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왕 때 일이다. 도중사(道中寺)의 생의(生義) 스님이 꿈을 꾸었는데, 한 스님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남산에 올라가더니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께서 나를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하여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그가 표시해 놓은 곳을 찾아가 땅을 파니 과연 돌미륵이 나타났다. 그 미륵상을 삼화령 위에 옮겨 절을 세우고 이름을 생의사(生義寺)라 하였다. 충담스님이 해마다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달여 공양하던 것이 이 부처라고 한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설화다. 이 설화에 나오는 불상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모셔진 삼화령석조미륵삼존불상으로 추정된다.
경주사람들은 이 삼존불상 가운데 양쪽의 보살상들을 ‘애기부처’라고 부른다. 이 보살상들은 1m 남짓한 4등신의 몸매에 순진무구하고 앳된 표정을 짓고 있다. 영락없이 네 살배기 어린이 모습이다. 이 애기부처는 7세기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그렇지만 애기부처는 중국 북제, 북주시대부터 일본 하쿠호 시대까지 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양식이다. 일본 학자들은 이러한 양식의 불상을 ‘동형불(童形佛)’이라고 부르는데, 그것 또한 애기부처라는 의미이다.
애기부처의 이미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여래입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얼굴은 미소년 상이지만, 몸매는 4등신의 어린아이 모습이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肩遍袒)에 오른쪽 엉덩이를 옆으로 내민 포즈가 앙증스럽다. 이 바람에 법의의 오른쪽 끝자락이 살짝 들렸는데, 이것이 이 불상의 매력이다.
도대체 왜 부처님을 앳되고 앙증스럽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바로 친근감이다. 부처라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미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이다. 원효스님이 광대와 같은 복장을 하고 거리낌 없는 행적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한 것도 같은 시기, 같은 맥락의 일이다.
이제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가 되었지만, 성철스님 하면 떠오르는 ‘삼천 배’에 관한 일화도 이 불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철 스님을 만나려면 삼천 번 오체투지를 해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바로 어린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삼천 배를 하지 않아도 스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천 배의 고통을 피하려는 신도는 일부러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어린아이는 곧 부처이다. 너무나 간단한 진리이지만, 허망하게 높은 것만을 쳐다보는 중생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은 차원의 것이다. 삼천 배를 하여 자기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한껏 낮추어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그러한 세계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