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 발견은 사물의 세계 버리는 것
세상 모든것 허망한 그대로 ‘진리’
이 세상의 말이라는 것은 결국 존재(실체)를 가리키기 위한 은유에 불과하여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것이기에 말의 탄생은 사물의 질서의 탄생이요, 문화와 문명의 탄생이기는 해도, 동시에 인간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한 비극의 탄생이기도 하다.
은유는 은유를 낳고, 꿈은 꿈을 낳고, 말은 말을 낳을 뿐이다. 우리는 육근(六根)에 의하여 상징으로 표현되는 이 사실적 세상 속에 살면서 마치 이것이 전부라고 믿어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참된 나, 진리의 나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은유·말·사물의 세계를 버리고 ‘그 자체’를 체득해야만 하는 과정이다. 이렇듯 ‘그 한 놈’을 알기 위해 말을 떠나야 하는 것과 ‘범소유상 개시허망’은 표리(表裏)의 관계이자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기에 서양의 합리적 이성의 출발점을 이룬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그는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었던 것이고, 꿈속의 나비를 말하며 어느 쪽이 자신인지 되물었던 장자 역시 그 양쪽 역시 꿈에 불과함을 못 보았을 뿐이다.
특히 말은 말하는 나·주체와 너·객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내 안에서의 혼잣말이라도 말과 더불어 말에 의존한 생각은 곧 대상을 지닌 분별이요 집착이며 욕망의 한 발현이다. 인류의 문화·문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곧 인간 욕망의 한 단면이요 표현에 불과 함을 보게 된다. 본디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진실의 세계에서는 너와 내가 없어 주객이 없으며, 생사도 없고 둘도 아니요 하나도 아니며 전체라 해도 잘못되기에 말 없음, 그것은 참선 수행의 첫걸음이요, 말 떠남은 참선의 기본이 된다.
이제 선사들의 화두·공안이 왜 그렇게 비논리적인 황당한 (사물의 질서로부터 볼 때)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말은 결국 단순한 상징과 은유이기에 한 모금으로 장강의 물을 마시라느니, 수미산이 거꾸러진다느니, 등등의 이런 황당한 말들이 지극히 자상한 도리가 되니 부디 의심하지 말고 이미 듣고·믿고 있는 말의 세계를 하루 빨리 놓아 버리고 진실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끝으로 이러한 우리의 믿음에 의해 만들어진 꿈과 같은 이 사물의 세계 역시 진리의 한 얼굴이라는 점이다. 육근(六根)이라는 우리가 지닌 조건에 의해 진리의 한 단면을 사실이라는 믿음으로 만들어 보고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사물·비유 역시 그러한 믿음이라는 연결고리로 진실·실상인 그 자체와 또 다른 의미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기는 해도 알고 보면 이것이 그대로 진리의 한 모습이다. 처처물물 모두가 화두가 되고, 이 우주 법계가 그대로 부처의 설법이 되는 것이기에 알고 보면 이 세상에 한마디 더 할 것도 없다. 각자의 모습으로 잠자고 밥 먹고 생업에 열심인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