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약왕보살
가끔 선재는 안다는 것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마음 속으로 알고만 있는 것이 다인지, 아니면 그것을 온 몸으로 느껴야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영등포역의 어느 철도원 소식은 한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하게 한다. 이 철도원은 선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구해내고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미처 피하지 못해 두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발목을 절단할지도 모른다는 애초의 걱정과는 달리 접합수술이 잘 되어 걸을 수는 있다고 하니 천만 다행이다.
선재는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참으로 안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가 달려오는 열차를 뻔히 보면서도 선로의 아이에게 뛰어 든 것이 ‘철도 공무원은 이런 상황에 승객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든가 ‘저 아이를 그냥 두면 철도 공무원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는 등의 규정이나 지식 때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이가 위험한 모습을 보고 아무런 분별심 없이 선로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철도 공무원도 존재하지 않고 아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상황만 존재한다.
<법화경>에서는 약왕보살이 전신인 일체중생희견보살일 때에 법화경의 말씀을 듣고 온 몸을 공양한 일을 두고 “온갖 꽃과 향과 영락으로 공양하고 갖가지 물품으로 공양한다 할지라도 이에 미치지 못하며 나라와 처자를 보시한다 할지라도 이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제일의 보시며 보시 중에는 가장 존귀하고 최상이니, 법으로써 모든 여래를 공양하기 때문이니라” 하며 칭송하고 있다. 진리를 위해 내 몸을 생각하지 않는 이런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들은 진정한 무아(無我)의 실천이라고 할 것이다.
이제 그 철도원은 우리 시대를 살고 있는 약왕보살이다. 그런 보살께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공양을 올리는 일은 진리 속에 살고 싶어하는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최원섭(성철선사상연구원 연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