,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나오는데 그럴 때마다 한번 굴려서 감사하게 생각하고는 다시 놓게 될 때 굴려서 다시 돌아서 나오게 되죠. 이게 직접 들어가는 순리요, 바로 통에서 벗어나려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이 소리입니다. 오신통을 안다 해도 도가 아니라 했던 것은 오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일체 만물 만생이 돌아가는 이 세상살이가 하나도 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말을 유창하게는 잘 못합니다. 남들처럼 책을 많이 본 것도 아니구요. 여러분보다 저 아래 밑바닥에 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신세계에서 물질세계로 나오고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들며 돌아가기 때문에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는 둘이 아니고, 선과 교도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여튼 스님이 과감히 비구 비구니를 벗어나서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것도 대단하십니다. 내 땅의 토지 값을 내지 않아도 되겠군요.
▲질문자7: 스님께서 부득이 앞의 스님께 여쭤보셨으니까 제가 답을 해볼까 합니다.
▲스님: 무얼 말이요.
▲질문자7: 물은 젖지 않는다고 조금 전에 여쭤 보신거요.
▲스님: 젖지 않는 뜻이라고 얘기를 한 것이죠.
▲질문자7: 허공에 온갖 말이 서로 오고 가지만 본래 허공은 말이 없죠. 허공은 본래 말이 없기 때문에 또 온갖 말이 걸림 없이 오고 가며 작용하는 것과 같이 원래 그런 것이 우리 한마음의 본래 천진의 작용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제가 좀 부끄럽습니다만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질문이 있어 온 것이 아니고요.
▲스님: 그럼 뭣 때문에 왔소? 여기 온 까닭은 뭐요?
▲질문자7: 경을 보면 굳이 개안종사를 찾아가서 결택을 하라고 한 그런 말에도 제가, 천진의 자리에 어디 결택과 점검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인연이 있으면 흘러가는 바람도 열기가 들으면 바람이 일어나는 것처럼 열기가 없으면 바람도 자는데 한번 여기 오고 싶었습니다. 제가 말주변은 없지만 이렇게 나온 것도 혹 거기 대답이 될까 싶어서요. 대답이 따로 없는 것인 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스님: 물론 진실하게 내면세계에서 함이 없이 그 말을 했다면 좋겠으나 그 대답은 말을 했으면 벌써 한데 떨어지는 일인데….
▲질문자7: 그런 것은 압니다.
▲스님: 알긴 뭘 알아요? 안다고 하면 벌써 그릇된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할 줄 알면 됐어요.
▲질문자7: 제가 말대답을 한 게 됐습니다.
▲스님: 말만 그렇게 해놓고 행이나 말이 그렇지 않을 때는 그게 무효로 돌아가고 맙니다.
▲질문자8: 옛 선객들이 선지식을 친견하실 때 선상을 돈 뜻이 무엇입니까?
▲스님: 토지 값을 내지 않는 도리이지요.
▲질문자8: 부처님께서도 말씀이 있으셨고 스님께서도 가끔 말씀하십니다.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할 수 없다고요. 그렇다면 모든 불자가 원한다고 표현하면 될지 모르겠으나 성불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불은 인과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인과에 관계없는 것입니까?
▲스님: 인과에 관계가 없습니다.
▲질문자8: 그렇다면 어찌 불법에 인연 없는 중생은 어쩔 수 없는 겁니까?
▲스님: 어쩔 수 없긴 뭘 어쩔 수 없어요? 인과도 붙을 자리가 없다고 했거늘 어찌 인연 없는 중생은 어찌할 수 없다는 그런 말이 거기 붙을 수 있겠어요?
▲질문자8: 병에 관해서 여쭙겠습니다. 저도 아픈 사람 입장이니까 이런 질문을 해도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가끔 저는 무엇이라고 표현하긴 힘들지만 항상 품안에 있음을 느낍니다. 집안에 있을 때 어머니가 눈살을 찌푸리시거나 아니면 저에게 매를 때리실 때에도 결국은 항상 어머니 곁에 있기 때문에 그 매가 매가 아님을 느낍니다. 물론 이건 제 입장이지만 다른 분의 입장에서는 그게 매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불법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병이 병입니까?
▲스님: 병이 붙을 자리가 없다고 했거늘 자기도 없는데 병이 어디 있겠어요.
▲질문자8: 물론 여기서는 스님 말씀을 듣는 게 옳지만 짤막하게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이 말이나 경전은 중생들을 위한 말이나 경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생의 입장에서 병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말이 성립이 되겠습니까.
▲스님: 지금 붙을 자리가 없이 돌아가고 있네요. 그걸 깨닫기 위해서 여기 온 게 아닙니까? 한마음은 포괄적인 한마음이지 개별적인 한마음이 아니에요. 경우에 따라 어떠한 것이 오든지 닥치는 대로 거기에 맡겨 놓도록 해요.
▲질문자9: 스님,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요즘 제 심정이 아주 이상해요.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공허하다는 느낌이 절실합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것은 어찌하여 생겨나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만이 이런 공허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지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스님: 본래 마음은 체가 없어서 공허한 것도 없고 허망한 것도 없어요. 그런 까닭을 알면 허망치도 않고 또는 즐겁지도 않으며 그대로 즐거운 것이죠. 그러니까 허망함이나 공허함이 바로 법우 속에서 나온 거예요. 네가 있으니까 네 속이 있고, 네 속이 있으니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죠. 땅에 엎드러지면 그 땅을 딛고 일어나듯이 그 속에서 나온 것이니 그 속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과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써 그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에요. 마음은 그렇게 체가 없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금방금방 돌아올 수 있으니 그렇게 해봐요.
▲질문자10: 스님, 저는 오늘 여기 처음 왔습니다. 실은 저희 애가 아픈데 처음에는 딴 아이들보다 걸음이 늦고,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학교에 다녔었는데 6학년인 지금은 걷지도 못하고 온 몸에 힘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불치병이라고 진단이 나와 있고 해서 다른 데 믿을 곳이 없어 스님께 왔습니다.
▲스님: 그것을 이 마음 도리로써, 그 업보를 녹이려면 모든 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니, 한마음 속에서 나온 것이니 한마음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항상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참구하세요. 애한테도 그렇게 일러주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